초기에는 영웅이 필요하고, 성장기에는 시스템이 필요하다
앞으로 “개발자”, “PM”, “디자이너” 같은 직무명만으로는 충분하지 않을 수도 있습니다.
최근 앤트로픽 내부에서 팀을 구성할 때 쓰는 인간 유형이 공개됐다는 글을 봤습니다.
새 아이디어를 던지는 사람,
제품의 뼈대를 설계하는 사람,
UI와 코드를 다듬어 완성도를 끌어올리는 사람,
운영과 안정성을 만드는 사람처럼 역할을 더 세분화해서 조합한다는 내용이었습니다.
이 글을 보면서 특히 스타트업 조직이 떠올랐습니다.
초기 스타트업은 “문제를 빠르게 해결하는 사람”이 조직을 살립니다.
대표의 아직 다듬어지지 않은 아이디어를 붙잡고,
기획자, 디자이너, 개발자가 서로의 영역을 넘나들며,
일단 제품을 만들고, 고객에게 보여주고, 문제를 해결하는 사람들이 회사를 다음 단계로 끌고 갑니다.
이 시기에는 완벽한 프로세스보다 실행력이 중요합니다.
명확한 역할 분담보다 문제 해결력이 중요합니다.
정리된 시스템보다 밤새 붙잡고 끝까지 만들어내는 사람이 필요합니다.
그런데 회사가 어느 정도 궤도에 오르면 필요한 역할이 바뀝니다.
빠르게 만드는 사람뿐 아니라,
안정성을 만드는 사람,
시스템을 재설계하는 사람,
품질을 높이는 사람,
운영을 표준화하는 사람,
기존 제품의 기술 부채를 정리하는 사람이 필요해집니다.
문제는 많은 스타트업이 이 전환 시점을 놓친다는 것입니다.
초기에는 직접 코딩하고, 장애를 막고, 제품을 밀어붙이던 사람이 조직을 이끌었습니다.
하지만 회사가 성장하면서 더 전문적인 경험을 가진 사람들이 들어옵니다.
그러면 기존 멤버는 자신의 역할이 위협받는다고 느낄 수 있습니다.
반대로 새로 합류한 사람은 “왜 지금의 구조와 리더십이 그대로 유지되는가?”라는 의문을 갖게 됩니다.
비즈니스 조직도 비슷합니다.
초기 멤버는 “회사가 가장 힘들 때 내가 버텼는데, 이제는 나를 당연하게 생각하는구나”라는 감정을 갖게 되고,
새로 합류한 멤버는 현재의 역할, 성과, 전문성만 기준으로 조직을 봅니다.
결국 사람의 인성이나 실력 문제가 아니라,
역할이 바뀌어야 하는 시점에 역할은 그대로이고, 기대만 달라지는 것이 문제인 경우가 많습니다.
초기에는 영웅이 필요합니다.
하지만 성장기에는 시스템이 필요합니다.
영웅에게 시스템을 기대하고,
시스템을 만드는 사람에게 영웅처럼 행동하길 기대하는 순간,
조직은 서로를 신뢰하지 못하고 핑거포인팅을 시작합니다.
제가 본 많은 스타트업의 초기 팀은 실력이 부족해서 무너진 것이 아니었습니다.
회사의 성장 단계에 맞게 팀과 역할을 다시 설계하지 못했기 때문에 흩어졌습니다.
그래서 앤트로픽이 말하는 효과적인 팀 구성 방식은 단순히 “일 잘하는 조직”을 만들기 위한 방법론만은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큰 기업에서는 효율과 최적화의 문제일 수 있지만,
스타트업에서는 생존을 위한 조직 재설계의 문제입니다.
이제 중요한 질문은 “이 사람의 직무가 무엇인가?”가 아니라,
“지금 회사의 단계에서 이 사람이 가장 큰 레버리지를 만들 수 있는 역할은 무엇인가?”에 가까워지고 있습니다.
회사의 단계가 바뀌면 사람을 바꾸는 것이 아니라,
그 사람이 가장 큰 가치를 낼 수 있는 역할을 다시 설계해야 합니다.
AI가 일을 대신하는 시대라기보다,
사람의 역할이 더 세밀하게 분해되고 재조합되는 시대가 시작되고 있다는 생각이 듭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