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나라 컴퓨터 역사
컴퓨터 파노라마
전자신문지는 지난 1995-6에 우리나라에서의 컴퓨터 도입사를 다룬 시리즈 기사 <컴퓨터 파노라마>를 연재하였습니다. 매우 가치 있는 기사입니다만, 아쉽게도 잘 알려있지 않고, 전자신문사의 웹 사이트에서 찾기도 쉽지 않아, 이곳에 하나의 파일로 모아 정리하였습니다. 정리하면서 일부 자구를 고쳤습니다. 전자신문사는 그러한 수정과는 아무런 관련이 없습니다. 인용 또는 참조는 전자신문사의 <컴퓨터 파노라마> 웹 페이지로 하시기 바라며, 이곳에 제가 정리하면서 생긴 잘못과 오자등에 대해서 저에게 e-mail 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이관수.
정리자(이관수)는 어떠한 권리도 주장하지 않습니다.
차례
- 한국상륙 30년의 발자취
- 도입기 (1) 한국상륙 20년의 발자취
- 도입기 (2)
- 도입기 (3)
- 도입기 (4) 과기처 발족과 전자계산조직개발조정위 설치
- 적응기 (1) 한글프린터 개발과 OCR 도입
- 적응기 (2) 경제기획원 예산업무와 최초의 데이터통신
- 적응기 (3) 대학의 컴퓨터 도입과 정보과학회 탄생
- 적응기 (4) 금융단 전자계산본부 출범과 최초의 온라인
- 적응기 (5)
- 적응기 (6) 산업의 형성(상)-미니컴퓨터 3총사의 부상
- 적응기 (7) 산업의 형성 (하)-SW산업의 태동
- 적응기 (8) 최초의 국산 컴퓨터 「세종1호」
- 적응기 (9) 한국IBM의 터잡기
- 도약기 (1) 대학의 고급인력 양성
- 도약기 (2) 상공부 정책의지와 전자기술연 출범
- 도약기 (3) 후지쯔의 한국진출과 포항제철의 전산화
- 도약기 (4) 삼성전자와 휴렛패커드
- 도약기 (5) 컴퓨터 국산화의 세가지 갈래
- 도약기 (6) 마이크로프로세서 혁명과 마이크로컴퓨터
- 도약기 (7) 충북도청 행정정보시스템 시범사업
- 도약기 (8) 전경련 보고서와 과학기술처
- 도입기 (9) 컴퓨터 원격탐사로 섬을 발견하다
- 도약기 (10) 경제개발 5개년 계획과 3대 전자관련연구소
- 도약기 (11)
- 방황기 (1) 컴퓨터 도입 승인기준이 마련되다
- 방황기 (2)
- 방황기 (3) PC산업의 태동
- 방황기 (4) 체신부의 부상 ... 전기통신에 정보통신 접목
- http://phps.snu.ac.kr/~kslee/com_panorama.html#<한국데이타통신의 출범>"><한국데이타통신의 출범>
- http://phps.snu.ac.kr/~kslee/com_panorama.html#<114전화안내시스템>"><114전화안내시스템>
- http://phps.snu.ac.kr/~kslee/com_panorama.html#<전자식 공중전화기>"><전자식 공중전화기>
- 방황기 (5) 1981년 선거개표 방송
- 방황기 (6) 국가 표준화사업 실패로 끝나다
- 방황기 (7) 청계천 전자상가
- 방황기 (8) 상용 워드프로세서의 등장-명필
- 방황기 (9) 정보산업의 해와 전산망조정위원회의 탄생
- 방황기 (10) 정보산업 육성과 대통령의 관심
- 방황기 (11) 교육용PC보급 계획-두마리 토끼를 다 놓치다
- 정착기 (1) 인천전국체전과 88올림픽 전산시스템
- 정착기 (2) 80년대 PC산업과 MSX
- 정착기 (3) 출연연구소 통폐합과 ETRI의 탄생
- 정착기 (4) 국산신기술 제품 보호 조치와 수입자유화
- 정착기 (5) 2.18개각과 국가기간전산망사업 추진
- 정착기 (6) 국가기간전산망사업 추진 계획 (상)
- 정착기 (7)
- 정착기 (8) 국가기간전산망사업 추진 계획 (하)-행정망 사업
- 에필로그
컴퓨터 파노라마 (1) 한국상륙 30년의 발자취 차례로 돌아가기
30여년전 도입초기의 컴퓨터들은 인구센서스통계와 더많은 컴퓨터 도입을 위한 활용교육에 집중 투입됐다. 그래도 사람들은 컴퓨터가 마치 공상과학 (SF)소설에 나오는 만능기계쯤으로 여겼던 것이 사실이다. 당시 컴퓨터의 성능이 트랜지스터를 사용하는 매우 초보 수준의 기계였음은 물론다. 이제 컴퓨터는 1가구 1대 시대가 멀지 않았을 만큼 보편화됐으며 기능도 상상할 수없을 만큼 발전됐다. 하물며 컴퓨터를 이용하는 영역의 다양성과 컴퓨터를이용함으로써 변모된 산업 및 개인생활의 모습이란 말할 나위도 없을 터이다.
그러나오늘이 있기까지는 무작정 30여년의 세월이 쌓인 결과는 아니다. 그 세월 동안에는 선각자들의 피나는 의지와 그에 못지않은 수많은 시행착오가 있었다. "역사는 미래의 거울"이라는 평범한 진리를 구하지 않더라도 지나간 역사를 뒤돌아 보는 것은 바로 우리 앞에 미래가 있기 때문이다. 앞으로 1년 여 동안 연재될 컴퓨터 역사는 30년 전부터 오늘에 이르기까지 쌓여진 신문 .잡지.기업사사.연감.정부보관자료 등을 토대로 쓰여지는 것임을 밝혀둔다. <편집자 주>
차세대 컴퓨터 운용체계 "한글윈도우95"가 발표되던 지난 11월28일 오전 국내 5대 PC공급회사 가운데 하나인 S사의 주식이 오름세를 보였다. 미미한 수준이긴 하지만 이같은 사실은 전직대통령 비자금사건과 5.18특별법 제정 등정국을 강타하고 있는 악재가 연속되고 있는 가운데 일어난 주가반등이라 는점에서 매우 흥분된 소식이 아닐 수 없었다.
국내 PC공급 1~2위를 다투는 S사는 벌써 6개월 이상 계속되고 있는 대기수 요에 골머리를 앓고 있었다. 아예 처음부터 새로운 운용체계를 기본 탑재한 PC를 구입하려는 잠재 고객들이 "한글윈도우95"가 발표될 때까지 제품구매시기를 늦춰, 기업경영에 적지않은 지장이 있었기 때문이다. 주가반등은 바로" 한글윈도우95"가 발표되는 11월28일부터 S사의 주력 품목인 PC판매가 폭발하리라는 사실을 정확하게 예고하는 것이었다.
96년이면 우리나라에 컴퓨터가 도입된 지 30년 째가 되는 해이다. 어느덧 한세대가 지난 셈이다. 30년 전은 커녕 불과 몇 년 전만하더라도 컴퓨터가, 그것도 자사와는 직접적으로 무관한 소프트웨어 제품발표 사실 하나가 기업 의주가 오르내림세에 영향을 주리라고는 상상할 수도 없었던 일이었다.
컴퓨터산업이 만들어낸 신조어 "정보통신"의 의미는 30여년이 지나면서 이제는 한 나라의 정책수립 과정에서부터 개인의 일상생활에 이르기까지 그 영향을 끼치지 않는 곳이 없을 만큼 폭넓게 사용되고 있다. 정부 부처 가운데지난 94년 그 의미를 그대로 원용한 정보통신부가 탄생한 것은 이를 잘 반영 해주고 있다고 할 수 있다.
30년에 불과하지만 과거를 되돌아 보고 쌓여 있는 자료들을 정리해 보려 하는 것은 단지 이같은 격세지감의 흥미만을 돋우려 하는 것은 아니다. 우선은시간이 가면 잊혀져 버릴 것이 분명한 지나간 흔적들을 기록해 두고 싶고, 그래야 앞으로 누군가 이 사실을 토대로 우리의 컴퓨터 역사를 정리할 수 있으리라 믿기 때문이다.
우리나라에 "공식적"으로 처음 도입된 컴퓨터는 1967년 경제기획원 통계국 에설치된 IBM의 "IBM 1401"로 기록돼 있다. 물론 이전부터 미8군 등 주한 미군영내에서는 미국방성에서 직접 공수된 각종 컴퓨터가 군수 및 작전용으로 더러 사용돼 오고 있긴 했다.
"IBM 1401"이후 오늘날까지 우리나라의 컴퓨터 역사를 더듬어보면 그 어떤분야 못지않게 말도 많고 탈도 많았다. 초창기 우리나라 컴퓨터 역사는 미군 들로부터 컴퓨터사용법을 익힌 지 10년 만에 컴퓨터 국산화 의지를 불태웠는가 하면 중학교 무시험 추첨을 컴퓨터로 처리했다해서 온 나라가 떠들썩한 일도 있었다. 또 은행의 금전 출납을 컴퓨터가 대신한다해서 장안이 흥분되는 등 적어도 80년대 중반까지 우리나라 컴퓨터의 역사는 "일이 터질 때마다 매번 새롭게 쓰여질 정도로 바쁘게 이어져 갔다.
그런가 하면 컴퓨터 도입 5년만에 일어난 "AID차관아파트 추첨부정사건"은 컴퓨터가 경제발전과 인류문명 발달에 반드시 긍정적으로 기여하는 것만은아니라는 사실을 일깨워 준 국내 최초의 컴퓨터범죄사건이었다. 이같은 사건 은 오늘날에는 신문의 가십란에도 등장하기 힘들 만큼 보잘것없고 유치한 것들이다. 그러나 컴퓨터가 처음 도입돼 오늘에 이른 30년을 되돌아 보면 하루하루가 경이롭고 신기했던 나날이었다. 60년대 도입기를 지나 70년대 말부터80년대 중반까지 우리나라 컴퓨터 역사는 컴퓨터의 도입을 크게 늘리고 활용 을 극대화시키는 도약기를 맞게 된다.
물론 이 시기에도 60~70년대 못지않은 중요한 사건들이 일어나게 된다. 특 히이때는 당시 전문가들을 중심으로 컴퓨터 이용이 어느 분야에까지 미칠 수있는가를 실험하려는 의지가 강하게 드러나던 시기였다.
이때는 90년대 이후 세계 컴퓨터 환경의 조류를 움켜쥔 PC가 청계천상가를중심으로 탄생되는 시기이기도 했다. 청계천 상가는 86년 서울 아시안게임유치를 계기로 용산상가로 상권이 이원화될 때까지 한국의 실리콘밸리로서 우리나라 컴퓨터산업의 현주소를 대변하다시피했다.
청계천상가가 우리나라 컴퓨터산업을 떠받친 하나의 축이었다면 반대편을 받치고 있던 또다른 축은 외관상 기업조직을 갖춘 컴퓨터전문회사들이었다.
이시기에한국과학기술원의 석학들과 한국IBM출신 등 젊은 수재들이 모여 각 각설립한 삼보컴퓨터와 큐닉스컴퓨터는 우리나라 최초의 자생적 컴퓨터전문 회사의 효시라 할 수 있다. 물론 이전에 컴퓨터전문회사들이 없었던 것은 아니지만 대부분은 IBM.스페리(현 유니시스 전신).후지쯔.프라임 등 미국이나 일본회사들의 현지법인 또는 대리점들이었다.
젊은이들을 중심으로 한 이같은 기업운동은 80년대 중반 우리나라 컴퓨터 역사 도약기를 대표하는 사건으로서 90년대의 강력한 산업적 토대를 갖추게되는 토양 역할을 톡톡히 하게 된다.
이때는 또한 삼보컴퓨터나 큐닉스컴퓨터에 자극받아 금성사(현 LG전자).삼 성전자.대우전자 등 가전 3사가 일제히 컴퓨터사업에 신규 진출, 전문기업들 이청계천상가 군소기업들의 강력한 라이벌로 등장하는 등 산업적 위용을 갖추게 되는 시기다. 주요 사건을 보면 오늘날 국가기간망의 토대가 된 행정전 산망 등 5대 국가기간전산망이 당시 정부(5공화국)의 강력한 힘에 의해 처음으로 기획됐고 88년부터 시행에 들어간 체신부(현 정보통신부)의 교육컴퓨터 보급계획도 이때 입안되기 시작했다.
이같은 도약기를 거쳐 80년대 중.후반부터 90년대 초반까지 90년을 전후한5년여의 시기는 그동안 확장일로에 있던 컴퓨터 분야에 제동이 걸리게 되는방황기를 맞게 된다.
우리나라 컴퓨터 역사에서 이 시기에 방황기를 맞게 된 것은 도약기에서얻어낸 자신감이 너무 팽배한데 따른 반작용이기도 했다. 가장 큰 시련으로 는5대 국가기간전산망이 각종 부조리로 전면 재검토될 위기에 처한 데다 한때세계에서 4번째 수출국의 자리에까지 올랐던 PC산업이 주요 수출시장인 미국에서 가격경쟁에 밀려 퇴락의 길을 걷기 시작했다.
또 자신만만하게 의욕적으로 추진했던 이른바 국민보급형PC개발프로젝트가 정부지원 미흡과 참여업체 의지박약으로 용두사미가 돼 전체 업계 이미지에 먹칠을 가하는 일도 이때 발생했다.
한편 이 시기에 우리나라 컴퓨터산업은 정부가 이끌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 닐만큼 이른바 공공프로젝트가 많았다. 그러나 업계현실이 무시된 채 정부 의지대로 기획된 것이 대부분이어서 실패한 결과가 더 많았다. 물론 성급한 평가이긴 하지만 주전산기 공동개발 프로젝트 같은 것은 어느 정도 성과를거뒀던 것은 사실이다. 그러나 국민보급형PC나 한국형 운용체계(OS)개발, 대형컴퓨터 국산화계획(오로라프로젝트) 등 굵직굵직한 프로젝트들은 대부분쓴맛만을 남긴 채 소리소문 없이 사라지는 운명을 맞이하곤 했다.
이 시기에는 또 각종 무역자유화가 이루어지고 외국업체들의 직접 진출이 가속화됐고 국내시장에서 국산과 외산이 정면으로 맞부딪치는 사례가 빈번하게나타났다. 그 결과 그동안의 우리나라 컴퓨터산업 경쟁력이라는 것이 사상 루각이었음이 속속 드러나기 시작했고 이를 계기로 기술고도화와 유망분야에 대한 집중투자의 목소리가 높아지기 시작했다.
그래도 이 시기에 역사적으로 기록될 만한 몇가지 사건은 있었다. 바로 86 년아시안게임을 경험으로 독자 추진됐던 88서울올림픽 전산화시스템의 개발 과이의 성공적 운영이었다. 당시 전세계는 서울올림픽에 이르러 규모가 커질 대로 커진 올림픽경기 운영을 어떻게 치룰 수 있을까 하는 의문을 던졌지만당시 시스템공학센터(SERI)가 주축이 돼 개발된 경기정보시스템 "자이온스(G IONS)"는 이같은 우려를 깨끗이 씻어냈다.
방황기를 거쳐 정착기. 비로소 우리나라 컴퓨터역사에 정착기가 시작됐다.
이시대의 특징은 PC와 워크스테이션 등 소형컴퓨터가 이미 컴퓨팅 환경의 중심적 위치에 올라서게 됐고 이를 토대로 다운사이징 바람이 강하게 몰아쳤다는 점이다. 기업사무실에서나 볼 수 있었던 PC는 일반 가정에서 흔히 볼수 있는 가전제품이 돼 버렸다. 또 마이크로소프트라는 소프트웨어 회사의 등장도 중요한 이슈가 됐다. 이를 계기로 국내에서도 소프트웨어에 대한 사용자들의 재인식이 활발하게 이루어지기 시작했던 것이다.
지금까지 살펴본 각 시대구분을 다시 정리해 보면 다음과 같다. 즉, △도입 기(1960~1970) △적응기(1971~1978) △도약기(1979~1986) △방황기(1987~199 2) △정착기(1993~ )
작성일자 : 1995.12.11
컴퓨터 파노라마 (2) 도입기 (1) 한국상륙 20년의 발자취 차례로 돌아가기
컴퓨터에 눈뜨다 "공식적"으로 우리나라에 첫선을 보인 컴퓨터는 1967년4월 경제기획원 조사통계국이 인구센서스통계를 위해 도입했던 IBM의 "IBM 1401"이다. 그런데왜 공식적 이라는 단서가 붙는가.
이를 설명하기 위해서는 당시의 여러가지 사건들을 살펴볼 필요가 있다.
물론이 과정에서 "공식적"기록을 갖고 있는 "IBM 1401"이나 또는 "비공식적 "기록을 남기고 있는 후지쯔의 "파콤222(FACOM 222)"기종 그 자체가 중요한것은 아니다. 또 불과 1~2개월차이 밖에 나지 않은 도입시기를 놓고 왈가왈부하는 것도 의미가 없음은 물론이다.
그런데 여기서 짚고 넘어가야 할 것은 미국에서는 이미 1951년에 첫 상용 컴퓨터("유니백 I")가 출현했었다는 사실이다. 하지만 우리나라에서는 그보다15년 이상이 뒤진 60년대 후반에서야 비로소 컴퓨터에 눈을 뜨기 시작한것이다. "IBM 1401"과 "파콤222"가 중요한 것은 이들이 바로 잠자던 우리의눈과 귀와 머리를 깨워주는 계기가 됐다는 점이다. 어느 컴퓨터가 첫번째 도입된 기종이냐는 시비는 이같은 사실적 기록을 전제로 했을 때만이 의미가 있는 것임은 두말할 나위가 없다.
우선 1967년 4월에 경제기획원 조사통계국에 도입된 "IBM 1401"이 어떤 컴퓨터였던가를 살펴보자. 또 이 컴퓨터의 도입이 당시 우리나라 상황에서 어 떤의미를 던져주었던가를 알아보자. "IBM 1401"에 대해 당시 한 일간지는 "I BM전자계산기 등장 - 경기원에서 처음 시동, 1초 동안에 6만자나 읽어 라는기사에서 다음과 같이 적고 있다.
"우리나라에서는 처음으로 경제기획원 통계국에 설치된 IBM전자계산기가 24일 낮 12시30분부터 시동되었다. 이 계산기는 시가 40만달러에 해당하는 것으로 통계국은 IBM회사에 대해 매달 9천달러의 사용료를 내고 빌린 이 전자 계산기의 성능은 예를 들어, 지난 66년의 인구조사 결과를 완전히 분석하자 면 통계국직원 4백50명과 2억1천만원의 돈, 그리고 14년 반의 시간이 걸리는데 이 기계를 쓰면 9천만원의 돈과 시간은 1년 반으로 단축할 수 있다."("동 아일보" 1967.6.24) 이같은 내용의 기사는 당시 도하 일간지에 모두 실렸는데 통계국은 67년 4월에 이 컴퓨터를 도입, 3개여월에 걸친 설치작업 끝에 이날(6월24일) 박정 희대통령, 장기영부총리, 김기형과학기술처장관, 김학열경제기획원차관 등 요인들이 참석한 가운데 "IBM 1401"의 가동식을 가졌던 것이다.
"IBM 1401"이 도입되기 전까지 통계국은 천공카드시스템(PCS)으로 각종 통계업무를 처리해 오던 터였다. 통계자료에 대해 단지 계산시간을 단축할 수있었을뿐 수동으로 집계하는 기계와 다름없었던 이 PCS는 66년에 실시됐던간이 인구센서스를 처리하기에는 역부족인 상황이었다. 때마침 미국출장중 연방정부와 산업현장 등에서 컴퓨터가 유익하게 활용되고 있는 것은 본 김학 열차관이 통계국에 컴퓨터 도입을 과감하게 지시하게 됐다. 그러나 당시는지금과 달리 우리나라 전체인구중 컴퓨터를 구경해본 사람을 손에 꼽았을 정도로 컴퓨터에 무지했던 데다 기술정보의 부재로 어떤 기종을 택해야 할지막막한 상황이었다.
IBM사가 발표한 지 8년이 지난 "IBM 1401"을 통계국이 선택하게 된 것은매우 흥미있다. 당초 김차관 등이 도입하기로 결정했던 신형 "IBM시스템/370 (S/370)"가 계약 후 실제 도입까지 1년반이 걸렸을 만큼 주문이 쇄도했던 인기 기종이었기 때문이었다. 이런 전후사정에 대해 한 컴퓨터회사의 사사는 다음과 같이 적고 있다.
"기획원에서 컴퓨터를 도입한다는 얘기가 흘러나가자 몇몇 외국기업들이 자사기종 도입을 권유키 위해 기획원 방문이 잇따랐다. 선뜻 기종을 결정하지못하고 있을 때 마침 "타임"지의 S/370 기사를 본 김학렬차관이…(중략) 이기종을 도입키로 하고 IBM측과 기종도입을 협의했다. 그런데 기획원 관계자들과 협의하던 IBM영업대표는 S/370의 주문이 밀려 도입까지 1년 반이 걸리므로 잠정적으로 "IBM 1401"을 도입토록 권유했고 기획원 관계자들이 이 권유를 받아들였다."("한국아이비엠25년발자취") 이때 도입된 "IBM 1401"은 1959년에 개발됐던 것으로서 트랜지스터를 주기 억장치로 사용하던 2세대 컴퓨터였다. 1964년 IBM이 집적회로(IC)를 이용한3세대 컴퓨터 S/360을 발표할 때까지 세계적으로 6만대가 판매됐을 만큼 인기를 누렸다.
2세대 마지막 주자였던 "IBM 1401"은 모든 주기억장치 용량이 16KC(Kilo Character Kilo Byte)에 불과, 성능면에서 XT급 PC에도 못미쳤지만 크기는 캐비닛만한 본체와 여러대의 보조기억장치.인쇄장치.항온항습기.하네스 등 부대장비가 따르는 엄청난 규모였다.
통계국은 "IBM 1401"을 월 평균 4백~5백시간씩 사용하면서 간이 인구센서 스자료를 처리하다 가동 1년반 만인 1968년12월 당초 예정했던 S/370(모델4 0)를 도입하게 된다.
"IBM1401"은 그러나 이처럼 우리나라에 첫 도입된 컴퓨터로서 역할을 했음에도 불구하고 보는 이의 관점에 따라 도입시점에 대한 해석을 달리하고 있는것이 사실이다.
엄연한 2세대 컴퓨터였지만 경제기획원 조사통계국이 "IBM 1401"을 도입한 주 목적은 앞서 지적했던 대로 기존에 도입해 쓰고 있던 PCS의 계산속도 향상이었다. 당시 신문기사나 관련자료들을 엮어 정황을 들여다 보면 김학렬차 관을 비롯한 기획원 관계자들의 "IBM 1401"에 대한 인식은 이 기종이 기존에사용해 오던 PCS보다 단지 한 단계 위의 기계쯤으로 여겼던 것 같다. 따라서 IBM 1401"의 이용시한도 S/370이 도입될 때까지만이라는 "잠정적"시간으로 보았다는 것이다.
그렇다면 당시 기획원 관계자들의 컴퓨터에 대한 지식이 시대착오적이었다 하더라도 PCS는 우리나라의 컴퓨터 도입사에서 매우 중요한 위치를 차지하고있다고 할 수 있는 것이다. 바로 이 점 때문에 일부 학계와 전문가들 사이에서는 아직도 1961년 3월 통계국이 도입했던 IBM사의 PCS를 우리나라에 도입 된 최초의 컴퓨터로 보는 시각이 존재하고 있는 것이다.
실제 1967년 당시 통계국 키펀치실 책임자였던 이춘희씨(현 KIST소프트웨 어공학연구부)는 한 회고문에서 "그당시 나는 최초의 컴퓨터시스템(PCS, IBM 1401)을 이용하여 인구센서스 통계처리를 하던…(중략)"(성기수박사 회갑기념집 1993)이라고 적고 있기도 하다 "IBM 1401"의 "공식적" 기록에 도전하고 있는 기종은 PCS 외에 앞서 언급한 파콤222 가 있다. 1967년 5월 생산성본부에 도입된 "파콤222"는 1961년 일본 후지쯔(부사통)신기제작주식회사가 개발한 것으로서 "IBM 1401"처럼 트랜지스터를 이용하는 2세대 컴퓨터에 해당된다.
"파콤222"의 성능은 기억용량이 18KC(1만8천어), 처리속도가 초당 1백만자 로역시 XT급 PC에 미치지 못했지만 "IBM 1401"보다는 우수했다. 가격도 60만 달러에 이르렀다. 당시 한 신문은 "파콤222"를 "비교.판단.통제에 무한정"이 라고 쓰고 있고 이 기종이 설치된 생산성본부의 전자계산소 내부 사진을 함께게재하면서 "20만어(오기인듯)의 기억장치 등 거의 만능에 가까운 전자계 산기를 설치한 전경"이라며 경외감을 표시하고 있다.("서울경제신문" 1967. 6.20) "파콤222"의 외형은 "IBM 1401"을 훨씬 능가했는데 당시 한 잡지는 "총 하중35톤으로 모두 5대의 트럭에 분승돼 인천에서 서울 회현동까지 운송되면서 경찰 오토바이의 호위를 받았다. 운송에만 2백여명이 투입됐고 설치작업에 25톤 기중기가 철야 동원됐다"고 적고 있다.("기업경영" 1967.9)한국에 상륙 된 시점으로만 본다면 "파콤222"는 일본으로부터 인천항 도착일이 1967년 3월25일로서 1967년 4월15일인 "IBM 1401"보다 기록상으로 빠르다. 또 각각 운용장소에 설치돼 첫 가동에 들어간 날짜도 1967년 6월13일께의"파콤222"가 같은해 6월24일의 "IBM 1401"보다 10여일 빠르다. 그 뿐만 아니라 "파콤222" 를 도입한 생산성본부는 과기처의 기술요원 양성 계획에 따라 같은해 7월10 일 "제1회 전자계산조직 프로그래밍 기초강좌"를 개설하는 등 국내에서 처음으로 전자정보처리시스템(EDPS)요원 양성교육에 나서기 시작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IBM 1401"이 "공식적"으로 국내에 첫 도입된 컴퓨터로 남게 되는 것은 단 한가지 이유에서이다. 당시 재무부장관 소관이던 수입 컴퓨터에 대한 통관허가가 "IBM 1401"은 1967년 4월25일, "파콤222"에게는 그보다 17일 뒤인 5월12일에 각각 내려졌다는 것 때문이다.
작성일자 : 1995.12.19
컴퓨터 파노라마 (3) 도입기 (2) 차례로 돌아가기
1967년 우리나라에 처음으로 컴퓨터가 도입된 해이다. 우연이었을까. 이해에 기록된 또하나의 역사적 사실이 있다. 바로 우리나라 전자계산소의 효시인 한국과학기술연구소(KIST.현 한국과학기술연구원) 전자계산실이 이 해9월14일 발족된 것이다.
KIST전자계산실은 KIST전산개발센터(76년), 한국과학기술원(KAIST)시스템공학센터(84년), KIST시스템공학연구소(SERI.89년) 등으로 명칭을 바꿔 오늘에이르면서 컴퓨터이용기술에 대한 연구가 전무하던 60년대 후반부터 80년대에이르기까지 우리나라 컴퓨터 역사에 거대한 획을 긋고 있다.
사회 전반의 예산업무 전산처리, 전화요금 전산화, 대학예비고사 전산처리, 경영정보시스템(MIS) 모델연구 등 우리나라가 초창기 컴퓨터 영향권에 들어가는 계기가 되는, 모든 시스템 개발을 KIST전산실이 해냈던 것이다. 또 80년대에는 86아시안게임과 88올림픽 양대회 전산시스템의 개발과 성공적 운영을 통해 전산화 기반조성 및 정보화 마인드 확산에 결정적인 업적을 남기고있다.
지난 93년 12월11일 서울 한 호텔에서는 한 로과학자의 회갑기념집 증정행사가 조촐하게 치러지고 있었다. 이날 증정된 회갑기념집은 교수.기업체대표등 현재 학계와 정보산업계, 관계에서 활발하게 활동중인 제자격의 60여명이공동 제작한 것으로 30여년 동안 로과학자가 국내 컴퓨터 역사에 남긴 업적을 80여편의 글로 정리해 놓은 것이다.
증정식이 진행되는 동안 특유의 상고머리에 동안인 로과학자의 얼굴에는하염없이 눈물이 흘러내렸다. 그의 머리에는 문득 30여년 전 KIST전자계산실창설에서 오늘날의 SERI가 있기까지의 갖은 풍상들이 한꺼번에 스쳐 지나갔다.
이 노과학자가 바로 기계공학박사 성기수(현 동명정보대학교 총장)다. KIST전산실에에서 SERI에 이르기까지 30여년의 역사는 성기수의 반평생이기도하다.
1967년 KIST전산실의 창설작업은 당시 34세의 공군사관학교 항공역학교관(대위)이었던 성기수가 실장으로 스카우트되면서 완료된다. 이때 성기수는하버드대 역사상 최초로 2년만에 학위를 획득, 국내외 언론이 극찬하던 이른바 잘 나가던 젊은 과학자였다. 그가 영입됨으로써 KIST전산실 창설작업이완료됐다는 표현은 상당히 의미있는 대목이다. 그의 영입 자체가 결과적으로KIST전산실의 무한한 미래를 열어 주었기 때문이다.
사실 KIST전산실 창설은 그가 혼자서 이루어낸 것이다. KIST의 성기수 영입과 초기활동 상황을 통해 KIST전산실 창설과정을 살펴보기로 하자. 그의 KIST영입은 초대 공군참모총장을 역임한 김정열의 추천에 의한 것으로전해지고 있다. 당시 KIST소장이던 최형섭(작고)은 컴퓨터에 대한 전문지식이외에첫째, 수학적인 두뇌를 가졌고 둘째, 미국 등 선진국에서 실천적 경험을 쌓은 사람이라는 까다로운 조건을 내건 상태에서 김정열로부터 공군대위 성기수를 추천받았다.
최형섭이 이같은 조건을 내건 것은 정부 차원에서 KIST전산실에 거는 기대가컸기 때문이었다. 당시 정부는 일제의 수탈에 이어 한국전쟁이 남겨준 민족의 가난을 면할 수 있는 최상의 처방으로서 경제건설을 겨냥한 과학기술의발전을 꼽았고 이를 계기로 66년2월 미국의 협조 아래 KIST를 발족시킨다.
이어서 컴퓨터 활용기술에 대한 연구가 KIST 핵심 연구분야 가운데 하나로부각되면서 전산실 창설 문제가 대두되기 시작했고 최형섭은 이같은 중대성때문에 초대 전산실 책임자 영입 문제에 무척 고민했던 것으로 전해지고 있다.
성기수 자신도 초대 KIST전산실장 자리가 온 국민의 시선을 한 몸에 받는곳이라는 사실을 직감, 서강대와 캐나다 웨스턴 온타리오대 교수직 등을 포기하는 것으로써 최박사의 배려에 답하게 된다.
67년12월 전산실장에 정식 취임한 성기수는 KIST전산실의 진로를 정하기위해 곧바로 미바텔연구소에서 파견된 전문가들과 함께 컴퓨터관련 수요조사와컴퓨터기종 선정작업를 벌이게 된다.
바텔연구소는 컴퓨터기종 선정을 위한 벤치마크 테스트와 KIST운영의 전반에대한 것을 결정하는 KIST 자문기관이자 KIST 설립의 모델 연구기관이기도했다. 이 과정에서 매우 중요한 토론이 있게 되는데 바텔측이 KIST의 컴퓨터활용분야를 과학기술로 제한하자고 주장한 것이다.
이에 대해 성기수는 사회 모든 분야를 활용대상으로 해야 한다고 팽팽하게맞섰고 결국은 바텔측을 설득하는데 성공했다. KIST 출신들은 이를 두고 오늘날 우리나라 정보산업의 방향이 복잡한 변수들로 구성된 수학적 모델로 자리잡히게되는 분기점이 됐다고 보는 견해가 지배적이다.
KIST전산실은 마침내 69년9월 미컨트롤데이터사(CDC)로부터 숙원이었던 "CDC-3300"초대형 컴퓨터를 월 1만6천8백50달러씩의 임대료를 지불키로 하고첫컴퓨터로 도입하게 된다. 이때 우리나라 대졸 초임은 3만원(당시 환율로 81달러)이었다.
"CDC-3300"를 도입한 KIST전산실은 우리나라 컴퓨터역사상 공식적으로 11번째의 컴퓨터 도입기관(기업)으로 기록되고 있다. "CDC-3300"는 당시로선가장 강력한 성능을 갖는 기계로 평가되고 있었다. 이 때문에 성기수는 이컴퓨터가 도입되던 당시 거의 매일 TV와 라디오방송에 불려다녔으며 1969년말처음으로 대학예비고사의 채점을 광학카드판독기(OMR)식으로 처리해 냄으로써 이 컴퓨터의 인기는 절정에 달한다.
그러나 이때 "CDC-3300"는 고작 32KW(Kilo Word)의 기본메모리와 중앙처리장치(CPU)연산속도도 1플롭스(FLOPS)에 불과한 데다 KIST전산실 요원들조차이 기계를 믿지 못하는 사건이 있었다. 당시 대학예비고사 채점을 담당했던최덕규(고등기술연구원)는 시험지 답안 처리 오류를 막기 위해 여대생 3백명을 3일 동안 강당에 연금한 채 다른 곳에 답안을 옮겨 쓰는(이기)작업을시켰다고 증언하고 있다. 뿐만 아니라 교차검증을 위해 상고생이 주판으로합산을 하고 체크된 에러를 확인하느라 산더미 같은 시험지를 뒤지곤 했다고회고하고 있다.
이로부터 20여년 뒤의 일이지만 KIST전산실은 88년 마침내 국내에서 처음으로 슈퍼컴퓨터 "크레이2 S"를 도입하게 되는데 이 기종의 성능은 기본메모리가 1백28MW, CPU연산속도는 무려 20억 플롭스나 됐다. 도입한 컴퓨터의 CPU연산속도로만 본다면 KIST 전산실의 컴퓨팅파워나 영향력은 20년만에 무려20억배로 확대되는 장족의 발전을 꾀하게된 셈이다.
다시 KIST전산실이 창설되던 초창기로 화제를 돌려보자. 68년부터 성기수와함께 81년까지 이곳에서 재직한 안문석(현 고려대 교수)은 KIST전산실의초창기를 다음과 같이 3기로 나눠 설명하고 있다.
*제1기:YMCA시기(1967~1968)
이때는 KIST전산실이 창설되던 당시로서 현재의 홍릉단지로 입주하기 전종로5가의 YMCA빌딩 5층을 임시 사무실로 사용하던 시기이다. 당시 공사 교관, 한국경제개발협회 조사역, 서울대 경영대학원 및 행정대학원 등에 출강하던 성기수는 바텔연구소와 공동연구를 수행, KIST전산실 설치 타당성 보고서를 작성한다.
성기수가 이때 잠시 적을 뒀던 한국경제개발협회는 자유당 시절 부흥부장관을 지낸 송인상이 경영하던 일종의 경제조사연구소였다. 이곳에서 성기수는제2차 경제개발 5개년 계획의 계량부문을 담당했으며 이때 이명재(현 부산대교수). 이승윤(작고. 전아시아개발은행이사). 안문석 등 KIST전산실 초기 3인방을 만난다.
"CDC-3300"가 도입되기 직전이었기 때문에 정식 컴퓨터는 없었지만 "IBM 029"(카드천공기)와 "IBM 059"(카드검공기) 등 카드천공시스템을 갖추고 있었다.
*제2기:컴퓨터 설치 및 요원선발 시기(1968~1970)
YMCA빌딩에서 현 홍릉단지로 이사를 했으며 본격적인 전산실 요원을 선발하던 시기이다. 이때 최덕규.김길수(전 삼도데이타시스템 사장).한윤경(현경원대교수) 등이 2기 멤머로 KIST전산실에 가세했다.
이때 컨트롤데이터사(CDC)로부터 "CDC-3300"가 도입돼 설치됐고 KIST전산실요원들은 한국전력에 재직중인 송길영(현 고려대교수)로부터 포트란 프로그래밍을, 컨트롤데이터코리아(CDK)의 이덕순(전 삼보소프트웨어 사장)으로부터는 운용체계를 각각 배웠다.
당시 바텔연구소의 공동연구 결과를 토대로 컴퓨터 기종이 "CDC-3300"로결정되면서 이의 도입을 놓고 성기수실장과 청와대 과학담당비서관 정운수와갈등이 표면화됐던 일은 지금도 가끔씩 회자되는 얘기다. 이때 정운수는 다른 기종을 염두에 뒀던 것으로 알려지고 있으며 이 때문에 도입 예산규모가하루 아침에 임차 수준으로 바뀌게 됐다는 것이다.
*제3기:교육반 설치 및 OJT도입 시기(1970~1971)
컴퓨터를 갓 설치한 KIST전산실의 운영방침은 "컴퓨터가 어렵다는 사고를깨는 것"이었다. 이에 따라 일반인을 대상으로 어셈블리 프로그래밍 교육반수강생을 공모했고 수료자 가운데 유능한 이를 교육반 강사로 충원하기도 했다. 혹은 전산실내 프로그램 개발보조원으로 채용하기도 했다. 이것이 OJT(Onthe Job Training)제도로서 초창기 전산실요원 가운데는 여기서 특채된 출신들이 상당수에 이르렀다. 대표적인 이가 김봉일(현 한국통신 소프트웨어연구소장)이었다.
초창기부터 KIST전산실의 교육반과 OJT를 거쳐 나간 사람들은 현재까지 1만여명에 이른다. 이 가운데는 KIST전산실 재직경험자를 포함, 현직에 있는대학교수만 50여명이며 연구원재직중 신기술 개발을 통해 창업한 회사가 15개나 되고 있다. 한 조사통계에 따르면 KIST전자계산실에서 배출한 인력이한때 연구원, 기업 중견간부 및 핵심 소프트웨어 개발인력 등 우리나라 전체컴퓨터 고급인력의 11%에 이른 적도 있었다.
KIST전산실의 교육사업은 지금도 시스템공학연구소 강남분소에서 이어지고있다.
<서현진기자>
작성일자 : 1996.01.08
서현진 기자 E-MAIL:jsuh@www.etnews.co.kr
컴퓨터 파노라마 (4) 도입기 (3) 차례로 돌아가기
우리나라에 역사상 처음으로 진출한 외국 컴퓨터회사는 IBM이다. 첫 발을디딘 컴퓨터회사가 IBM이었다는 사실은 따지고 보면 그다지 놀라운 것은 못된다. 60년대이후 80년대말까지 세계 컴퓨터 역사는 바로 IBM의 사사라고 해도과언이 아니었을만큼 시장지배력이 막강했기 때문이다.
IBM은 64년 3세대 컴퓨터기종의 선두주자 "시스템 360" 발표를 계기로 세계컴퓨터업계 왕좌를 거머쥔다. 80년대말까지 IBM은 세계시장에서 50% 이상의점유율을 기록, 확실한 1당체제를 구축했으며 이런 상황은 한국에서도 예외는 아니었다.
IBM이 한국에 진출한 1967년은 IBM에게는 "시스템 360"시리즈가 없어서 못팔던 시기였다. IBM의 한국진출 계기는 바로 이같은 상황과 결코 무관하지않다.
67년 4월 우리나라에 최초로 도입된 컴퓨터가 "IBM 1401"이라는 사실은 앞서밝힌 바 있다. 당시 IBM은 두가지 조건을 붙여 발표된 지 8년이나 지난 구형2세대 컴퓨터 "IBM 1401"을 경제기획원 조사통계국에 공급했다. 그 조건의하나는 "IBM 1401"을 통계국이 당초 도입키로 했던 "시스템 360"이 인도될때까지만 잠정적으로 사용한다는 것이었고, 또하나는 도입 즉시 컴퓨터 활용에 수반되는 인력교육과 지속적 애프터서비스를 위해 IBM한국법인을 설립한다는 것이었다.
바로 두번째 조건에 따라 IBM은 67년 4월25일 서울에 자회사 "주식회사 아이.비.엠.코리아", 영문으로 "IBM KOREA, Inc."를 출범시키게 된다. 사실 IBM은이보다 앞서 한국진출을 계획하고 현지법인 설립에 대한 시장조사 및 타당성조사에 나섰던 적이 있었다.
IBM은 63년 미국 본사에 근무하던 한국인 이주용(현 한국전자계산회장)에게한국지사장 직함을 주고 한국에 파견, 시장조사를 겸한 영업활동을 수행케한다. 그러나 당시로서는 한국은 IBM의 영업망 확장대상 국가가 되지 못했다. 이주용의 회고에 의하면 3공화국 초기 우리나라의 1인당 국민소득은 1백달러에도 못 미쳤고 국민총생산(GNP)은 IBM의 연간매출에도 못 미치는 상황이었다.(월간 "경영과 컴퓨터" 1987.2)
컴퓨터를 도입하겠다는 기관이나 기업이 나타날 리가 없었다는 것이다. 이후에도 IBM은 홍콩이나 일본주재 영업대표들을 파견, 한국진출을 타진했으나별다른 성과를 거두지 못했다.
참고로 IBM의 자회사가 설립된 아시아 태평양지역 국가를 살펴보면 호주(32년).일본(37년).필리핀.인도네시아(이상 38년).태국.버마.인도(이상 52년). 싱가포르(53년).뉴질랜드.말레이시아(이상 55년).대만(56년).홍콩(57년). 스리랑카(62년) 등이다.
IBM은 바로 이같은 상황에서 한국정부로부터 현지법인 설립을 요청받았던것이다. IBM으로서는 경제기획원의 "IBM 1401" 도입을 계기로 여러 기관에서컴퓨터 도입에 관심을 보인데다 마침 한국정부가 외자도입을 위해 외국기업의 투자유치를 적극 권장하고 있던 터여서 현지법인 설립을 마다할 이유가없었다.
이에 따라 IBM은 미국외 해외지역을 관장하던 IBM월드트레이드코퍼레이션을통해 67년1월 경제기획원에 외국인투자인가 및 기술도입계약 인가신청서를제출하고 같은해 3월 외자도입심의위원회의 의결을 거치게 된다. 출범 자본금은 95만2천 달러(4천7백25만원)였고 18개월 뒤에 1백40만 달러(7천20만원)를 추가 출자한다는 조건이 붙었다.
"주식회사 아이.비.엠.코리아"(약칭 한국IBM)출범에 앞서 IBM은 50년대 말부터 주한 미8군 영내에 한국인 직원을 상주시켜 시스템 교육 및 유지보수를담당해오고 있었다. 60년대 중반까지 미8군은 한국정부도 갖지 못한 컴퓨터를 대구컴퓨터센터에 2대(IBM 7010와 IBM 1460), 부평보급창에 1대(IBM 1460), 용산사령부에 1대(IBM 1130) 등 4대를 보유하고 있었다.
이후 IBM이 서울에 연락사무실 겸 영업사무실 역할을 하는 비법인 형태의지사를 두게 된 것은 60년 초반이었다. 경제기획원이 1961년3월 국세조사 간이센서스와 농업센서스 처리 등을 위해 IBM으로부터 1백30대의 천공카드시스템(PCS)을 AID차관으로 들여왔기 때문이다.
IBM한국지사는 바로 미본사의 지시를 받아 경제기획원 조사통계국 직원들을일본IBM에 파견, PCS 위탁교육을 비롯한 유지보수를 담당하게 된다. 또 미8군의 컴퓨터 유지보수와 간헐적이긴 하지만 PCS를 납품하는 등 영업활동도수행했다. 한국지사에 근무하는 요원들은 IBM이 직접 채용한 사람들이었다.
이 당시 조사통계국 직원으로서 IBM한국지사에 의해 일본에서 PCS교육을받고 훗날 우리나라 정보산업 개척자로 변신하게 된 이들이 이지상(현 한국소프트웨어써비스 대표).한필봉(대한통계협회 전문위원).김동희(전 동양시스템산업 대표) 등이다.
한국IBM은 67년 4월25일 반도호텔(현 롯데호텔 자리) 8백40호에서 정식 출범했다. 초대 사장은 미본사 직원으로서 한국IBM 설립과정에 직접 관여했던루이스 B스탠트였다. 창설 멤버로는 스탠트사장 외에 미8군 프로그래머 출신의이정희(여.90년 정년퇴임).김영수(70년 퇴임.미이민) 등과 미8군 PCS기술요원 손용호(한국IBM영업관리본부장 역임.90년 사직)를 비롯 오영전(재직중).
윤영훈(77년 사직).정우진(87년 사직) 등 IBM한국지사 소속 요원 6~7명이었다. 출범 사무실이 된 반도호텔 8백40호는 15평 남짓한 크기에 사무용 책상2개와 손님접대용 소파 하나가 고작이었던 것으로 전해지고 있다. ("한국아이비엠 25년 발자취")
한국IBM은 이후 같은해 6월 사무실을 서소문 삼령빌딩으로 옮기고 조완해(87년 사직.현 한국유니시스 사장).김성중(91년 사직.기흥정보시스템대표)등신입사원을 뽑아 창업 첫해 직원을 24명으로 늘렸다. 71년까지 한국IBM의직원은 현사장 오창규(68년 입사).전무 서치영.김형회(이상 69년 입사) 등이입사, 87명으로 증원됐으며 영업실적에서 독보적인 시장점유율 기록하게 된다.
우리나라 정부공식문서기록을 보면 67년 4월 "IBM 1401"의 도입을 시발로71년말까지 5년 동안 경제기획원과 락희그룹(현 LG그룹) 등 35개 기관 및 기업들이 36대의 컴퓨터를 도입한 것으로 돼 있다. 그 내역을 보면 IBM 13대, 스페리랜드(유니백) 8대, 후지쯔(화콤) 5대, CDC(CDC 및 사이버) 4대, NCR 3대, 버로우스 2대, 디지탈(PDP) 1대 순이다.
한편 한국IBM이 출범한 직후 우리 정부의 적극적인 외국기업 투자유치 방침에 따라 70년대 초까지 미컨트롤데이터(CDC).미플랜클럽("유니백"컴퓨터판매회사).미스페리랜드(현 유니시스로 합병) 등 컴퓨터 회사들이 직접 또는합작 형태로 한국에 법인을 설립했다. 또 일본후지쯔.미NCR(현 AT&T GIS).
미버로우스(현 유니시스로 합병) 등 세계적인 컴퓨터 회사들이 대리점 형태로 한국에 진출한다.
이 가운데 CDC는 IBM에 이어 두번째로 67년 9월 50만 달러를 투자하면서컨트롤데이터코리아(CDK)를 설립했다. CDK의 출범 목적은 컴퓨터 판매보다는전자공업진흥법과 외자도입법을 배경으로 하는 반도체공장 건설이었다. 당시CDK처럼 반도체공장을 건설하기 위해 진출한 회사들을 보면 페어차일드(66년5월).시그네틱스(66년 8월).모토롤러(67년4월)등이 있다.
CDK는 초기에 반도체 조립에 전념하다 69년 한국과학기술연구소(KIST)전자계산실에 대형기종 "CDC 3300"의 공급을 계기로 컴퓨터 판매에 본격 나섰다.
CDK의 초기 멤버는 CDC소속의 민병래(사장), 경제기획원 조사통계국의 이규설(현 한국전자사무기 대표)과 이지상, 미8군 소속의 이덕순(전 삼보소프트웨어사 장.현 한국OEC 대표) 등이었다.
68년 10월 미플랜클럽사와 동양물산이 8대2 비율로 투자, 설립된 한국유니백은 당시 IBM에 이어 시장점유율 2위를 달리던 스페리랜드(SPERY Land)의 "유니백(Univac)"시리즈를 국내에 직공급했다. 한국유니백 역시 IBM처럼 보건사회부 국립보건연구원에 "유니백1005" 공급을 계기로 출범했다. 창설 멤버는나중에 스페리랜드코리아의 사장을 지낸 해리화성김을 비롯 경제기획원 소속한용석과 이달호, 생산성본부의 육종국 등이었다.
한국유니백은 71년 3월 스페리랜드(나중에 스페리로 개칭)가 2백만 달러를출자해서 설립한 스페리랜드코리아(나중에 스페리주식회사로 개칭)에 직원대다수를 인계하고 판매전문회사에 탈바꿈했다.
IBM보다 더 긴 기업역사를 가지고 있는 NCR의 한국진출은 67년1월 동아무역과 대리점계약을 통해서였다. 동아무역은 이후 75년 11월 NCR의 국내 판매및 지원을 위해 동아컴퓨터를 출범시킨다.
우리나라 컴퓨터역사에서 60년대 후반부터 70년대 초반까지 이어지는 도입기는 이처럼 거인 IBM의 상륙을 필두로 기라성 같은 미국회사들의 진출 러시를통해 컴퓨터 활용에 대한 이해가 무르익어간다.
<서현진기자>
작성일자 : 1996.01.15
서현진 기자 E-MAIL:jsuh@www.etnews.co.kr
컴퓨터 파노라마 (5) 도입기 (4) 과기처 발족과 전자계산조직개발조정위 설치 차례로 돌아가기
60년대 주요 기관들이 외국에서 컴퓨터 도입을 서두르고 있을때 다른 한편에서는 우리의 힘으로 우리의 컴퓨터를 개발하자는 노력이 심심치 않게 시도됐다. 이런 노력은 락희그룹(현 LG그룹)이 사상 처음으로 트랜지스터 라디오를생산, 우리나라 전자공업을 일으킨 59년이후 불붙기 시작해 60년대말까지계속됐다. 그런 가운데 60년대초 한양공대 전자공학과 대학원교수로 재직중이던 이만영(현 한양대 명예교수)은 컴퓨터 국산화를 몸으로 실천했던 대표적인 과학자였다. 당시 30대초반이던 그는 우리나라 사람들에게는 믿기 힘든컴퓨터를 처음으로 직접 개발해낸 사람이었다.
이만영이 제작한 최초의 국산 컴퓨터에 대한 내용은 당시 한 신문에 "한국최초의 전자계산기 완성"이라는 제하의 머릿기사로 보도되고 있다. <"한양대학보"(현 한대신문) 64. 5.15>
이 신문에 따르면 이만영이 개발한 "전자관식 아날로그계산기"는 모두 3종으로서 소형인 제1호기(62년 8월)와 대형인 제2호기(63년3월)에 이어 이를개량한 제3호기(64년5월) 등이었으며 보도 내용은 3호기에 관한 것이었다. 3호기에 대해 신문보도는 정보처리보다는 공정제어나 물리량 계측 등에 사용되는 아날로그 방식으로서 "연립대수식, 고계의 선형 및 비선형 미분 방정식, 편미분 방정식의 해답을 자동으로 계산할 수 있어 어떤 물체의 움직이는 진동상태를 재는 것으로부터 자동제어계, 항공역학계, 통신계, 음향계 등 다방면에 걸쳐 그 활용이 기대된다"고 설명하고 있다.
미콜로라도대에서 공학박사학위를 받고 60년 귀국했던 이만영이 한양대 대학원에서 교수로 재직중 이 컴퓨터를 제작, 완성하기까지는 온갖 어려움이있었다. 그는 당시 한 신문과의 인터뷰에서 다음과 같이 이 계산기의 완성과정에 대해 말하고 있다.
"컴퓨터를 제작하는 동안 가장 큰 애로사항은 각종 부속품을 입수하는 일이었다. 국내에서 생산할 수 없는 부속품을 구하기 위해 고물상들을 모조리뒤져야만 했다. …<중략> 이런 고난에도 불구하고 제작에 착수했던 것은 나의전공인 제어공학 부문을 활용해보고 대학원생 강의에서 실습하기 위해서였다."<"전업건설신문" 64. 6. 1>
이만영의 "전자관식 아날로그 계산기"는 그러나 연구용이나 강의 실습기자재외의 상업용도로는 거의 사용되지 못했다. 뒤이어 불어닥친 IBM.스페리 등상업용 디지털컴퓨터 바람에 밀려 그의 컴퓨터는 한양대학교 박물관행 신세를 지고 말았다. 당시 우리나라는 이 컴퓨터를 활용할 수 있는 항공기라든가레이더, 유도탄 등 정밀계산이 요구되는 무기체제를 제작할 수 없는 상황이었다. 바꿔말해 이같은 무기들을 생산하지 못했던 까닭에 "전자관식 아날로그 계산기"는 무용지물에 지나지 않았다는 것이다.
이만영의 컴퓨터가 빛을 발휘할 수 없었던 가장 큰 이유는 정부차원에서이같은 노력을 평가해 줄 수 있는 제도적 시스템을 갖추지 못했기 때문이었다. 당시 우리나라에서는 컴퓨터는 커녕 과학기술전반에 관한 정부차원의 정책이나 계획은 전무한 상태였다. 산업 연관효과를 따져 과학기술발전을 진흥시킬 수 있는 정책 시스템이 있었다면 이만영과 같은 젊고 유능한 과학자들을절망케 하지는 않았을 것이란 지적이다.(그는 이후 미버지니아주립대교수로한국을 떠난다)
그러나 다행스러웠던 것은 경제개발 1차 5개년 계획(62~66년)의 경험을 토대로 우리정부는 이만영과 같은 젊은 학자들의 과학기술 개발의지를 북돋우게하는 한편, 경제부흥의 요체로서 과학기술정책을 정부차원에서 추진해야된다는 목소리를 조심스럽게 경청하기 시작했다는 사실이다.
우리정부가 발표한 첫 과학기술정책은 66년 경제기획원이 마련한 과학기술진흥 5개년 계획이었다. 정부는 또 같은 해 한국과학기술연구소(KIST.현 과학기술연구원)의 창설과 한국과학기술단체 총연합회의 결성 등을 유도하면서과학기술발전과 진흥에 대한 정책을 본격적으로 입안하고 시행에 나서기 시작했다. 또 국립과학관 마련을 위한 한미협의회와 같은 단체들을 잇따라 출범시켰다. 사실 과학기술진흥을 통한 경제개발계획 개념이 처음으로 적용된것도 이 시기라 할 수 있다.
이때 마련된 과학기술진흥 5개년 계획은 이듬해 67년 1월 법률 제1864호로제정된 과학기술진흥법의 모태가 됐다. 특히 이 진흥법 10조2항에는 과학기술처장관이 수립해야할 시책과 계획 가운데 "전자계산기조직(컴퓨터)의 도입과 이용기술의 개발 및 정보처리요원의 양성에 관한 사항"등을 규정해 놓고있음을 볼 수 있다. 정부차원으로서는 최초로 컴퓨터에 대한 정책의지를 표명해 놓은 대목이라 할 수 있다.
66년에서 67년사이 경제기획원이 주도했던 일련의 과학기술정책 의지 표명은사실 "한송이 국화 꽃"에 비유되고 있는 과학기술처의 발족을 위한 것이었다. 정부는 65년 5월 박정희대통령의 미국방문시 존슨대통령과 한미양국 정부의 지원아래 KIST를 설립키로 합의할때부터 과학기술처의 발족을 계획해왔었다.
과학기술처는 마침내 67년 4월21일 김기형을 초대 장관으로 임명하면서 정식 발족 했다. 우리나라 과학기술정책을 정부차원에시 독자적으로 입안하고 시행하기 위한 최초의 정부조직이었다. 과학기술처는 특히 과학기술진흥법을 토대로 컴퓨터의 도입과 개발을 본격 추진해 나감으로써 오늘날 컴퓨터가 우리나라 과학기술 정책의 핵심으로 자리잡는 계기를 마련해 줬다.
과학기술처 발족후 1개월후인 67년 5월23일 김기형장관은 취임후 첫 기자회견에서 역사적인 "전자계산기 사용 개발 7개년 계획"이라는 것을 발표했다.
골자는 컴퓨터요원양성과 훈련, 소프트웨어의 수출, 컴퓨터에 대한 국민계몽, 컴퓨터의 활용시기, 법적지원, 이를 추진할 위원회의 설치 등이었다. 김장관은 이미 세계 곳곳에 이미 5만여대(당시)의 컴퓨터가 보급돼 사용되는 상황에 비추어 우리나라에서도 하루 빨리 컴퓨터의 도입과 개발을 촉진시키고자이들 세부방침을 토대로 7개년 계획을 마련했던 것이다.
당시 기관이나 기업의 경우 컴퓨터 도입은 그 자금소요가 차관일 경우 과학기술처장관의 검토가 따랐다. 또 정부보유외환(KFX)자금으로 도입할 경우는주무부처 장관의 추천승인이 있어야만 허용되었다.
이를테면 컴퓨터도입 승인업무를 일관되게 처리할 수 있는 법적근거가 없었던 셈이었다. 또 국가적 차원에서 도입의 경제성 여부가 규명되지 않았거나구체적 운용계획이 마련되지 않은채 컴퓨터를 들여 놓을 경우 막대한 외화낭비가 우려되는 상황이었다.
뿐만아니라 기관별 또는 기업별로 무분별하게 컴퓨터를 도입할 경우 컴퓨터요원 및 적용 업무량 부족에 따른 가동률의 저하가 우려되기도 했다. 컴퓨터가동률의 저하는 도입기관끼리 외부 용역수탁경쟁을 유발시킬 가능성을 안고있었으며 이렇게 되면 당시 정부가 육성을 적극 추진하고 있었던 용역전문회사들의 위축을 초래할 것이었다. 용역전문회사는 곧 소프트웨어 수출의 첨병이기도 했다.
이같은 상황에서 컴퓨터도입을 통제하고 소프트웨어용역 등 컴퓨터개발을적극 육성하기 위해 과학기술처는 "전자계산기 사용 개발 7개년 계획"에 따라67년9월 27일 전자계산조직(컴퓨터)개발 조정위원회를 설치, 공포했다.
이 위원회는 과기처차관을 위원장으로 각계에서 추천한 16명의 위원으로구성됐다. 국가정책과 기업분야의 경영개선 및 업무과학화와 생산성향상을위한 컴퓨터의 종합 개발 활용계획 수립.사전 도입검토.개발비의 조성과 배분.시설.교육훈련 및 보급 등 전반에 걸쳐 행정적 지원 및 통제가 주요 업무였다. 국책적으로 이루어진 최초의 컴퓨터산업육성 계획의 시발점이었던 셈이다.
컴퓨터의 도입검토나 개발 등 전자계산조직개발조정위원회의 결정에 따른실무조정은 초기에는 과학기술처 진흥국이 맡았다. 그러나 컴퓨터관련 정책업무가 점차 확대되면서 과학기술처는 71년 컴퓨터산업을 제도적으로 뒷받침하기 위한 조직으로 정보관리실을 설치하고 컴퓨터도입 승인업무 등을 주관하게 했다. 정보관리실은 75년 정보산업국으로 확대 개편된다.
과학기술처가 발족되고 나서야 비로소 우리나라 컴퓨터산업은 대망의 70년대를 향한 웅지의 나래를 펴기 시작했다.
초창기 우리나라 컴퓨터에 대한 모든 것을 책임지고 있던 과학기술처의 최대당면과제는 컴퓨터를 이해하고 이를 업무에 적용할 수 있도록 해주는 교육기회의 확대였다. 60년대말까지 과학기술처가 가장 우선적인 교육대상으로삼은 곳은 정부 각 기관 공무원들이었다. 공무원들이 먼저 컴퓨터를 이해하고사용할 줄 알아야 기관 및 기업의 컴퓨터도입 및 활용이 활성화된다는 당시의 시대적 정서를 그대로 반영하는 것이었다.
과학기술처는 이에 따라 발족 이듬해인 68년 4월부터 각급 공무원들을 대상으로 기초과정, 고급과정, 특수과정 등으로 구성된 4주간의 EDPS요원 관리자과정 교육에 나섰다. 당시 재단법인 형태의 한국전자계산소(현 한국전자계산주식회사)가 맡아 실시한 이 관리자과정 위탁교육은 5월 13일 1차로 33명의수료생들을 배출하였고 71년 과학기술처 산하 중앙전자계산소(현 총무처정부전자계산소)로 그 교육이 이관되기까지 1백65명의 초창기 EDPS관리자요원을 양성해냈다.
주요 교육내용은 EDPS(전자식 데이터처리 시스템)의 개념, 프로그래밍의기본원리 및 실습, 포트란의 개념 등이었다. 관리자과정 교육이 성공적인 결실을 맺자 곧이어 16주 단위의 전문과정이 개설됐고 이는 공무원들 사이에어셈블러, 코볼, 포트란 등 본격적인 프로그래밍 교육선풍이 이는 계기가 됐다. 이때 한국전자계산소에서 공무원 위탁교육을 담당했던 사람들은 이주용(현한국전자계산 회장), 송길영(현 고려대교수), 황칠봉(현 효성데이타시스템 사장), 이성길(현 협진정보통신 대표), 정명진(전CDK 상무) 등이었다.
<서현진기자>
작성일자 : 1996.01.22
서현진 기자 E-MAIL:jsuh@www.etnews.co.kr
컴퓨터 파노라마 (6) 적응기 (1) 한글프린터 개발과 OCR 도입 차례로 돌아가기
외국에서 컴퓨터를 도입해 오는 것이 급선무였던 60년대를 지나온 우리나라컴퓨터 산업은 70년대에 들어서면서 본격적인 적응기를 맞게 된다. 70년대를연 것이 바로 컴퓨터로 한글을 출력할 수 있는 라인프린터의 개발과 대량의데이터처리가 가능한 OCR/OMR(Optical Charcter/Mark Reader:광학카드판독기)의 활용이었다.
이 가운데 70년말과 71년초를 전후해 한국과학기술연구소(KIST)와 한국IBM등의 한글 라인프린터의 개발은 컴퓨터 활용의 토착화를 알리는 최초의 사건이었다. 이어 71년 체신부와 문교부가 각각 전신전화요금 및 대학예비고사채점 전산화용으로 OCR을 도입한 것은 컴퓨터 활용면에서 대량의 데이터처리와업무의 신속성.정확성.경제성 등을 함께 고려할 수 있는 계기를 제공해 주는서곡이었다.
지금은 별로 쓰이지 않는 라인프린터는 한 글자씩 인쇄하는 도트매트릭스프린터와 달리 행(line)단위로 문서를 인쇄할 수 있어 대량의 정보를 고속으로출력할 수 있는 장점을 가지고 있었다.
한글 라인프린터의 개발은 원래 한국IBM이 68년 처음 착수했다. 그러나 완성은 이보다 1년 늦게 개발에 착수했던 KIST 전자계산실이 먼저 했다. KIST전자계산실은 70년 11월, 한국IBM은 71년 3월 각각 독자적인 한글라인프린터개발을 완료한 것이다.
한글 라인프린터가 개발되면서 비로소 우리나라는 컴퓨터 상에서 한글을처리, 이를 곧바로 프린터로 인쇄할 수 있는 시대를 열었다. 당시까지 우리나라의 컴퓨터 도입기관들은 컴퓨터에서 처리된 문서를 영문 상태로 출력한다음 이를 한글로 번역, 인쇄소에서 재편집하는 이중작업을 벌여야 했다. 한글라인프린터의 개발요구는 70년대 들어 각 기관이나 기업의 OCR도입, 즉 데이터의 대량처리 시스템 도입이 예상되면서 필연적으로 제기됐다. KIST가 발표한 한글 라인프린터는 1분당 4만8백자(136컬럼×3백행)를 인쇄할수 있는고속제품이었다. 개발작업은 KIST전자계산실과 미국 컨트롤데이터사(CDC)에근무하는 한미양국 엔지니어들의 공동 프로젝트로 진행됐다. CDC엔지니어들이 한글 라인프린터 개발에 참여한 것은 당시 KIST전자계산실에 설치돼 있던컴퓨터 기종이 CDC의 "CDC 3300"(69년 도입)이었기 때문이었다.
한글의 인쇄는 글자들이 연속적으로 찍혀 나오는 영문알파벳 처리와 달리컴퓨터상에서 자음과 모음을 초성.중성.종성 형태로 구분해 조합해줘야 하는복잡한 처리과정을 거쳐야 한다.
KIST전산실 성기수실장이 직접 수행한 작업은 한글의 자모 형태를 배열에따라 11종으로 나누고 이를 컴퓨터가 처리하도록 프로그램을 짜는 일이었다.
이 프로그램의 특성은 2벌식 표준자판에서 예를들어 "Aa A"처럼 풀어쓰기 형태로 글자를 입력하면 "한"과 같이 모아쓰기 형태로 찍혀 나온다는 점이었다.
따라서 프린터에서 별도의 제어장치를 새로 개발할 필요가 없었다. 당시 KIST전자계산실팀은 CDC에서 개발한 영문라인프린터에서 영문 체인을 한글 체인으로 바꾸는 것만으로 이를 해결할 수 있었다. KIST측은 이 한글 라인프린터 개발에 모두 2백만원의 자금을 소요했다.
4개월 뒤인 71년 3월 한국IBM도 서독IBM 및 스웨덴IBM 등 3개국 현지법인의공동프로젝트로 IBM 컴퓨터용 한글 라인프린터를 개발해 냈다. 당시 한국IBM 전자계산실장 김성중(현 기흥정보시스템 대표)의 주도로 개발된 이 프린터는 2벌식의 KIST 것과 달리 4벌식이었으며 인쇄속도도 1분당 2만6천9백여자로 훨씬 느렸다.
아무튼 한글 라인프린터의 개발로 인해 굵직굵직한 정부 전산프로젝트의발주가 꼬리에 꼬리를 물고 이어졌다. KIST가 CDC와 함께 한글 라인프린터의개발을 성공으로 이끈 직후 착수한 사업이 바로 71년 체신부의 서울시내 전신전화요금 업무 전산화와 문교부의 대학예비고사 채점 전산화였다. 사실 이두가지 업무의 전산화는 한글 라인프린터가 개발됐기 때문에 가능한 것이었다.
체신부는 70년 6월 1백50만원의 예산을 들여 체신부내 EDPS(전자식 데이터처리 시스템)기본계획을 수립한 데 이어 71년 9월까지 서울시내의 전신전화요금을 EDPS화했다. 전신전화요금의 EDPS화는 구체적으로 서울시내에서만 매일수만매씩 쏟아지는 시외 및 국제전신전화발신증 처리를 전산화하는 것이었다.
이때 체신부는 이 프로젝트를 수행한 KIST전산실 측의 자문을 받아들여 내외의 강력한 반대를 무릅쓰고 많은 비용을 지불하고 전신전화발신증 처리용OCR시스템 "CDC OCR 936"를 도입했다.
시외 및 국제 전신전화 발신증은 내용상으로는 별게 아니어서 입력자료를읽어 그대로 자기테이프에 수록하는 것이 고작이었다. 그러나 매일 수만매씩쌓이는 것을 PCS(천공카드시스템)로 처리하는 것은 보통 고역이 아니었다. KIST측은 매일 1천3백대 분의 PCS로 처리해야 할 시외 및 국제 전신전화발신증을 OCR로 처리케 함으로써 오늘날 전화 대량보급시대의 견인차 역할을 담당해 줬다.
전신전화요금 전산화는 KIST전산실이 주도를 했고 CDC 등의 기술지원이 따랐다. 이때 체신부에서는 박종현(현 한국통신기술 상임감사).이영남(현 농수산물 도매시장관리공사 사장) 등이 실무책임자로 나섰고 KIST측에서는 김우영(현 하이퍼테크 대표).권순덕(현 한맥소프트웨어 대표).황대규(도미).유락균(작고) 등이, CDC에서는 이지상(현 한국소프트웨어써비스 대표) 등이 참여했다.
전신전화요금 전산화 추진은 당시로서 자금소요가 많고 성공 가능성도 많지않아 체신부로서는 대단한 모험일 수밖에 없었다. 그러나 이 사업이 훗날체신부가 우리나라 컴퓨터산업 정책의 주도권을 잡는 계기를 마련해줄 줄은아무도 몰랐다.
체신부는 서울시내 전신전화요금 전산화의 성공을 계기로 박종현 등을 주축으로 74년 체신부 전자계산소를 발족시키고 미스페리사로부터 대형컴퓨터"유니백1106"를 도입하면서 가입자 전신전화요금 전산화 등을 진행시켜 나간다.
70년대초 치렀던 또하나의 역사적 사건이 바로 71년의 대학예비고사 채점전산화였다. 이 프로젝트 역시 KIST전산실이 맡아 했으며 그 주역들은 안문석(현 고려대교수).김봉일(현 한국통신 소프트웨어연구소장).신동필(전시스템공학센터소장).최영화 (현 KIST부설 정보기술교육센터) 등이었다. 문교부측에서는 최지훈(현 서울대 교수) 등이 참여했다.
71년의 채점전산화는 69년 대학입학 예비고사가 처음 실시되고 난 뒤 2년만의 일이었다. 69년 첫 해는 수작업으로 처리했고 채점결과를 통해 합격자를가리는 정도의 작업에 컴퓨터가 이용됐다.
70년에는 한글 라인프린터 개발 및 OCR 등 관련장비의 도입 전이어서 개인시험지에 직접 채점을 하고 이것을 개인별 종합성적표에 옮겨 적는 일까지가수작업으로 처리됐다. 그런 다음 전체 수험생에 대한 채점집계와 석차부여및 합격자 결정 등은 PCS를 이용해서 IBM 80컬럼 카드에 옮겨 처리하는 수준이었다. 이러한 처리 과정에서 실수와 오차를 없애기 위해 반드시 2회씩 검토과정을 거쳐야 했다. 그래도 이 작업은 나은 편이었다. 69년 첫 해는 채점이후의 모든 통계 작업은 주산 5단 이상의 상업학교 학생 30여명이 20여일합숙하며 했었기 때문이었다.
그런데 71년부터는 채점에서부터 합격자를 가리고, 각종 통계를 내는 모든과정이 전산화된 것이다. 포트란 언어로 짜여진 응용프로그램과 OCR의 덕택이었다. 당시 이 프로젝트에 참여했던 최영화는 "예비고사 채점 전산화는 너무 힘든 프로젝트여서 연구원들 사이에서 기피대상 1호였다"고 술회하고 있다. 답안지 입력에서 채점.사정에 이르기까지 단 한건의 실수가 용납되지 않는 완벽한 결과를 요구하는 작업이었기 때문이었다.
대학입학 예비고사 채점전산화는 교육행정분야에 대한 컴퓨터 이용이 뗄래야뗄 수 없는 불가분의 관계임을 다시 한번 확인시켜 줬다. 사실 교육행정분야에 컴퓨터가 처음으로 도입된 것은 예비고사 채점전산화보다 1년여 앞서있었던 서울시의 70년도 중학교 무시험 추첨이었다. 예비고사 채점에 비하면극히 간단한 작업이었지만 이것은 컴퓨터를 일반인들 사이에 70년대의 "스타"로 부상시켜주는 결정적 계기가 됐다.
수동식 은행알 추첨기를 학생들이 직접 돌리는 것에 대한 불편과 잡음을없애기 위해 컴퓨터를 이용하자는 의견은 68년부터 나왔었다. 69년 8월 서울시교육위원회가 실시한 설문조사에 따르면 학부형 78%가 70년도 입학생부터당장 컴퓨터 추첨방식을 도입하자고 답한 것으로 나타났다.
이에 따라 서울시 교육위원회는 70년 2월3일 이 프로젝트를 맡았던 당시대한전자공업주식회사의 서울 구로동 소재 전자계산실에서 오경인 교육감이참석한 가운데 남학생 5만5천여명, 여학생 4만3천여명에 대한 컴퓨터 중학교무시험추첨에 들어갔다.
이날 행사의 하이라이트는 컴퓨터가 학생들에게 학교배정에 필요한 난수기호를 지정해 주는 일이었다. 이 난수기호는 해당 학생의 출신 국민학교.학년.반.번호.남여성별 등 5개의 조건을 입력해서 무작위로 뽑아낸 것이었다.
이날 치러진 컴퓨터 추첨은 이틀 뒤 2월5일 오교육감이 경기여고 강당에서중학교별 기호를 발표함으로써 막을 내렸다.
원래 중학교 무시험추첨은 이주용(현 한국전자계산주식회사 회장)이 소장으로 있던 한국전자계산소(현 한국전자계산주식회사)가 제안했던 것으로 당시이주용은 난수기호 지정을 위해 학생의 통학거리.버스노선.IQ분포.성적.신체조건 등의 조건을 입력할 것을 건의했으나 너무 복잡하고 비용이 많이 든다는 이유로 문교부 측에 의해 거절당했다.
중학교 무시험 추첨에 이어 예비고사 채점 및 전신전화요금 전산화는 우리나라 컴퓨터 역사에서 70년대의 창을 활짝 열어주는 시발점이 됐을 뿐 아니라이후 본격화된 보사부.철도청.국방부.농림수산부.법무무 등 정부 부처의행정전산화의 전형이 됐다. 아울러 금융권 및 일반기업의 전산화에도 모범적기틀을 제공해 줬음은 두말할 나위가 없다.
<서현진기자>
작성일자 : 1996.01.29
서현진 기자 E-MAIL:jsuh@www.etnews.co.kr
컴퓨터 파노라마 (7) 적응기 (2) 경제기획원 예산업무와 최초의 데이터통신 차례로 돌아가기
컴퓨터 도입이 시작된 60년대 말이 컴퓨터에 대한 경외심을 자아내게 한시대였다면 70년대 초는 컴퓨터 활용에 대한 환상을 불러일으킨 시대가 된다. 그 촉매는 데이터통신이었다. 데이터통신은 21세기가 불과 몇 년 앞으로 다가선 오늘날 매우 복잡다양한네트워크 구조로 고도화 되면서 컴퓨터환경에서 없어서는 안될 요소가 됐다. 정보고속도로의 건설과 인터네트의 확산붐이 그렇다. 무궁화호 같은 상업용위성의 발사가 사람들에게 초미의 관심사가 되는 것도 데이터통신의 중요성을 입증하는 한 사례라 할 수 있다.
바로 이같은 현상을 미리 예견이나 한 듯 우리나라에서도 70년대 초부터전문가들 사이에서는 데이터통신의 중요성이 부각되고 있었다. 우리나라에서 처음으로 컴퓨터의 데이터통신이 이루어진 것은 지금으로부터25년전이다. 70년 6월 경제기획원 예산국(현 재정경제원 예산실)과 한국과학기술연구소 (KIST, 현 한국과학기술연구원)전자계산실 간의 통신이 바로그효시이다.
국내 최대 용량이었던 KIST전산실(홍릉소재)의 대형컴퓨터 "CDC 3300"과경제기획원 예산국(광화문소재)의 배치터미널(Batch Terminal) "CDC 200 UT"가 체신부(현 정보통신부)의 전용선과 모뎀 장비에 의해 접속됐던 것이다.
사실 70년대 초반까지도 우리나라의 컴퓨터 작동 공간과 컴퓨팅 파워의 공유는 극도로 제한된 장소, 즉 전산실 안에서만 가능했다. 프로그램을 입력해서처리한 결과를 터미널을 통해 받아볼 수 있는 장소는 대형컴퓨터(호스트)가함께 설치돼 있는 전산실내부 뿐이었다는 얘기다.
이런 상황에서 호스트의 정보를 지역적으로 다른 곳의 터미널에서 받아볼수있게 된 것은 그 자체만으로도 엄청난 뉴스가 아닐 수 없었다. 즉 네트워크를 통해 원격지의 컴퓨터를 공유하는 시대를 알리는 서곡이었던 셈이다.
이때 KIST전산실은 경제기획원으로부터 국가 예산업무의 전산화(당시 용어로EDPS)요청을 의뢰받은 상황이었다. 최초의 정부기관 용역이기도 했던 이프로젝트는 KIST전산실 연구원 안문석(현 고려대교수)의 "예산업무의 EDPS화에관한 연구"결과를 토대로 진행됐다.
주요 내용은 기획원이 KIST전산실의 컴퓨팅 파워를 공유함으로써 예산사정시예산당국이 필요로 하는 정책자료의 온라인 출력, 국회예결을 거친 예산의집행과 결산 등을 자동으로 처리할 수 있는 프로그램의 개발이었다. 터미널설치는 이 프로젝트를 진행시키는 핵심사업단계 가운데 하나였다. "CDC 200UT"터미널은 KIST의 예산업무 EDPS 결과를 예산국이 온라인으로 받아볼 수있도록 해 주는 도구였다.
이때 예산업무 EDPS주역들은 KIST전산실 측에서 성기수(현 동명정보대 총장)와 안문석, 경제기획원 측에서는 예산총괄과장 강경식(현 신한국당 의원)등이었다. 이 가운데 특히 컴퓨터 비전문가였던 강경식의 역할이 컸던 것으로 전해지고 있다.
미시라큐스대 행정학석사였던 강경식은 69년 예산총괄과장이 되면서부터김학열부총리 겸 기획원장관(작고)에게 예산업무 전산화를 강력하게 건의하기시작했고 마침내 김부총리는 70년 4월 7일 경제동향 브리핑을 통해 박정희대통령에게 예산업무 전산화계획을 정식 보고하게 된다.
이때 브리핑을 위해 KIST 관계자들을 빈번하게 면담했던 김학열부총리가경제장관 회의때마다 "장관들, 컴퓨터공부 좀 하세요!"라고 한 말은 지금도관료들 사이에서 회자되고 있는 에피소드이다. 김부총리의 이같은 지시(?)때문에 경제장관들이 70년과 71년 사이에 홍릉을 자주 찾게 됐고 이때마다 KIST 전체가 장관행차에 대응하느라 분주했던 장면들이 당시 사진자료들을 통해 보여지고 있다.
기획원 예산국에 설치된 "CDC 200 UT" 배치터미널은 분당 3백장를 읽을수있는 카드판독기(card reader), 분당 3백줄(line)을 인쇄할 수 있는 라인프린터, 운영자(operator)용 디스플레이 콘솔(console) 등으로 구성돼 있으나호스트처럼 자체처리능력은 없는 더미(dummy)방식이었다. 여기에 미 릭슨(Ri.on)사로부터 수입해온 전송속도 3백bps급의 모뎀 "릭슨 PM 24A"가 통신장비로 사용됐다.
터미널과 모뎀의 설치에 앞서 KIST전산실은 IBM에 데이터통신 환경 및 타당성조사를 의뢰했는데 체신부의 전용선 상태가 불량, 통신이 불가능할 것이란조사결과가 나왔다. 하지만 강경식은 이 결과를 무시했다. 오히려 KIST측의작업강행을 독려, 국내 첫 데이터통신 개통의 주역이 됐던 것이다.
터미널 개통식이 있은 70년 6월21일 강경식은 터미널이 무병장수하고 만사형통(?)하라고 그 앞에서 돼지머리를 준비하고 고사를 지냈는데 다음날 한신문에서는 "최첨단 만능 콤퓨터 앞에서 고사를 지냈다"며 비아냥거리는 가십기사가 등장하기도 했다. 기획원 예산국의 터미널과 모뎀 설치가 사회적으로얼마나 큰 관심을 보였는가를 역으로 짐작해 볼 수 있는 대목이다. "CDC200 UT"와 "릭슨 PM 24A" 콤비는 이어서 국내 처음으로 "주판알 없는상업학교 교육"을 표방한 덕수상고(71년12월)를 비롯 중앙관상대(70년 11월, 현 기상청), 농림부 양정국(70년12월), 전매청(71년10월, 현 담배인삼공사) 등에도 도입 설치돼 KIST 전산실과 연결, 초창기 우리나라 데이터통신시대를 주도해 나갔다.
한편 예산국에 도입된 "릭슨 PM 24A"는 국내 최초로 도입된 데이터통신용모뎀으로 기록되고 있다. "릭슨 PM 24A"에 대한 관심은 특히 훗날 KIST전산실 내에 데이터통신그룹이 조직되는 계기를 마련해 줬고 최초의 국산 모뎀시제품 개발의 초석이 됐다.
73년 봄에 조직된 KIST전산실의 데이터통신그룹은 원격지에서 온라인터미널을 접속해서 대용량 호스트컴퓨터 서비스를 전국적으로 확대시키겠다는 야심찬 계획을 세워놓고 있었다. 당시 KIST전산실 호스트는 초대형 컴퓨터 "사이버(Cyber)72"기종으로 바뀌어 있었고 김동규(현 아주대 교수).정진욱(현포항공대 교수).한기영(현 재미실업가) 등이 초창기 멤버로 참여했다. 이 가운데 김동규는 국내 최초의 데이터통신분야 박사학위(미캔자스주립대) 소지자였다.
이어서 후배그룹으로 박희원.남석우 등이 가세하게 되면서 74년 3백bps급의국산 모뎀 시제품을 완성하게 된다. 이 모뎀 시제품 경험이 바로 오늘날국산 데이터통신장비업계 쌍두마차인 콤텍시스템과 데이타콤을 잉태시키는결과를 가져오기도 했다.
그러나 사실 데이터통신그룹이 주력했던 분야는 모뎀 시제품의 제작보다는터미널 보급이었다. 이에 따라 이기식(현 대우증권 부사장).김동규.정진욱.
박찬성(현 시스템공학센터 통신운영실장) 등이 중심이 된 별도의 터미널팀이만들어 지게 된다.
데이터통신의 핵심장비인 터미널은 크게 배치터미널과 대화형(Interactive)터미널로 구분돼 있었다. 배치터미널은 앞서 설명했던 "CDC 200 UT"와 같은구성을 하고 있고 경제기획원 등 작업량이 많은 기관에 주로 설치가 됐다.
반면 작업량은 많지 않지만 업무처리가 대화형일 경우 텔레타이프(Tele Type)와 CRT디스플레이로 구성되는 대화형 터미널이 사용됐다. 94년 KIST전산실의 "사이버72"와 전남 송정리의 삼양타이어공장의 4백km 사이에 설치된 최초의 장거리 데이터통신도 "M 38"라는 대화형 텔레타이프 터미널에 의해서였다. 삼양타이어의 터미널 설치는 초장거리(?)였던데다 국내처음으로 4천8백bps 속도를 실현했다는 점에서 KIST전산실과 기획원 예산국간 터미널 설치 이상의 역사적 의의를 갖고 있다.
이때 정부 부처 중에서는 유일하게 과학기술처 내 장관실 옆에 이 텔레타이프 한대가 설치돼 있었는데 이 터미널에 대한 에피소드는 오늘날 듣는 이로하여금 실소를 자아내게 해주고 있다. 어느 해인가 과기처 연두순시를 나선박정희대통령은 이 터미널을 보며 "우리나라에 소와 닭이 몇 마리나 되는가"라고 물었고 이 터미널은 즉석에서 끝자릿수까지 자세하게 답하는 위력(?)을 보였다고 한다.
하지만 이와는 달리 대다수의 텔레타이프 터미널 또는 배치터미널들은 각종장애로 고장을 일으키는 일이 잦아 관계자들을 골탕먹이는 일이 많았다.
특히 각종 행사 때 운영자들이 터미널의 위력을 과시하기 위해 참석한 기관장또는 사장의 얼굴이나 "축 환영"과 같은 글자를 코딩해 라인프린터를 통해찍어내곤 했는데 하필 그때마다 고장을 일으켜 보는 이들을 민망케 하는 일도 더러 있었다.
당시 터미널의 장애는 회선불량과 함께 전화국 직원들의 데이터통신이나모뎀에 대한 이해부족이 가장 큰 이유였다. 예컨대 통신회선의 점검 같은 작업들이 음성통신에만 의지하여 치러지는 상황이었다는 것이다.
사실 70년대 초가 사람들에게 컴퓨터 활용에 대한 환상을 불러 일으켜 준시대가 된 것은 바로 이같은 장애요인이 더 많았기 때문이었을 것이다. 만약컴퓨터가 모든 일을 장애없이 척척 처리해 줬다면 사람들은 컴퓨터에 대한환상은 그만큼 줄어들었을 터이다. 환상은 그것이 불가능하게 보일수록 강렬해지기 때문이다. 그런 점에서 70년대의 한때를 풍미했던 컴퓨터 앞에서의돼지머리 고사는 모든 장애귀신(?)들을 쫓고자 하는 가장 합리적인 축원의방법이었을런지도 모를 일이다.
<서현진기자>
작성일자 : 1996.02.05
서현진 기자 E-MAIL:jsuh@www.etnews.co.kr
컴퓨터 파노라마 (8) 적응기 (3) 대학의 컴퓨터 도입과 정보과학회 탄생 차례로 돌아가기
우리나라 대학 가운데 처음으로 컴퓨터를 도입한 곳은 69년1월 서강대였다.
서강대는 미스페리랜드(현 유니시스)가 제작한 "유니백 솔리드스테이트(SS) 80"기종을 당시 자매결연을 맺고 있었던 미미네소타 주립대학으로부터기증받았다.
도입에 앞서 서강대는 경제학박사 김만제(현 포항제철회장)와 물리학박사박병소(현 서강대교수) 등 소장파 교수들을 주축으로 68년11월 국내 처음으로대학부설 전자계산소를 설립하는 등 만만의 준비를 갖췄다. 서강대의 컴퓨터도입 과정이나 부설 전자계산소를 설립하고 운영하는 방식 등은 훗날 다른대학들의 귀감이 됐음은 물론이다.
연세대도 같은 해 10월 당시 박대선총장의 주선으로 미유나이트 포드재단으로부터 또다른 "유니백 SS 80"기종을 기증 받았다. 하지만 이들 "유니백SS 80"는 컴퓨터 세대 구분상 트랜지스터를 사용하는 2세대 기종으로서 모두중고품이었다. 조작할 전문요원도 부족했던 데다 고장까지 잦아 작동시간보다는 멈춰 있는 시간이 훨씬 많았던 용도 폐기직전의 낡은 기계였던 것이다. 오죽했으면 스페리랜드의 국내 판매회사였던 한국유니백 관계자들까지도"고물기계"로 낙인찍었을 정도였다. "유니백 SS 80"는 그러나 당시 다른 대학들이 본격적으로 컴퓨터를 도입하게 되는 계기가 됐다.
서강대가 유니백SS 80"를 도입한 직후 69년 5월 한양대가 3차 대일청구자금으로 일본 후지쯔로부터 "파콤230 10"을 들여왔고 해를 넘기기 직전인 12월말에는 숭실대가 IBM의 "IBM 1130"를 도입했다.
70년 5월에는 서울대가 전자계산소 발족과 함께 문교부 예산으로 IBM의 "IBM 1130"를 도입했다. 이어서 71년 10월과 72년 4월에 중앙대와 동국대가각각 같은 "IBM 1130"기종을 도입했다.
이밖에 70년대 초반 다른 곳보다 앞서 컴퓨터를 도입한 대학들로는 73년2월의 광운공대("IBM 230/15"), 74년9월의 홍익대("CDC 3200") 등을 빼놓을수없다. 이들 대학의 컴퓨터관련 학과들이 지금까지도 대학 입시생들로부터인기가 있는 것은 바로 이같은 사실들과 무관치 않다.
70년을 전후하여 대학들이 컴퓨터 도입을 서두른 것은 컴퓨터에 눈 떠가는사회 전반에 뒤지지 않기 위해서였다. 학생들의 실습교재로는 물론 과학계산등 교수들의 연구분야에도 절대 필요했다. 또 과중해지는 학사행정 전산화에대한 당면과제도 빼놓을 수 없었다. 물론 도도하게 밀려오는 사회 전반의 전산화 물결에 능동적으로 대처할 수 있는 인재양성은 더욱 시급한 과제였다.
당시 외국 유학에서 돌아온 젊은 학자들은 우리나라 지도층도 선진국의 정보화 물결과 컴퓨터의 실용성을 인정해야 한다는 글을 연일 신문이나 잡지.
학회지 등을 통해 설파하고 나섰다. 미국의 "아폴로"계획이 컴퓨터로 진행되고있다는 사실은 좋은 본보기였다. 그러나 당시 대학의 재정은 당장 시급한것도 아닌 컴퓨터를 도입하는데 예산을 낭비(?)할 만큼 풍부하지 못했다. 또도입을 주장하는 교수들 역시 극소수의 소장파에 불과해 불리한 상황이었다.
서강대가 컴퓨터를 도입한 과정을 기록해 놓은 전자계산소(컴퓨터센터)일지를 보면 당시 대학들의 컴퓨터 도입여건이나 전반적인 국내환경이 어떠했는지를 잘 말해주고 있다. 일지는 예컨대 미국에서 컴퓨터를 기증받기는 했지만 막상 학교에 도착했을 때는 각 부분품들을 연결하고 설치하는 기사가없어 2개월간 아무 작업도 할 수가 없었다고 적고 있다. 결국 일본인 엔지니어마사히토 야마모토를 불러 1개월 만에 설치를 완료할 수 있었다.
그러나 이같은 어려운 여건을 이겨내며 컴퓨터를 들여온 대학들의 인재양성상황은 컴퓨터를 도입하지 못한 대학들과 별반 차이가 없었다. 초기 대학에도입된 컴퓨터는 학생 실습용이나 교수 연구용으로서보다는 학사업무와 행정자동화 용도로 더 위력(?)을 발휘했다. 무엇보다도 학생들에게 컴퓨터를가르칠 수 있는 전문가들이 드물었고 체계적 교육을 위한 커리큘럼이나 교재는더더욱 부족했기 때문이었다.
물론 일부 대학에서는 컴퓨터개론 위주의 EDPS 강좌를 교양과목 또는 선택과목으로 개설해 놓고 있기는 했다. 하지만 이같은 산발적 강좌로는 거센 전산화 물결을 능동적으로 맞이할 고급 인재양성에는 턱없는 일이었다.
이런 와중에서도 과감하게 학생들에게 컴퓨터를 체계적으로 가르치고자 시도한 곳은 숭실대였다. 70년도 신학기부터 이 대학은 국내에서 처음으로 전자계산학과를 공과대학내에 설치하고 30명의 신입생을 받아들이게 된다. 이것이 바로 우리나라 대학 컴퓨터교육의 체계적 시발점이었던 것이다.
숭실대에 전자계산학과를 설치하는데 산파역을 맡은 이는 당시 전자공학과교수이자 부설 전자계산소장이었던 김기용(현 홍익대 교수)이었다. 김기용은당시에 69년초 경제기획원이 국내 처음으로 도입했다가 유한양행으로 넘겼던"IBM 1401"을 임시로 빌려 필요한 학사업무를 처리하는 한편, 틈틈히 학생들을 대상으로 공개강좌를 해오던 터였다.
김기용은 숭실대 총장으로 특명을 받아 68년 초부터 전자계산학과 설치를위한 연구조사작업에 나섰다. 이때 김기용이 참조한 것이 바로 미국의 대학들이 채택하고 있던 소위 "커리큘럼69"이었다. "커리큘럼69"을 기준으로 전자계산학과의 교과목들이 정해졌고 69년12월 최신 대형 컴퓨터인 "IBM 1130"이도입됐던 것이다. 김기용은 또 학생들을 가르치기 위한 교재로 "전자계산학"을 직접 집필, 출간하기도 했다. "전자계산학"은 68년 송길영(현 고려대교수)이 펴낸 "전자계산기 입문"과 함께 당시로서는 몇권 되지 않은 한글판컴퓨터교재였다.
숭실대를 계기로 71년 중앙대가, 72년에는 동국대.광운공대.홍익대 등이잇따라 전자계산학과를 개설하고 신입생 모집에 나섰다. 72년 신학기 때 이들5개 대학의 전산학과 신입생 정원은 숭실대와 홍익대가 각각 50명, 중앙대와광운공대 각각 30명, 동국대가 40명 등 모두 2백명에 이르렀다.
전자계산학과를 설치하지는 않았지만 관련학과에 컴퓨터 부전공 제도를 두고있었던 곳은 서울대 응용수학과, 연세대 응용통계학 등이었다. 이밖에 서강대 전자공학과, 경희대 이공대학, 명지대 전자공학과, 부산대 공대 등이선택과목 또는 교양과목으로 컴퓨터관련 교과를 개설해 놓고 있었다.
대학원의 경우는 대학의 전자계산학과 설치보다 먼저 관련학과가 개설돼운영된 것으로 기록되고 있다. 대학원 관련학과의 설치는 68년 성균관대 경영대학원의 전자자료처리학과가 효시였다. 이 학과를 설치한 주역은 우리나라경영학박사 제1호로 알려진 서남원(현 고려대 교수). 고려대에 재직중이던서남원은 성균관대로 옮기면서 당시 권오익총장과 컴퓨터를 도입한다는 것을전제로 경영대학원에 전자자료처리학과를 설치하고 관련 과목을 개설했다.
고급 경영정보시스템(MIS)관리자 양성이 학과 설치의 첫째 목적이었다.
서남원은 성균관대에 컴퓨터가 도입되기까지 육군의 "유니백 9300"와 한국무역협회의 "NCR C 100" 등을 빌려 학생들의 실습을 도왔다. 이 당시 성균관대 전자자료처리학과를 수료한 이들이 조이남(현 금융결제원 상무).김병각(현 한국디지탈 전무).유경희.로연후(현 대검전산담당관) 등이다.
서남원은 이후 71년 고려대 경영대학원으로 복귀하고 성균관대 전자자료처리학과와 유사한 전자정보처리전공 과정을 개설함으로써 국내 대학원 전산관련학과 설치 1, 2호의 주역이라는 진기록을 갖고 있다. 그가 고려대로 복귀한것은 성균관대 권총장이 컴퓨터도입 약속을 2년이 넘도록 지키지 않았기 때문이었던 것으로 전해지고 있다.
70년대를 전후한 이 시기에 대학에서 컴퓨터관련 인재양성에 나섰던 교수들로는 숭실대 의 김기용(현 홍익대 교수)과 송후봉(현 숭실대 부총장), 중앙대의 이태원(현 고려대교수), 동국대의 안사명, 서울대의 김영택과 안수길(현 명예교수), 연세대의 한만춘과 박규태, 고려대의 서남원과 송길영, 광운공대의 김경태(작고), 한양대의 김경기(작고), 한국과학원(현 KAIST)의 박찬모(현 포항공대교수)와 조정완 등을 꼽을 수 있다.
한편 72년에는 숭실대 등 대학에 전자계산학과를 설치하고 있던 5개 대학전산소장이 발기인이 돼 컴퓨터 분야에서는 국내 처음으로 학회명칭을 사용한전자계산학회를 발족시켰다. 학회의 발족은 컴퓨터가 대학에서 학문의 소재로 정착됨에 따라 이에 대한 연구기반의 조성과 사회적 협력의 필요성에따른 것이었다.
그러나 전자계산학회는 과기처로부터 승인을 받지 못한 채 표류하다 73년3월1일 한국과학기술연구소(현 KIST) 등 연구소와 은행.기업 등 업계의 엔지니어 출신 인사들이 대거 참여한 가운데 한국정보과학회라는 이름으로 화려하게 재탄생된다.
KIST소장 한상준(현 한양대 명예총장)을 회장, 서남원과 서울대 교수 이우한등을 부회장으로 해 발족된 한국정보과학회는 오늘날 수 천명의 회원을 가진국내 최대 규모의 학회로 발전했으며 정보통신분야 산학협동의 산실로 통하고 있다.
<서현진기자>
작성일자 : 1996.02.12
서현진 기자 E-MAIL:jsuh@www.etnews.co.kr
컴퓨터 파노라마 (9) 적응기 (4) 금융단 전자계산본부 출범과 최초의 온라인 차례로 돌아가기
컴퓨터 도입과 함께 몰아닥친 전산화의 물결은 금융기관에도 예외일 수는없었다. 60년대말의 전산화 물결이 정부기관에 집중됐다면 70년대 초반의 전산화물결은 금융기관 특히 은행 쪽으로 모아졌다.
70년대 은행 전산화 대상업무는 크게 두가지 였다. 첫째는 한일은행.상업은행 등 시중은행이 추진했던 은행 사무자동화, 두번째는 사무자동화 다음단계로 본점과 지점간 고객의 입출금처리 및 조회업무를 즉시 자동화하는 온라인뱅킹 등이다.
물론 60년대 중반부터 한국은행.기업은행 등 국책은행들은 카드천공시스템(PCS)을 도입, 은행 고유업무와는 거리가 있는 조사통계업무를 처리해 오고있었다. 그러나 PCS는 일반은행들이 60년대 말부터 컴퓨터를 직접 도입하는계획을 수립하는 계기가 됐다.
은행들이 고유업무에 대한 전산화 필요성을 느끼기 시작한 것은 60년대 중반이후부터이다. 그러나 컴퓨터를 전혀 보유하고 있지 못했던 은행들은 전산관련 업무를 자체 처리할 수 없어 전전긍긍했다. 이때 등장한 우리나라 최초의컴퓨터 용역기관이 바로 한국전자계산소(현 한국전자계산주식회사)이다.
한국전자계산소는 67년 설립과 함께 한국은행.한일은행 등으로부터 정기적금및 환대사 업무 용역에 나서게 된다.
한국전자계산소의 용역업무를 계기로 조사통계업무의 PCS처리에 머물던 은행전산화는 은행업무 전산화는 환경 면에서 큰 변화를 맞기 시작했다. 그 첫신호로 왼환은행이 67년 설립과 함께 기획조사부내에 사무개선과를 신설하고미국 NCR사로부터 "NCR센추리-100"을 발주하게 된다. 뒤이어 상업은행이 68년 컴퓨터도입 및 활용을 위한 조직으로 사무부를 신설하고 한국유니백을 통해 미국의 스페리랜드사(현 유니시스)로부터 대형컴퓨터 "유니백9400"도입계약을 맺었다.
그러나 결과적으로 상업은행의 컴퓨터 도입계획은 자의반 타의반으로 실현되지 못했다. 상업은행이 도입하려 했던 "유니백9400"은 69년10월 창설된 금융기관 사무기계화개발위원회 산하 금융단 전자계산본부(KBCC)가 승계 인수했다.
금융기관 사무기계화개발위원회는 일종의 은행사무자동화 공동추진위원회같은 것이었다. 이 위원회의 실무 상설기구가 바로 KBCC였다. 80년대 후반비로소 눈뜨기 시작한 은행간 인터뱅킹 즉 금융전산망 추진의 징검다리를 놓은것도 바로 이 KBCC이다. 여기서 잠깐 KBCC의 탄생과정을 살펴볼 필요가 있다.
60년대 말은 제2차 경제개발5개년계획 추진과 함께 경제규모가 팽창하기시작했고 그 결과로 금융부문의 양적 성장을 가져오던 시기였다. 여수신업무량.점포수.은행원 등의 급속한 증가가 이뤄어졌던 것이다. 새로운 은행 신설도잇따랐는데 이때 설립된 은행들이 외환은행.주택은행.신탁은행 등이다.
이에 따라 은행들은 은행간 경쟁체제를 의식하게 됐고 인건비 절감과 사무개선, 즉 생상성 향상을 위해 저마다 컴퓨터도입 계획을 세웠다.
그러나 은행들의 독자적 전산화 움직임은 은행의 대중화와 경쟁체제의 도입이라는 긍정적 측면과 함께 부정적 우려감도 적지 않았다. 은행감독원은컴퓨터를 먼저 도입했던 기관의 시행착오 사례를 들어 은행의 독자적인 컴퓨터도입과 운영에 난색을 표명하고 나섰다. 컴퓨터 도입에 따른 비용조달과인력확보도 먼저 선결해야 할 과제였다.
이때 주무부처인 재무부 이재국장이던 장덕진(현 대륙개발 회장)이 마련한것이 "적 금융기관 EDPS화 통합운영방안"이라는 것이었다. 골자는 막대한 컴퓨터 도입비 절감과 인력확보, 시행착오 예방 등을 위해 모든 금융기관이 함께 이용할 수 있는 컴퓨터 공동이용센터를 마련하자는 내용이었다. 이에 따라 당시 13개 은행이 공동출자, 금융기관 사무기계개발위원회를 창설했고 그산하기관으로 KBCC를 두게 됐던 것이다.
KBCC는 69년10월 상업은행이 발주했던 "유니백9400"을 인수하면서 정식 업무를 시작했다. "유니백9400"과 함께 상업은행이 독자적으로 확보했던 인력및노하우까지 그대로 승계한 KBCC는 70년대 중반까지 국내 적 산업분야를 걸쳐최초의 컴퓨터공동이용센터로서 역할을 충실히 수행했다. 그 가운데서도컴퓨터 도입 비용과 위험부담의 공동부담, 각종 표준화작업과 시스템 개발, 은행간 공동업무 개발 등의 성과는 70년대 적응기로 접어든 우리나라 컴퓨터역사에 하나의 획을 귿는 중요한 업적이 됐다.
KBCC는 각 은행의 급여업무와 적금처리업무를 수탁처리하는 일과 함께 당시로서는 절대 부족했던 전산요원 양성과 조사업무에도 힘을 썼다. "언더스탠딩 컴퓨터"나 "코볼언어" 등 서적들을 직접 펴냈고 일본과 미국 금융기관의컴퓨터 도입사례 연구를 통해 "은행업무의 EDPS화의 효율적 방안" 등과 같은대정부 보고서들을 만들어 내기도 했다.
그러나 KBCC의 이같은 노력에도 불구 은행들의 컴퓨터 공동이용은 한계에부닥칠 수밖에 없었다. 여러가지 이유가 있었겠지만 그 가운데 가장 큰 이유는은행업무의 폭주에 따른 컴퓨터 용량의 한계 때문이었다.
컴퓨터 용량의 한계는 사실 KBCC의 발족부터 에견돼 오던 일이었다. 제 아무리 큰 용량이라 하더라도 13개 회원은행의 용역을 제 시간에 처리해 준다는것은 무리였다. 매달 하순부터 다음달 초순경에 걸쳐 정기적으로 발생하는업무집중현상도 피할 수 없는 것이었고 업무과중으로 하드웨어 고장이라도일으키는 날이면 고쳐질 때까지 업무가 중단돼야 했던 것이다.
한계에 부닥친 두번째 이유는 은행업무의 성격상 용역 처리할 수 있는 것과그렇지 못한 것이 분명하게 존재한다는 사실 때문이었다. KBCC가 처리한업무는 단순 집계업무에 불과했다. 일본에서 이미 60년대 말부터 보편화되기시작한 온라인 뱅킹이라든가 과목별 온라인과 같은 본격적인 은행업무 처리는 KBCC만으로는 불가능한 일이었다.
70년대 중반에 접어들면서 은행들은 나름대로 경영여건이 호전되기 시작했고 자체 시스템을 가동하지 않고는 처리할 수 없을 만큼 업무가 폭주하기시작했다. 이와 때를 같이해서 정부는 75년1월 금융업무 전산화에 대한 정부방침을 내놓기에 이르렀다. 주요 내용은 금융기관전산화 종합육성계획수립, 지로(GIRO) 및 어음교환업무의 기계화 개발(시스템개발), 금융기관 사무기계화개발위원회의 은행에 대한 컴퓨터 도입 심의 등이었다. 이 방침 가운데 눈여겨 볼 대목이 바로 금융기관 사무기계화개발위원회의 컴퓨터 도입심의이다. 결국 금융기관 마다의 특성과 업무폭주로 인해 정부는 은행의 자체 컴퓨터 도입을 권장하고 나섰던 것이다.
이같은 정부방침이 나온 직후인 75년 4월 농협중앙회가 처음으로 "유니백9480"을 도입했고 같은 해 11월에는 상업은행이 후지쓰로부터 "파콤230-48"을들여오게 됐다. 이어 76년에 국민은행과 서울신탁은행이, 77년에 조흥은행.
제일은행.한일은행.한국은행 등이 잇따라 컴퓨터시스템을 자체 비용으로들여오게 됨으로써 은행자체 전산화시대가 열렸다.
은행 자체 전산화시대가 열림에 따라 KBCC의 위상이나 역할도 재정립할 필요성이 요구됐다. 결국 KBCC는 사단법인 금융기관 전자계산소로 바뀌면서 융업무전반에 걸친 종합전산화 계획을 수립, 관리하는 기관으로 자리잡게 된다.
금융기관전자계산소는 77년6월 은행지로관리소로 명칭이 바뀌었고 다시 86년6월 어음교환관리소와 통합, 금융결제관리원으로 재탄생되면서 금융전산망사업을 총괄하게 된다.
한편 70년대 초반 주요 은행들이 금융단전자계산본부(KBCC)를 통해 컴퓨터의공동이용에 만족하고 있을 즈음 외환은행은 KBCC에 가입하지 않고 처음으로부터 홀로서기를 시도하고 나섰다.
앞서 언급한 것처럼 외환은행은 70년 1월 "NCR센추리-100"의 도입을 완료하고 독자적인 컴퓨터 운영에 들어갔던 것이다. 68년말에 컴퓨터 도입계획을세웠던 상업은행과 달리 외환은행이 정부의 권고를 뿌리치면서까지 KBCC에가입하지 않았던 것은 은행설립(67년1월) 5~6개월 전부터 이미 만반의 준비를 해온데 따른 자신감에서였다.
외환은행의 꿈은 야무진 것이었다. 당시 일본에서는 이미 본점과 지점간온라인뱅킹이 이루어지고 있었는데 외환은행은 바로 국내에서 첫 온라인뱅킹의실현이라는 목표를 세워놓고 있었다. 이 목표 달성을 위헤 컴퓨터 도입 이전인 68년부터 NCR 한국대리점이었던 동아무역(현 동아컴퓨터)을 통해 전산요원 교육에 나섰다. 또 전산요원들을 수차에 걸쳐 일본에 파견, 온라인뱅킹시스템 교육을 받도록 했다.
외환은행은 마침내 72년11월28일 미국에서 새로 도입한 "NCR센추리-200"및온라인용 패키지와 일본NCR의 기술지원에 힘입어 국내 처음으로 서울과 부산간 온라인 개통에 성공하게 된다. 서울본점의 호스트를 전화선을 통해 부산지점의 "NCR 42"터미널과 연결한 것이다. 을지로전화국-동대문시외전화국-대전중계소-부산시외전화국 등 무려 9군데의 중계국과 중계소를 통한 연결이었다. 바로 이같은 어려운 환경 때문에 일본NCR의 기술진들이 난색을 표명했음은 물론이다.
개통 후 외환은행은 보통예금과 종합가계예금의 송금 및 결제업무를 온라인을 통해 수행했고 대상지역도 인천.대구.마산 등으로 넓혀갔다. 외환은행의노력에 대한 결실은 이후 74년 대한항공의 좌석예매온라인 시스템 가동과75년 이후 본격화된 타은행 온라인뱅킹시스템 도입과정에 교과서가 됐다.
외환은행의 온라인 가동은 당시 행장이던 김우근(현 한국산업개발투자 고문)의 집념에서였다. 김우근의 애당초 목표는 서울과 인천지점간의 온라인뱅킹이었다. 서울 부산간 온라인뱅킹시스템 개통 후 김우근은 한 인터뷰에서다음과 같이 밝히고 있다.
"진정한 1일 생활권 실현을 꿈꾸었는데 71년 미국출장중 LA와 뉴욕간 송금및 결제가 온라인으로 처리되는 것을 보고 서울-인천간에서 서울-부산간으로바꿔 결심하게 됐다."
금융권에서는 지금도 진정한 1일 생활권은 경부고속도로의 개통에서보다는서울부산간 외환은행의 온라인뱅킹 개통에서 실현됐다고 믿어 의심치 않고있다.
<서현진기자>
작성일자 : 1996.02.26
서현진 기자 E-MAIL:jsuh@www.etnews.co.kr
컴퓨터 파노라마 (10) 적응기 (5) 차례로 돌아가기
70년대 중반에 들어서면서 정부 및 공공기관.교육기관.기업들의 컴퓨터 도입은 나날이 증가했다. 과기처 조사에 따르면 69년 말까지 불과 17대였던 국내컴퓨터 도입대수가 71년 36대, 73년 66대에 이어 75년에는 1백29대로 급증하는 등 2년을 주기로 거의 1백%씩 늘어나는 양상을 보였다.
시대별로 살펴보면 60년대 말까지 초창기 컴퓨터도입은 정부 및 공공기관이주도했고 70년대 초반은 금융기관.교육기관이 많았다. 기업은 72년께부터서서히 증가하기 시작했는데 75년의 경우 도입된 전체 39대 가운데 60%가넘는 24대가 기업의 몫으로 나타나고 있다.
70년대 컴퓨터도입의 증가는 금융 및 제조 분야에서 기업의 외형과 업무가팽창함에 따라 전산처리 수요가 급증했고 기술의 발전에 따라 도입비용이 낮아진 데 따른 것이었다.
제 2차 경제개발 5개년 계획(67년-71년)의 성과와 3차 경제개발 5개년 계획진입시점에서 정부가 기업 등을 대상으로 컴퓨터도입을 적극 유도한 것도하나의 이유가 됐다.
90년대와 비교하면 1백여대 내외의 숫자는 그야말로 조족지혈에 불과한 것이었지만 당시로서는 대단한 규모가 아닐 수 없었다. 적어도 70년대 중반까지는 어느 기관 또는 어느 기업이 컴퓨터를 도입한다는 것 자체가 사회적 뉴스가 됐다.
전산실 개통때면 기관과 기업에 관계없이 정부 고위인사가 참석, 테이프를잘랐다.
산업현장의 생산성 향상을 위한 성역화도구로서 컴퓨터는 70년대 경제부흥의최선봉장으로 추앙을 받았다.
컴퓨터를 도입했거나 도입예정인 기관과 기업들은 대통령이나 장관, 또는기업총수가 산업현장을 순시할 때마다 몇년 이내에 몇%의 인력절감.경비절감.생산량 증가와 같은 수치를 내놓는 것이 유행병처럼 번졌다.
컴퓨터에 대한 무지의 소치였겠지만 전산실만 구경한 사람들이 라디오나 TV에 출연해서 만능기계나 지능로보트 쯤으로 컴퓨터를 설명해 대는 통에 당시전문가들이 애를 먹었다는 일화는 지금도 적잖게 구전돼 오고 있다.
한 출판사가 "콤퓨터 국어"니 "콤퓨터 수학"이니 하는 이름의 참고서를 출판해서 큰 돈을 벌었다는 얘기도 이때 등장했다.
실제 70년대 들어 컴퓨터는 만능기계로서 중학교 무시험추첨, 대학 예비고사채점, 서울 부산간 외환은행 온라인뱅킹 등 적잖은 신화를 창조해 냈다.
이와중에서 비록 우리나라에서 일어난 일은 아니지만 미국의 복싱 챔피언 캐시어스 클레이와 로키 마르시아노간 시공을 초월한 헤비급 타이틀매치는 일반인들의 컴퓨터 신드롬을 극에 달하도록 한 사건이었다.
71년 2월 21일 동양텔리비전(TBC)을 통해 방영된 이 경기는 당시까지 역사상단 2명뿐이던 무패의 챔피언끼리의 대결이라는 점에서 복싱경기 그 자체만으로도 초미의 관심사가 됐다.
그러나 이 복싱경기는 실제 경기가 아닌 영화였다. 그도 그럴것이 캐시어스클레이(75년 "무하마드 알리"로 개명)는 29전승 가도를 달리던 WBC헤비급현역 챔피언이었고 이미 56년에 49전승의 무패 신화를 남기고 은퇴한 로키마르시아노는 영화가 제작되기 1년여 전에 비행기사고로 사망했던 터였다.
"슈퍼 챔피언(Super Fighter)"이라는 제목의 이 영화는 미국의 한 기획자에의해 과거 경기의 TV중계 필름 등을 합성해서 제작된 것이었다.
그러나 단순하게 경기 필름을 모은 것은 아니었다. 챔피언들의 훅.잽 등몸동작이나 펀치 교환회수를 비롯해 경기 중 버릇.특징 등 경기운영 스타일을분석한 컴퓨터 데이터를 토대로 구성한 시나리오에 의한 필름 편집이었던것이다.
당시 이들 데이터분석에 동원된 컴퓨터는 당시로서 성능이 가장 뛰어나다고평가 받고 있던 미NCR의 "NCR 315"기종이었다.
이 영화는 결국 46세의 할아버지 복서 로키 마르시아노가 26세 혈기왕성한캐시어스 클레이를 13회에 KO시키는 것으로 끝을 맺는다.
컴퓨터로 분석한 데이터의 결과가 영화 스토리를 그렇게 이끌어 간 것이다.
"슈퍼 챔피언"은 영화역사에서 80년대부터 본격적으로 제작되기 시작한 컴퓨터 합성 또는 컴퓨터 데이터에 의한 시나리오 영화의 모티브가 됐다.
TV 등에서는 19세기 초반에 생존했던 피아노 천재 쇼팽과 금세기 최고 피아니스트로 꼽히는 루빈스타인과의 가상 피아노연주 대결 등이 화제에 오르기도 했다.
70년대 중반까지 계속된 이같은 컴퓨터신화는 이른바 컴퓨터 마인드 확산에큰 도움이 된 것은 사실이었다. 그러나 모든 신화의 속성이 그렇듯 컴퓨터신화 역시, 생성과정보다는 결과만 중시됐고 실패나 악의 측면에 앞서 성공이나 선의 형태로 확대 포장되는 것이 다반사였다.
언론에 비친 컴퓨터의 모습도 본래 기능이나 성질과는 무관한 이를테면, 말초신경을 자극하기 위한 가십거리 수준밖에 되지 못했다. 따지고 보면 "슈퍼챔피언"도 이 범주를 벗어나지 못하고 있었다.
그러나 이같은 가십거리는 당시 실무자들이 정부의 정책결정자들을 설득할수 있는 시청각교재(?)로서 더할 나위없이 훌륭한 것이었다. 당시 정책결정자들이 얼마나 무지했고 관료적이었던가를 보여주는 70년대의 한 일화가 있다.
당시 기업들의 반도체산업 육성 건의가 잇따르자 상공부 담당국장은 실무책임자에게 반도체가 무엇이며 왜 육성해야 되는가를 조사.보고토록 지시했다. 전전긍긍하던 책임자가 어느날 우연히 TV에서 6.25때 동강난 한강철교장면을 보다가 생각해낸 것이 바로 강물이 가르고 있는 두 뭍을 연결해 사람과자동차를 통행시키는 다리 그림이었다.
다리 부분에 교각처럼 여러 가닥의 리드프레임이 뻗어나와 있는 반도체 그림을 그려 넣었다는 것이다. 즉 반도체를 동맥같은 개념으로 설명한 셈이다.
당시 국장이 반도체를 제대로 이해했는지 여부를 떠나서 우리나라 반도체산업 육성결정이 이같은 배경에서 내려졌다는 점에서 실소를 금할 수 없다고이 책임자는 회고하고 있다.(이광호 전상공부 전자부품과장)정부 관료들의컴퓨터에 대한 이해도 반도체 수준에 못지않았던 것으로 전해지고 있다. 경제개발에 컴퓨터를 적극 이용하고자 했던 박정희대통령은 각료들이나 비서진들이 컴퓨터에 문외한이라는 사실에 늘 불만이었다.
이 때문에 박대통령은 자신이 컴퓨터를 직접 이해하기 위해 틈이 날 때마다당시 컴퓨터활용이 가장 활발했던 한국과학기술연구소(KIST) 전자계산실을찾았다.
이때마다 전산실장 성기수(현 동명정보대 총장)는 박대통령이 만족할 만한컴퓨터 능력들을 시연해 주곤 했는데 당시 KIST에 근무했던 한 관계자는 "한번은 성실장이 어거지로 레지스터(Register)를 조작하여 (별로 의미도 없는)컴퓨터 음악을 연주하고 그림을 그려보이기도 했다"고 회고하고 있다(이명재부산대 교수)
한편 사회 전체가 컴퓨터의 신기로 감탄에 감탄을 연발하고 있을 무렵인 73년 10월 이른바 서울 반포AID차관아파트 부정추첨사건이 발생했다. 사람들은신문 사회면에 대서특필된 이 기사를 부패한 정부 관리가 개입한 추문사건쯤으로 생각하고 읽어 내려가다 아연실색하고 만다. 사건 내막에 컴퓨터가깊숙하게 개입돼 있었기 때문이었다.
반포AID차관아파트는 정부가 서울 강남지역 개발계획에 따라 미 국제개발국(AID) 자금을 들여와 짓고 있던 대규모 아파트단지였던데다 입지여건도 좋아분양 전부터 높은 인기를 얻고 있었다. 당국은 일반인들의 입주신청이 몰리자 최종 입주자선정을 컴퓨터를 통해 추첨해 내기로 하고 그 용역을 과기처산하에 있던 중앙전자계산소(NCC.현 총무처 정부전자계산소)에 맡겼다.
NCC가 이 추첨건을 맡게 된 것은 당시 국내 도입된 컴퓨터 가운데 최대인1백31KB의 용량을 가진 "유니백1106"을 보유하고 있었던데다 정부산하 기관이었다는 점에서 부정이 개입할 소지가 적었기 때문이었다. 그런데 사건은다름아닌 NCC소속 프로그래머 정모에 의해 저질러졌다. 정은 수 십명의 입주신청자들로부터 뇌물 청탁을 받고 추첨프로그램 처리과정을 임의로 조작하는방법을 통해 이 가운데 9세대 분을 부정 당첨토록 한 것이다.
NCC의 추첨프로그램은 컴퓨터 기능의 한계때문에 데이터의 처리과정이 콘솔(Console Printer)이라는 감시용 출력장치에만 나타나고 오래 보관할 수있는 디스크장치에는 남을수 없도록 짜여져 있었다. 따라서 이 콘솔장치의출력과정만 조작하면 논리적으로는 완전범죄가 가능한 상황이었다.
시스템상의 허점을 간파한 정은 청탁자들이 당첨될 수 있도록 시스템 처리과정을 변경시킨 25장의 프로그램카드를 별도 작성하고 이를 정상적인 프로그램카드에 끼워넣고 컴퓨터에 입력처리한 다음 최종 프로그램 컴파일 과정에서 다시 25장의 카드를 빼내는 수법을 사용했다. 즉 콘솔장치에 부정한 25장의 카드처리 흔적이 나타나지 않도록 했던 것이다.
완전범죄일 것만 같았던 이 부정추첨사건은 청탁과정에서 정에게 불만을샀던 NCC직원의 검찰투서에 의해 드러났다. 실제 당첨된 9세대 가운데 5세대가NCC직원이었다.
이 사건은 국내에서 최초로 발생한 컴퓨터범죄였던데다 프로그램 개발과정에직접 참여했던 프로그래머가 범인이었다는 점에서 사회 일각에 엄청난 충격을 가져다 줬다. 조작자가 마음만 먹으면 얼마든지 많고 다양한 형태의 컴퓨터범죄를 저지를 수 있다는 경고였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반포AID차관아파트 사건은 엄청난 컴퓨터 신드롬에 빠져있던 많은일반인들에게 컴퓨터의 본질에 좀 더 객관적으로 다가설 수 있는 계기를 마련해 줬다는 점에서 또다른 측면의 평가가 내려지기도 했다. 만능으로만 여겨졌던 컴퓨터가 사실은 "손을 봐줘야 할 곳이 많은" 엄청난 허점투성이 기계에 불과하다는 것이 이 사건을 통해 만천하에 드러나게 됐던 것이다.
서현진기자
작성일자 : 1996.03.04
컴퓨터 파노라마 (11) 적응기 (6) 산업의 형성(상)-미니컴퓨터 3총사의 부상 차례로 돌아가기
60년대말부터 70년대말까지의 10여년 사이 우리나라의 주요 기관과 기업들이도입한 컴퓨터 대수는 4백27대에 이르고 있다. 한가지 흥미로운 것은 70년대중반부터 중대형급 컴퓨터의 도입비율이 감소하는 대신 미니컴퓨터의 도입이급속하게 증가하고 있다는 사실이다. 이와함께 규모가 작은 공공기관이나중견기업들의 도입비율도 크게 늘어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실제 60년대말까지 우리나라에 도입된 10여종의 컴퓨터은 IBM의 "S/360". 일본 후지쯔 신기제작소의 "파콤". 컨트롤데이터의 "CDC". 스페리랜드의 "유니백" 등 고가의 중대형 컴퓨터들이 주류를 이뤘다. 70년대에 들어서면서 이같은현상은 분명하게 제동이 걸린다. 바로 데이터제너럴(DG)의 "노바(NOVA)". 디지털이퀴프먼트(DEC)의 "PDP". 왕래버토리즈의 "왕(WANG)". NCR의 "센추리(Century)". 버로스(Burroughs)의 "버로스" 등 미국회사들의 미니컴퓨터 기종들이 급부상하고 있었던 것이다.
이들 미니컴퓨터 기종은 세계적으로 반도체기술의 급진전에 따라 중대형급에비해 도입가격이 최고 10분의 1까지 저렴하면서도 성능차이는 그다지 크지않다는 특징을 갖고 있다. 예컨데 72년 KIST 방식기기 연구실이 도입한 3대의 "노바01/1200"기종은 주기억용량이 각각 16.32.48kB였는데 구입비용은 합쳐서 6만달러에 불과했다. 4년전 68년 육군 경리단에 도입됐던 스페리랜드의8kB의 "유니백9300"이 20만달러, 67년에 도입됐던 "IBM 1401"은 월 사용료(임대료)만 9천달러였던 것과 좋은 대조를 이루고 있다.
72년부터 75년까지 "노바" 등 미니컴퓨터를 도입한 곳을 보면 KIST 방직기기연구실. 행양개발연구소. 해군본부.동국제강.한영공업(현 효성중공업).강원산업.목포상고.동양시멘트.삼화고무.국제전기 등 30여곳 40대에 이른다. 이기간동안 국내에 도입된 컴퓨터 전체 93대의 40%가 넘는 비율이다. 컴퓨터가정부 부처와 규모가 큰 공공기관 및 대기업만의 전유물이 아니라는 사실을보여주는 것이었다.
미니컴퓨터의 부상은 컴퓨터에 대한 활용의 폭이 그만큼 넓어질 수 있다는점에서 사용자층 뿐만 아니라 컴퓨터업계에도 새로운 기운을 불러왔다. 60년대말까지 우리나라 컴퓨터업계는 사실 업계라고 일컬어질 만한 규모였거나수준은 결코 못되었다. 이때까지 나타난 컴퓨터 관련 기업은 모두 합쳐 10개에 지나지 않았기 때문이다.
당시 컴퓨터업체로서 명함을 내밀 수 있었던 곳은 한국IBM.한국유니백.컨트롤데이타코리아(CDK) 등 기종 공급회사와 공공기관 형태의 한국전자계산소(현 주식회사 한국전자계산).KIST 전자계산실(현 시스템공학연구소).서울컴퓨터센터(현 서울정보처리학원) 등 용역서비스 기관이 고작이었다.
그런데 72년 5월 인터내셔널데이터코퍼레이션(IDC)을 필두로 한국뉴콤. 인터내셔널 데이터스템 코퍼레이션(IDsC). 동양시스템산업(OSI). MC인터내셔널. 금호실업 전자전기사업부.동양전산기술 등 미니컴퓨터 전문 공급회사가 잇따라출범하면서 컴퓨터 분야는 독자적인 산업으로서 그 영역을 확보하려는 바람이 불기 시작했다. 또 컴퓨터를 도입하려는 기관이나 기업들이 급증하면서시장개념이 생겨나고 공급회사들의 제품경쟁이 본격화될 기미도 나타나기 시작했던 것이다.
미니컴퓨터 공급회사들의 등장으로 가장 긴장한 곳은 기존의 중대형 컴퓨터공급회사들이었다. 미니컴퓨터 기종의 이른바 가격대비 성능의 우수성 입증으로 중대형 컴퓨터 공급회사들의 대응책 마련이 본격화됐다.
한국IBM의 경우 69년말 38명에 불과했던 직원이 75년말에는 1백20명으로늘고 같은 기간동안 자본금도 1억9천만원에서 20억8천만원으로 증가했다. 스페리랜드는 한미 합작법인이던 한국유니백의 조직을 인수, 71년 현지법인 스페리랜드코리아(현 한국유니시스)를 출범시켰다. 또 일본에서 제품을 직접공급해오던 일본의 후지쯔 신기제작소는 74년 화콤(파콤)코리아(현 한국후지쯔)를 설립했고 중형급 NCR기종을 공급해오던 동아무역 역시 본격적인 영업활동을 위해 75년 동아컴퓨터를 별도 출범시켰던 것이다.
70년대 미니컴퓨터의 등장은 아무튼 국내 컴퓨터시장을 본격적인 경쟁체제로몰아가면서 독자적인 산업체계로 부상시키는 계기를 마련해 줬다. 그 주역들로는 DG의 "노바 01".왕래버러토리즈의 "왕 2200B".DEC의 "PDP 8/E" 등 미니컴퓨터 3총사가 단연 으뜸으로 꼽힌다.
이 가운데 "노바01/1200"은 72년 5월 DG의 총판으로 출범한 인터내셔널데이터코포레이션(IDC)에 의해 국내에 첫 선을 보였다. 72년 10월의 KIST 방식기기 연구실이 "노바01/1200"의 첫 고객이다. KIST방식기기실은 나중에 이기종을 모델로 최초의 국산컴퓨터 "세종1호"를 개발한 곳이기도 하다.
IDC는 60년대말 한일은행.한국전력 등에 NCR의 전자식 회계처리기를 공급한바 있는 동아무역에 근무하던 이명진이 일본 샤프전기의 지원아래 설립한회사였다. 이명진은 동아무역 직원으로서 일본 NCR를 드나들다 샤프전기와손이 닿았고 71년부터는 아예 샤프전기 해외사업부 서울주재원으로 자리를바꿔 앉았다.
IDC의 "노바01/1200" 국내 공급실적은 그러나 신통치 않아 KIST 방직기기연구실이 처음이자 마지막이 되었다. IDC는 73년 7월 샤프로부터 출자금을지원받아 한.일합작 샤프데이타코리아(현 한국샤프)로 재출발하면서 전자수첩판매회사로 업종을 전환했기 때문이다.
"노바 01" 국내공급은 73년도 한해동안 공백기를 거쳐 74년 1월 출범한 인터내셔널 데이터 시스템코포레이션(IDsC)에 의해 본격적으로 재개되었다. IDsC의설립자 역시 IDC가 샤프데이타코리아로 전환하면서 경영일선에서 물러나있던 이명진이었다. 이명진이 회사명칭을 굳이 IDsC로 한 것은 "노바"대리점으로서 기존 IDC의 브랜드이미지를 그대로 가져가기 위한 것이었다. IDsC는당시 미 DG사가 직접 투자한 일본의 니혼미니컴퓨터(현 일본DG)와 계약을 맺고"노바01/1200"시리즈의 한국판권을 거머쥐고 있었다. 당시 니혼미니컴퓨터는DG와 합작으로 동남아지역에 공급할 "노바01/1200" 등을 일본내에서 직접생산하고 있었다.
IDsC는 출범이후 목포상고. 동광전기.건국대(이상 74년), 한국과학원. 홍능기계공업. 해양연구소. 선박연구소(이상 75년), 삼성전자(76년) 등에 "노바01/1200"을 비롯 "노바 840" "이클립스" 등 DG 제품을 잇따라 공급, 국내에 미니컴퓨터 기종 뿌리내리기의 최일선에 나섰다. DG의 미니컴퓨터는 79년말까지39대가 국내에 보급됐다.
IDsC는 77년 4월 당시 기업확장에 열을 올리던 동양정밀공업(OPC)그룹에흡수되면서 회사이름을 동양시스템산업(OSI)으로 개명했다가 OPC의 부도로 88년 기업으로서의 최후를 맞았다.
미 DEC가 63년 세계 최초로 발표한 미니컴퓨터 계열의 "PDP 8/E"는 72년 4월전기통신연구소가 국내에 처음 도입했다. "PDP 8/E"는 그러나 같은해 도입했던 천공카드 용역업체 한국키보드를 비롯 74년말 인천제철.현대양행.강원산업에 이르기까지 국내에 뚜렷한 공급회사 없이 오퍼상 등을 통해 공급됐다.
"PDP"시리즈와 후속 "VAX 11"을 전담 공급하게 되는 동양전산기술(OCE)이발족된 것은 75년 2월이다. OCE가 배출한 인물들을 면면을 살펴보면 이 회사가당시 국내 컴퓨터업계에 얼마나 큰 영향력을 갖고 있었나를 가늠해 볼 수있다.
OCE의 중심 인물은 이윤기(전 삼보컴퓨터 및 엘렉스컴퓨터 대표).권순덕(한맥소프트웨어 대표).김영식(현 엘렉스컴퓨터 대표).김영한(하이테크마키팅연구소장).김천사(현 두산정보통신 대표).김병각(현 한국디지탈 전무).이정희(현 삼보정보시스템 대표).윤부근(부륭시스템 대표).김주현(전 삼성전관상무).김의현(현 한국디지탈 상무) 등 이었다. 여기에 정수창(전 두산그룹회장).이용태(현 삼보컴퓨터 회장).구지회(전 가인시스템 대표) 등이 직간접으로 OCE를 지원하고 있었다.
OCE가 79년까지 국내에 보급한 "PDP"시리즈는 무려 58대로서 한국IBM의 75대에 이어 업계 전체 2위를 차지했다. 하지만 OCE의 실적은 창업한 75년부터4년여의 것이고 한국IBM의 것은 67년부터 12년에 걸친 실적이었다. 75년을전후한 주요 "PDP"고객들을 보면 동양시멘트.대한전선.영남대.반도상사.한양투자금융 등을 꼽을 수 있다.
OCE가 DEC의 국내총판으로 출범한 것은 당시 가장 인기있던 "PDP"시리즈의노하우를 습득, 이를 토대로 OEM방식의 컴퓨터를 생산해 보겠다는 야망에서였다. 출범당시 두산그룹 정수창 회장으로부터 창업자금을 지원받은 것도 이때문이었다.
그러나 OEM 생산과정은 제품의 가격 결정이 여의치 않아 결과적으로는 OCE의기업경영에 막대한 타격을 주고 말았다. 그 결과로 OCE는 77년 3월 두산그룹계열 동양맥주에 의해 지분의 50%가 매각된데 이어 79년 5월 같은 그룹내합동통신의 광고기획실부문과 통합, 오리콤으로 재탄생하게 된다.
광고대행 사업본부와 전산 사업본부 등 2본부체제로 출범한 오리콤은 다시83년 DEC사업을 전담해온 전산 사업본부를 두산컴퓨터라는 이름으로 독립시켰다. 미니컴퓨터 3두마차 가운데 세번째인 "왕"은 73년 10월 김덕기(전 컴퓨터코리아 대표)가 김영한, 김성중(현 기흥정보시스템 대표) 등과 설립한한국뉴콤에서 공급했다. 왕래버러토리즈는 한국뉴콤이 출범하기전 태영사라는 무역업체를 통해 한영공업(현 효성중공업)과 원자력연구소 등에 워드프로세서와 전자계산기(Calculator) 등을 공급해 왔다. 한국뉴콤이 출범하면서비로소 "왕2200A" 등 컴퓨터 기종이 국내에 들어왔는데 첫 고객은 75년의 대일유업과 금호실업이었다.
고객으로서 금호실업이 "왕"의 판권과 한국뉴콤 조직을 인수한 것은 75년6월이다. 이때부터 "왕"은 조직력과 자금력이 더해지면서 국내에서 인기가치솟아 79년말까지 30대를 공급, IBM.DEC.후지쯔.DG에 이어 국내에서 5번째로많은 기종 보급률을 기록하게 된다.
한편 컴퓨터기종 공급이 늘고 다양해지면서 전산소모품과 액세서리를 공급하는 회사들도 생겨나기 시작했다. 대표적인 기업들로는 조우니비지니스.삼양비지네스폼.광명돗판무어(이상 연속기록 전산용지), 한일카드.데이타미디어(이상 천공카드), 유일기업.삼애기업(이상 프린터리본), 바스콤(마그네틱테이프) 등이다. 이들이 컴퓨터 분야가 70년대 중반에 독자적인 산업분야로자리매김하는데 있어 적잖게 기여를 했음은 물론이다.
서현진기자
작성일자 : 1996.03.11
컴퓨터 파노라마 (12) 적응기 (7) 산업의 형성 (하)-SW산업의 태동 차례로 돌아가기
70년대가 되어 비로소 형성되기 시작한 우리나라 컴퓨터산업의 한 축이 지난호에 언급했던 것처럼 하드웨어(HW) 판매였다면 또다른 축은 소프트웨어(SW) 용역이었다.
SW 용역은 크게 3가지 형태로 구분해 볼 수 있는데 천공카드에 구멍을 뚫어주는 키펀치(Key Punch)용역.HW 도입기관의 업무개발 용역.외국산 패키지를도입해서 국내현실에 맞게 개량해 주는 업버전 용역 등이다.
키펀치 용역은 단순업무이긴 했지만 한때 정부의 수출장려 산업으로 지정되기도 했다. 업무프로그램 개발은 비교적 규모가 큰 기업에서 이루어 졌지만키펀치 용역처럼 활발하지는 못했다.
외국산 패키지를 업버전하는 일은 주로 외국계 대형 HW공급사들에 의해 이뤄졌는데 이는 SW산업보다는 HW를 판매하기 위해 부대서비스 성격이 훨씬 더강했다. 한국IBM이 73년 대한항공에 "IBM 1130"을 공급하면서 68년 미본사가아메리카항공사와 공동 개발한 온라인 예약시스템 "PARS"를 도입, "KALCOSI"이라는 이름으로 현지화한 것이 대표적인 예로 꼽힌다.
이 가운데 70년대 중반까지 가장 활발했고 우리나라 SW산업의 토대를 닦게해준 분야는 단연 키펀치 용역이었다.
엄밀하게 따져보면 사실 키펀치 용역이 SW분야일 수는 없었다. 키펀치 용역이란 프로그램과 데이터를 기억시키기 위해 종이카드나 종이테이프에 구멍을뚫고(Punching) 검공(Verifying)하는 것을 말한다. 그러나 작업과정에는극히 일부이기는 했지만 잘 훈련된 프로그래머가 필요했다. 따라서 초창기키펀치 용역은 당연히 SW분야에 포함됐고 또 SW산업을 대표하는 업종이기도했다.
컴퓨터 마인드가 제대로 정착되지 못한 상황에서 키펀치 용역에 대한 일반인의 시각은 사뭇 긍정적이기까지 했다. 첨단 직종이라는 명분아래 사회적으로매우 전도유망한 직업으로 인식되는가 하면 키펀치 작업과정을 가르쳐 주는1~2개월 과정의 학원교습은 언제나 여성 수강생들로 붐볐다. KIST와 같은공공기관에서 개설한 수료과정은 70년대 말까지도 높은 인기를 누리며 젊은여성들의 선망의 대상이 되기도 했다.
천공카드시스템(Punch Card System)이 우리나라에 들어온 것은 60년대 초반부터이다. 그러나 당시는 용역을 전문으로 하는 기업이 있었던 것이 아니고경제기획원 등에서 직접 직원을 고용, 인구센서스 처리와 같은 고유업무를처리하는 수준이었다.
그러던 것이 60년대말 컴퓨터 도입이 이뤄지고 한국전자계산소.KIST전자계산실.한국생산성본부 등이 키펀치요원 양성과 함께 공공기관 용역업무를 따내면서 키펀치 용역은 독자적인 영역을 구축해 나가기 시작했다.
키펀치 용역업을 표방하고 설립되거나 업종 전환한 기업현황을 보면 72년까지 10개이던 것이 73년에는 16개, 74년에는 23개사로 각각 늘어났다. 그러나이때 키펀치 용역회사들의 주 매출원은 내수보다는 미국과 일본지역에 대한수출이었다. 내수의 경우 74년까지 컴퓨터를 도입한 기관과 기업들을 중심으로 50여곳이 독자적인 PCS시설을 갖추고 자체업무를 처리해 오고 있었다.
국내 키펀치 용역에 의한 SW수출 1호는 69년 한국전자계산소(현 KCC)로서이를 시발로 KIST전자계산실(현 시스템공학연구소).서울컴퓨터센터.광운대전자계산소.나라교역(현 청호컴퓨터).한국보험전산.인터내셔널 컴퓨터리소스(ICR).동일컴퓨터센터 등이 잇따라 설립됐다. 또 동일교역.동양비지네스 등 일본계 합작회사와 한국키보드 등 영국계 합작회사 등도 설립돼 키펀치 구멍수에 따라 달러의 양이 바뀌는 수출일선에 나섰었다.
키펀치 용역에 의한 SW수출 상황은 69년 한국전자계산소가 대일 수출을 개시한 이래 70년대 말까지 과학기술처 정보관리실이 매년 산출한 통계의 초기기록을 보면 69년 5천달러, 70년 2만달러, 71년 5만5천달러 등 소규모였다.
그런데 72년에는 전년대비 11배나 되는 60만5천달러에 이르고 73년에는 이의4배인 2백44만달러, 그리고 74년에는 4백68만달러 등으로 급증하고 있음을알 수 있다.
이처럼 수출외형이 급증하자 수출만능주의 정책으로 일관하던 정부는 상공부를 통해 키펀치 용역을 장려하려는 각종 시책을 펴게 된다. 대표적인 시책은덤핑수출에 의한 업계간 과당경쟁을 방지하고 요원 양성 및 확보, 시장개척등의 공동 추진을 목적으로 72년 12월 한국전자계산용역수출조합을 결성케한 것 등이다.
정부는 이 조합을 통해 해외시장 정보를 수집하거나 영세 조합원 업체들을대상으로 내국신용장제도를 활용케 했으며 당시 융성하던 대형 수출상사와의계열화 등을 추진해 나가도록 유도했다.
키펀치 용역수출은 그러나 결코 바람직한 것은 못됐다. 주요 수출국인 미국과 일본이 한국에 키펀치 용역을 의뢰하게된 가장 큰 이유는 단지 인건비가저렴하다는 것 때문이었다.
과기처의 기록을 토대로 72년 당시 각 3국의 키펀치 요원에 대한 시간당임금을 비교해 보면, 미국이 5.7달러.일본이 3.65달러였던 반면 한국은 겨우0.33달러에 불과했다.
미국에 비해 17배, 일본에 비해서는 11배나 저렴했던 것이다. 게다가 대부분의 용역업체들은 자본력이 영세해서 PCS장비를 IBM이나 스페리랜드 등으로부터 임차해서 사용하던 터였다. 이를테면 PCS장비 임차에 대한 비용부담이수출원가의 50% 정도를 차지하는 상황이었던 것이다.
이런 악조건은 상공부의 수출장려 시책에도 불구, 전혀 개선되지 못했으며74년부터는 경쟁업체 증가와 채산성 악화로 중도 하차하는 기업들이 늘어났다. 76년 이후 살아남은 기업이나 기관은 붐이 일기전인 72년과 같은 10여개정도였다. 이들은 한국보험전산에서 이름을 바꾼 한국전산.주식회사로 전환한 한국전자계산.한국비지니스컨설턴트(KBC).KIST전산실.부녀복지회.광운대전자계산소 등 비교적 공공기관이나 기업규모가 단단한 곳들 뿐이었다.
한편 키펀치 용역수출이 SW산업이라는 이름으로 활성화되고 있을 무렵, 일부기업과 공공기관들 사이에서는 본격적인 SW개발에 눈을 돌리기 시작했다.
67년에 설립된 한국전자계산소를 비롯, KIST전자계산실.한국보험전산.서울컴퓨터센터 등이 70년대 초반 본격적인 SW개발을 주도한 회사들로 꼽히고 있다. 여기에 은행컴퓨터 공동이용센터인 금융기관 전자계산본부.정부전자계산소등이 가세함으로써 초창기 우리나라 SW산업은 그런대로 위용을 갖춰나가기시작했다.
전문SW센터 운영이라는 취지로 시작된 SW개발은 그러나 수요가 늘 넘치는것이 아니어서 한편으로는 키펀치 용역과 같은 단순사업을 통해 회사를 유지해나가면서 외부로부터 업무프로그램 용역을 위탁받아 그 영역을 넓혀가는식이었다.
한국전자계산소는 잘 알려져 있다시피 미국IBM 직원이었던 이주용(현 KCC회장)이 미국에서의 유학경험과 IBM에서 얻은 노하우를 바탕으로 설립했는데키펀치 용역에서부터 정부기관의 전산화 타당성과 설계용역.정부의 경제개발5개년 계획의 분석.우리나라 정보화마인드 조사 등 당시로서는 획기적이고보기드문 용역들을 처리, 명성을 얻었다.
KCC는 60년대 말부터 70년대 초반까지 정부 및 주요 공공기관의 용역을 사실상 독과점했다. 특히 키펀치 용역수출이 벽에 부닥치면서 KCC는 재빠른 변신을 통해 일본 생산성본부와 일본 사학재단 등으로부터 특허관리업무.사학공제업무 등의 프로그램 개발을 위탁받아 74년까지 1백만달러의 수출액을 기록하기도 했다.
체신부의 전화요금 전산화 등 정부용역으로 노하우를 쌓아가던 KIST전자계산실도 72년께부터는 해외수출에 눈을 돌리기 시작했다. 한미기획단(USA/KPA)의 병참업무 전산화.미공보원(USIS)의 자료처리.미8군의 워게임(War Game)시뮬레이션SW 개발 등이 70년대 초반 KIST전산실의 대표적인 수출용역이었다.
서울컴퓨터센터는 68년 한국자동차보험.한국유리.경성방직.삼양식품 등 11개업체가 공동 출자, 당시로서는 큰 액수인 2천만원의 자본금으로 출범해 출자회사들의 업무프로그램 개발을 전담했다.
또 이사장에 주요한(전 부흥부장관.상공부장관, 시인).감사에 전택■(전 YMCA 총무) 등 명망가들을 영입, 출범한 서울컴퓨터센터는 71년 IBM의 "IBM 360 40", 72년 컨트롤데이터의 "CDC 3150" 등 대형컴퓨터 등을 도입, 당시 SW센터로서는 가장 화려한 위용을 갖춰 나갔다.
서울컴퓨터센터의 센터 운영방식은 독특해 주주기업들의 용역처리와 전산요원 양성을 우선하되 주주기업들이 독자적인 전산시설과 처리능력이 생기면주식을 반납시키고 새로운 주주를 영입한다는 전략을 갖고 있었다.
그러나 서울컴퓨터센터는 화려한 장비규모와 달리 주주회사나 일반회사들의용역 의뢰 대부분이 단순 통계업무에 집중돼 컴퓨터 활용이나 센터 운영의수지타산 측면과는 거리가 있었다. 이같은 한계때문에 업계에서 가장 주목을받았던 서울컴퓨터센터는 75년말 소유주가 민경현(현 한국정보처리전문가협회 회장)에게 이양되면서 명칭도 서울컴퓨터학원(현 서울정보처리학원)으로바뀌게 됐다.
KCC.서울컴퓨터센터 등 보다는 늦게 출범했으면서 70년 중반부터 80년대에이어 90년대까지 줄기찬 성장을 거듭한 회사가 한국보험전산이다. 한국보험전산은 69년 은행들이 금융기관 전자계산본부를 출범시키자 동방생명(현 삼성생명).대한생명 등 보험회사들이 이에 자극받아 전산화 경험이 많은 일본의 교에이(협영)보험을 끌어들여 한일합작으로 설립된 회사이다. 한국보험전산은 출자회사들의 성분에서도 알 수 있듯이 국내 보험산업의 전산화를 통해단기간에 육성한다는 취지에서 설립됐다.
초기 자본금 45만달러로 출범한 한국보험전산은 교에이보험의 전산화모델을도입, 보험업무에서 만들어지는 각종 전표의 분류작업 등의 전산화에 착수했다. 우수한 인재들이 집결한 한국보험전산은 이어 72년 10월 상호를 현재의한국전산(KICO)으로 바꾸고 본격적인 SW 외주개발과 시스템 대여사업에 나섰다.
특히 시스템 대여사업은 대여기관이 자체시설을 도입할때까지 업무처리를대행해 주는 방식이었다. KICO의 시스템 대여사업이 활성화되면서 과기처는73년 "분당 컴퓨터사용 단가표"라는 것을 정해 놓았는데 분당 직접처리(Foreground Job) 이용료는 6백70원, 이면처리(Background Job) 이용료는 4백원이었다.
70년 중반이후 KICO가 주력했던 외주용역은 삼성물산.신세계백화점 등 삼성그룹 계열사들이었다.
KICO를 지휘하던 전상호(현 농심데이타시스템 사장)가 86년 설립된 삼성데이타시스템의 초대 사장에 영입된 것도 이같은 연유에서 였다.
서현진기자
작성일자 : 1996.03.18
컴퓨터 파노라마 (13) 적응기 (8) 최초의 국산 컴퓨터 「세종1호」 차례로 돌아가기
외국산 하드웨어 공급회사와 소프트웨어 개발용역회사들의 잇따른 출범과함께 모양새를 갖춰 나가기 시작한 국내 컴퓨터업계가 비로 『우리 것』을만들고자 했던 노력을 보인 것은 72년부터이다.
물론 국산화에 대한 노력은 60년대 초반 李萬永(현 한양대 명예교수)의 진공관식 아널로그 계산기 제작(본란 5회 1월22일자)과 70년 KIST가 영문 라인프린터의 한글화(본란 6회 1월29일자)등이 있었다.
그러나 실제의 사용환경을 지원하면서 완벽한 구성을 갖춘 컴퓨터 하드웨어 개발은 73년 2월에 완성된 미니컴퓨터 「세종1호」가 그 효시이다.
「세종1호」는 미국 데이터제너럴(DG)의 미니컴퓨터 「노바 01」을 개량해서 만든 우리나라 최초의 국산 디지틀 컴퓨터로 기록되고 있다.
「세종1호」의 개발과정은 이 프로젝트가 시작된 72년의 국내외 정치적 상황과 밀접한 관계를 맺고 있어 흥미롭다. 「세종1호」의 개발이 정치적 목적에 의해 이루어졌다는 애기다. 컴퓨터 기술이 이때부터 정치적 상황에 활용되기 시작했다는 얘기도 된다.
그러나 「세종1호」는 지금은 삼성전자에 흡수 합병된 삼성반도체통신의출범에 직접적인 계기를 제공해 주는 등 산업적 측면에 적지않은 영향을 미치기도 했다.
「세종1호」의 개발 프로젝트는 청와대 의해 「메모 콜(Memo Call)」이라는 암호명으로 72년 6월에 시작됐다. 이에 앞서 2개월 전인 72년 4월 당시청와대 통신기술처장이던 한 인사가 한국과학기술연구소(KIST)측에 안병성에게 다음과 같은 기술적 검토 및 제품 개발 가능성을 타진해 왔다.
『청와대의 주요 기관 간 전화통화에 내용에 대해 미국 등 외국의 정보기관이나 기타 외부로부터의 도청 가능성을 차단할 수 있고, 주요 요인들과 신속하게 통화할 수 있으며 통화 도중이라도 언제나 상위권 통화자가 통신상태를 제어할 수 있도록 하는 핫라인용 사설전자교환기(PABX) 개발이 가능합니까?. 73년3월 이내에 개발이 가능하다면 연구개발비 댓가로 6천만원을 제공하겠소.』
청와대 측의 이같은 교환기제작 검토는 당시 李厚洛 중앙정보부장과 북한朴成哲 부수상의 극비 남북교환방문에 이은 7.4남북공동성명과 남북적십자예비회담 등 긴박했던 정치적 상황과 직접 관련이 있었던 것으로 전해지고있다. 이를테면 청와대와 중앙정보부간 초특급 핫라인이 필요했던 것이다.
KIST측은 2개월여 동안의 연구조사 끝에 청와대가 요구해온 PABX가 미국과소련 등에서도 극히 일부 고급기관에서만 사용되고 있는 시분할식 특수목적용 교환기라는 사실을 알았다.
그러나 당시 컴퓨터 업계를 휩쓸던 미국 디지탈이큅먼트사(DEC)의 「PDP-11」시리즈나 DG사의 「노바 01」시리즈 등 미니급 컴퓨터를 PABX 시스템제어용으로 활용하면 청와대가 요구한 PABX의 사양을 못맞출 것도 없다는 판단을 내렸다.
KIST측은 드디어 방식기기연구실(뒤에 전자공학부로 개칭)실장 安柄星(현ETRI기술역)을 팀장으로 하고 하드웨어의 디지털 부문에 余在興(현 한화전자정보통신 전무), 아널로그 부문에 李周炯(현 삼성전자 전무), 소프트웨어 부문에 천유식(현 ETRI 책임연구원)을 각 부문 책임자로 하는 「전자교환시스템팀」(내부적으로는 「노바팀」으로 불렸다고 함)을 구성, 청와대측과 「메모콜」개발 프로젝트 계약을 체결했다.
「메모콜」프로젝트 실질적인 내용은 교환기를 자동으로 제어해 주는 컴퓨터시스템의 개발이었다. 따라서 제어용 소프트웨어의 개발이 필요했고 이에앞서 소프트웨어를 개발할 하드웨어 플랫폼, 즉 미니급 정도의 컴퓨터가 필요했다. 당시 성능이 좋은 미니컴퓨터로는 「PDP 8/E」가 단연 으뜸이었는데 너무 인기가 좋은 나머지 고객의 주문에서부터 제품 인도까지 걸리는 시간이 평균 4∼5개월이었다. 물론 당시 청와대의 「힘」이라면 「PDP 8/E」몇 대쯤은 금방 들여올 수도 있었겠지만 청와대 측이 「메모콜」프로젝트가미국정보기관이나 다른 국내기관에 노출될 것을 꺼려한 나머지 전면에 나서지 않았다.
개발 시한이 73년 3월까지였으므로 KIST 측은 「PDP 8/E」를 포기할 수밖에 없었고 그대신 당시 미국 DG가 일본에서 현지 생산하고있는 「노바 01」을 도입하기로 했다. KIST가 외무부에 협조를 구하는 형식을 취해 「노바 01」 3대가 주문 1주일 만에 방식기기연구실에 설치됐다.
개발된 제어용 소프트웨어들은 「노바 01」환경에서 모두 어셈블리어로 짜여졌다. 그 내용은 이를테면 다음과 같은 기능들을 수행하기 위한 것이었다.
1.송신자의 번호뿐 아니라 발신자 번호로도 전화를 걸 수 있는 기능.02.우선순위 통화권리(우선권)를 갖는 상위권 통화자(상급자 또는 긴급을요하는 통화자)가 하위권 통화자(하급자 또는 등급이 낮은 통화내용)의 회선을 제어 또는 일방적으로 차단할 수 있는 기능.
3.우선권을 갖는 상위권가 하위권에 의해 불필요하게 호출되는 상황을 차단하기 위한 기능.
4.최우선권을 갖는 상위권통화자가 전국 어디서나 최대 50명까지 동시에호출, 음성회의(컨퍼런스 콜)을 할 수 있는 기능.
5.컨퍼런스콜 도중 특정인 하고만 통화가 필요할 경우 컨퍼런스 콜을 일시적으로 중단했다 재개할 수 있는 기능.
6.단축 다이얼기능
7.피호출자가 1대 이상의 전화를 가졌거나 다른 곳에 있을 경우 피호출자가 있을 가능성이 높은 곳부터 차례로 연결시켜 주는 기능.
사실 요즘 전자식 교환시스템 성능에 비교한다면 이같은 기능은 아무 것도아니었다. 그러나 당시로서는 하드웨어와 기술적 한계 등 여러가지 측면을고려할 때 최첨단이 아닐 수 없었다.「세종1호」의 개발과 제작은 바로 이같은 상황에서 하드웨어의 한계를 극복하기 위해 시작됐다.
주요 7가지 기능을 구현하기 위한 소프프트웨어가 자체환경에서 개발됐지만 아이러니컬 하게도 「노바 01」은 교환제어를 위한 시분할 처리기능을 지원하지 못했다.
따라서 데이터를 생성하는 중앙스위치 및 모뎀에 접속된 지방 스위치장치를 시분할 방식에 의해 리얼타임으로 제어해 주는 새로운 하드웨어 사양이요구됐고 「세종1호」는 바로 이같은 목적에 의해 개발됐던 것이다.
「세종1호」는 「노바 01」의 사양과 기능을 그대로 복제한 일종의 호환컴퓨터였다. 처리용량도 12KW(킬로워드)로서 표준 사양의 「노바 01」기종과같았고 명령코드와 주소로 구성되는 인스트럭션 구조도 같았다. 그러나 「세종1호」는 당시 미국 인텔사가 개발해서 화제가 된 1KB짜리 D램을 메모리로사용, 처리속도를 크게 개선시켰고 기능을 모방은 했지만 설계는 완전히 독자적인 것이었다.
「세종1호」는 마침내 2백40회선을 지원하는 중앙스위치 및 지역스위치장치 연결됐고 KIST측은 이 PABX 시스템을 「K1T-CCSS」라고명명했다. 모든개발 과정은 청와대 측과 약속한 73년 3월까지 끝을 맺었다.
청와대 측은 그러나 「K1T-CCSS」가 납품되는 시점에서 시스템의 신뢰성에의문점이 많다는 이유를 들어 KIST측과의 계약파기를 선언해 버렸다. KIST 측은 또 시스템은 납품하되 6천만원의 돈은 지불할 수 없으며 대신 기업을 통해 이 제품을 상품화할 수 있다는 「허가」만을 받아낸 것이다.
그러나 당시 국내업계는 기계식 교환기 생산에만 열을 올렸을 뿐 컴퓨터를이용한 첨단장비인 전자식교환시스템에는 전혀 관심을 보이지 않았다.
이 와중에 KIST의 하드웨어 및 소프트웨어 개발능력을 높이 산 미국의 GTE社가 「K1-CCSS」의 상품화를 결정하고 나섰다. GTE는 KIST 측에 50만 달러를 제공하면서 「KI-CCSS」의 상용화 개발 프로젝트를 새로 발주했던 것이다. 이 프로젝트에는 高健(현 서울대 교수), 金東圭(현 아주대 교수), 韓永哲(현 삼성전자 상무) 등이 소프트웨어 개발팀으로 참여했다.
이렇게 해서 75년 초에 개발된 것이 「KIST 500」이다. 「세종1호」가 일반에 알려지게 된 것도 사실은 KIST와 GTE의 공동프로젝트로 개발된「KIST 500」의 발표가 계기가 됐다.
GTE는 이 시스템과 「세종1호」 등을 대량 생산하기 위해 77년 2월 삼성그룹과 삼성GTE라는 합작회사를 설립하게 된다. 삼성GTE가 바로 89년 삼성전자에 흡수 합병된 삼성반도체통신이다.
삼성반도체통신은 「KIST 500」을 「GTK 500」 「센티넬500」 등으로 개량하면서 86년 교환기 4사에 의한 국산 전전자교환기 TDX-1개발의 밑거름을 제공했다. 「세종1호」 역시 80년대 중후반 삼성반도체통신이 국내 처음으로독자모델로 개발한 「SSM」시리즈 수퍼 마이크로 컴퓨터의 기술적 토대로 되었음은 물론이다.
한편 「세종1」의 개발 들떠 있던 국내업계는 그로부터 몇 달 뒤인 95년9월 동양전산기술(OCE)이 국내에서 처음으로 「오리콤」이라는 한글배치터미널을 개발, 생산에 나섰다는 소식에 접하게 된다. 「오리콤」은 DEC으로부터 중앙처리장치(CPU)인 「PDP 11_05」, 데이터프로덕츠사로부터드럼프린터 장치, 다큐메이션사로부터 카드판독기 등을 공급받아 조립한 것이었으며 여기에 당시 국내에 가장 많이 보급돼 있던 컨트롤데이터사(CDC)의 배치터미널 「200_UT」기능을 에뮬레이션해 주는 한글 소프트웨어를탑재한 것이었다. 이때 KIST 측에서 全州植(현 서울대 교수)등이 기술지원을 해주었다.
OCE는 76년부터 본격적으로 「오리콤」의 성공과 대량생산에 나서, 본격 공급에 나섰으나 가격경쟁력에서 다른 제품에 뒤져 큰 성공을 거두지못했다.
OCE의 노력은 비록 크게 빛을 보지는 못했지만 외국 부품들을 들여와조립생산 해본 다음 기술이 축적되면 자체 모델을 개발해 보겠다는 국산화 의지의 발로였다는 점에서 지금도 업계에서 높이 평가되고 있다.
<서현진기자>
작성일자 : 1996.03.25
서현진 기자 E-MAIL:jsuh@www.etnews.co.kr
컴퓨터 파노라마 (14) 적응기 (9) 한국IBM의 터잡기 차례로 돌아가기
70년대 과학기술처가 펴낸 컴퓨터산업 편람을 살펴보면 71년부터 75년 사이 우리나라 컴퓨터 보급대수는 미니급과 메인프레인급을 합쳐 모두 98대에이른다. 이 가운데 한국IBM이 공급한 대수는 41대나 된다.한 기업의 시장점유율이 40% 이상이었음을 알 수 있다.
더욱이 한국IBM이 공급한 기종은 「시스템(S)/360」과 「시스템(S)/370」등 대부분 메인프레임급이었다. 같은 기간 동안 디지탈이큅먼트(DEC), 데이터제너럴(DG), 왕래버러토리즈 등 미니컴퓨터 3총사가 30여대를 공급했는데도입가격으로 따지면 미니급에 비해 메인프레임급이 10∼1백배나 비쌌으니그야말로 한국IBM의 시대가 아닐 수 없었다.
IBM관계자들은 미국IBM이나 한국IBM 모두 이 시기가 기업적 사활에 매우중요한 분기점이었음을 강조하고 있다. 우선 60년대 말까지 몇 안되던 컴퓨터회사들이 70년대 초반 우후죽순으로 생겨나기 시작했고 컴퓨터 기종도 용도에 따라 다양하게 특화되는 시기였기 때문이다.
또 주된 컴퓨터 고객층인 기업에서는 세계적으로 생산성 향상이라는 일종의 기업재구축 운동이 활발하게 일고 있었다. 따라서 기업생력화나 인력 재배치 등과 관련, 컴퓨터 도입에 대한 관심이 그 어느 때보다 높았다.
기업의 이같은 움직임은 70년도부터 불어닥친 선진국들의 경기침체, 중동전쟁으로 야기된 원유가 폭등에 따른 자구책이었다. 기업은 이 자구책을 강구하기 위한 수단으로 컴퓨터 도입을 시도했던 것이다. 따라서 컴퓨터공급회사 입장에서 본다면 이 시기는 매우 중요할 수밖에 없었다.
IBM이 이같은 격동기를 기업중흥에 얼마나 유효적절하게 이용했는가는 여러가지 증빙 자료들이 많다. 73년 IBM본사의 매출은 벌써 1백억 달러, 직원은 25만명이 넘어서고 있었다. 한국IBM의 성장은 이보다 더 비약적이었다.
이 기간 동안 한국IBM의 자본금 추이를 보면 70년 2억7천3백만원에 불과하던 것이 75년에는 무려 7.6배가 증가한 20억8천만원에 이른다. 또 매출액은70년 1억8천만원이던 것이 75년에는 15배가 증가한 27억5천만원에 달하고 있다.(당시 쌀 1가마에 1만5천원).
한국IBM의 75년도 매출액 27억5천만원은 당시 우리나라 컴퓨터산업 총규모56억원(추정치, 당시 컴퓨터 관련업체 매출 합산치)의 50%를 넘어서고 있다.
이 기간 동안 한국IBM을 떠받치고 있던 컴퓨터 기종은 메인프레임급인 「S/360」 「S/370」과 「IBM 1130」등 3개 기종이었다.한국IBM의 시장점유율이40%가 넘었으니 이 3개 기종은 70년 중반까지 우리나라 컴퓨터 환경을 좌우했다고 해도 과언은 아닐 것이다.
이 가운데 「S/360」은 데이터의 연산과 기억장치에 논리회로를 사용하기시작한 제3세대 컴퓨터의 원조격으로 한국IBM에게는 컴퓨터 회사로서 영업적기틀을 마련해준 기종이다. 「S/360」은 특히 세계 최초로 고체논리회로 반도체를 사용했을 뿐 아니라 처음으로 표준 아키텍처 기술을 사용한 컴퓨터로기록되고 있다.
중심이 되는 표준 아키텍처를 기본으로 여러가지 다양한 변형 모델을 만들어 모델간 소프웨어 호환성을 강조한 「S/360」시리즈는 모두 13개모델이 발표됐다.
「S/360」은 68년 경제기획원 통계국에 처음 설치된 이후 락희(현LG화학), 한국전력, 연합철강, 대한항공 등을 포함 모두 10대가 국내 공급된 바 있다.
「S/360」 후속인 「S/370」시리즈는 71년말 첫 모델 「S/370-135」 발표이후 77년까지 7개 계열 14개 모델이 발표됐다.「S/370」은 단일체 집적회로(IC) 메모리 반도체를 채용한 3세대 제2기 컴퓨터로서 「S/360」과는 개념이나 성능 면에서 달랐다. 가상 기억장치 개념을 도입, 소프트웨어 개발자들이실제 기억장치보다 훨씬 큰 프로그램을 개발할 수 있도록 함으로써 물리적메모리 한계를 극복한 것도 이 기종의 특징이었다.
「S/370」은 72년 국방부를 필두로 75년 말까지 조선공사, 경제기획원, 금성사 등에 19대가 공급됐다. 「S/370」은 또 81년까지 10년 동안 한국IBM의주력 공급 기종으로 모두 59대가 팔려 나가는 대 기록을 세우기도 했다.
「IBM 1130」은 2세대 「IBM 1401」을 잇는 후속 중형급 컴퓨터로서 과학기술 계산에 강점을 갖고 있어 특히 미국의 거의 모든 대학들이 도입해서 사용했을 만큼 인기가 있었다. 국내에서도 69년 숭실대를 시작으로 서울대, 중앙대, 동국대, 고려대, 인하대 등에 보급됐다. 농업진흥공사, 대한항공, 호남정유 등도 이 기종을 도입, 사용한 적이 있는 것으로 기록돼 있다.
71년부터 75년까지 한국IBM의 역할이 돋보이고 있는 것은 이 기간 동안 이회사가 컴퓨터를 공급한 기관이나 기업의 면모를 보면 알 수 있다. 이 기간동안은 특히 유신정권이 탄생하고 기반을 닦는 시기였다는 점에서 정부정책은 정치적 안정과 경제부흥에 초점이 맞춰져 있었다. 기업과 기관의 컴퓨터도입 붐은 바로 이같은 흐름에 민감하게 얽혀 있었던 것이다.
우연의 일치라고 만은 할 수 없겠지만 이 기간 동안 한국IBM의 고객은 크게 군, 제조업, 교육기관 등 3분야로 대별되고 있다. 특히 군의 경우 69년의육군본부에 「S/360」을 공급한 것을 비롯, 72년과 73년 국방부와 공군본부에 잇따라 「S/370」을 공급했고 74년과 75년에는 해군본부에 각각 「S/3」과 「S/370」 등을 납품, 한국IBM은 3군과 국방부를 함께 휩쓰는 전무후무한실적을 올리도 했다.
교육기관은 주로 대학으로서 서울대와 고려대를 비롯, 전자계산학과 명문들인 숭실대, 동국대, 인하대, 중앙대 등이 포함돼 있다.
제조업은 이 시기에 정부의 부흥책이 집중되던 전자, 석유, 화학, 철강, 조선 등 분야로서 한국IBM은 연합철강, 호남정유, 대한조선공사, 현대중공업, 한국중공업, 금성사, 럭키, 경인에너지, 동아제약, 제일모직 등 당대에 최고로 잘 나가던 기업과 정부투자 기업들을 고객으로 확보했다.
3대 고객 분야 가운데 한국IBM이 가장 신경을 썼던 곳은 역시 군의 총본부인 국방부였다. 국내 처음으로 「S/370」을 도입한 국방부의 전산화는 정부기관 중에서는 경제기획원에 이어 2번째였지만 처리업무의 성격이나 그 파급효과를 따지면 프로젝트 규모는 엄청날 수밖에 없었다.
실제 국방부 전산화는 훗날 정부기관들의 견학장소로 빈번하게 이용됐을뿐 아니라 육해공군, 농수산부, 국민은행, 재무부, 내부무, 치안본부 등 다른 기관들의 컴퓨터 도입기종 결정에 많은 영향을 끼쳤다. 한국IBM으로서도국내에서 「S/370」시대를 여는 시금석이 됐다.
한국IBM은 당시 1백여명의 직원 전원이 모두 국방부 프로젝트에 매달리다시피 했고 개발자들은 프로그램 호환성 테스트를 위해 일본IBM을 수없이 오고갔다. 92년에 편찬된 한국IBM의 社史 「한국아이비엠 25년 발자취」에는당시의 급박한 상황이 다음과 같이 한 도막의 에피소드로 소개돼 있다.
『유재흥 국방부 장관(당시)과 각군 참모총장이 참석하게 돼 있는 72년 12월18일 국방부 전산화 개통식을 하루 앞둔 17일, 「S/370」의 CPU보드가 갑자기 고장을 일으켜 다운되는 사태가 발생하자 한국IBM의 라스무센 사장(당시, 미국인) 은 그날이 일요일이었음에도 불구하고 직접 일본IBM에 날아가해당부품을 구입, 교체함으로써...』
한편 「S/360」과 「S/370」이라는 연타석 홈런에 힘입은 한국IBM은 73년, 창업 6년 만에 처음으로 3천여만원의 흑자를 내는 기쁨을 누리게 된다. 이흑자기조를 기반으로 한국IBM은 73년12월 제4대 사장에 미국인이 아닌 한국인 직원 崔垠拓(68년 입사)을 처음으로 대표이사 사장에 내부 승진발령하게된다.
한국인을 대표이사로 선임한 것은 다국적 기업의 현지화 일환이었다고 볼수 있는데 이에 걸맞게 최은탁은 취임 첫해 8억8천만원에 불과하던 한국IBM의 매출액을 6년 만에 1백억원대로 끌어올렸다. 한국IBM은 또 당시 『현지국가사회에 대한 기여가 영업 못지않게 중요한 경영목표이며 이를 도외시한다국적기업은 살아남지 못한다』는 기업시민 정신을 발표, 화제를 모으기도했다.
이같은 기업시민 정신에 따라 한국IBM은 국내진출 외국 기업으로서는 처음으로 학술지원 사업을 펼쳤는데 그 내용은 국내 유수의 젊은 과학자를선발, 세계 최첨단 IBM왓슨연구소를 1년간 연수할 수 있는 기회를 제공하는 것이었다. 이 완슨연구소 연수프로그램 수혜자들을 보면 김길찰, 김성철, 좌경룡, 안광덕, 정원량, 김진형(이상 KAIST교수), 김성운(고대 교수), 이범천(큐닉스컴퓨터 회장), 이기준, 고건, 이석호, 최양희(이상 서울대 교수), 박승규(아주대 교수)등이다.
<서현진기자>
작성일자 : 1996.04.04
서현진 기자 E-MAIL:jsuh@www.etnews.co.kr
컴퓨터 파노라마 (15) 도약기 (1) 대학의 고급인력 양성 차례로 돌아가기
지금도 그렇지만 70년대 우리나라 컴퓨터산업 환경에서 가장 취약한 부문은 역시 고급 인력의 부족이었다.
한 연구조사에 따르면 75년말 우리나라 컴퓨터 설치대수는 1백22대로 여기에 필요한 기술 및 운영 요원은 6천2백여명이었으나 약 4천3백여명만이 확보돼 있어 인력 충원율은 70%를 밑돌고 있었다.(76과학기술편람)
과기처는 76년 연두 업무보고에서 컴퓨터 요원을 포함한 고급 기술요원의중장기 양성 계획을 대통령에게 보고하는 등 인력수급에 매우 고심하고 있었음을 알 수 있다. 70년 이후 정부의 장려로 기업 등에 컴퓨터 도입이 본격적으로 확대됐으나 시스템 운영이나 관리 요원 등의 확보에는 크게 관심을 두지 않았던 결과이기도 하다.
76년 당시 국내에 확보된 4천3백여명의 컴퓨터 기술 및 운영요원 분포를보면 석박사급과 최정예 전문기술관리 요원 50여명, 전공 및 관련 전공 학사급 2백여명 등 모두 2백50여명이 고급두되군을 형성하고 있었던 것으로 추정되고 있다.
석박사급은 미국과 일본에서 유학하고 돌아온 30여명과 국내에서 경영정보시스템 등을 전공한 국내파 20여명으로 구성돼 있었는데 주로 KIST등 연구용역기관에 포진하고 있었다.
2백여명의 학사급 고급두뇌로는 76년도를 전후해서 첫 졸업생을 내기 시작한 국내 5개 대학의 전자계산학과 출신 1백여명과 수학, 통계, 전자, 통신등 관련학과 전공 출신 1백여명 등이다. 학사급은 주로 정부기관, 기업체 전산실과 KIST 등 용역연구기관, IBM, 후지쓰, 한국스페리(현 유니시스), 컨트롤데이터코리아(CDK) 등 컴퓨터 공급회사 등에서 시스템엔지니어(SE)고객지원요원(CE), 전문 프로그래머 등으로 현업의 핵심부서에 배치돼 있었다.
고급요원을 제외한 4천여명 가운데는 KIST, 정부전자계산소(GCC)를 비롯, 서울컴퓨터센터, 한국전자계산 등 용역기관들이 소정의 단기 교육을 양성된요원들이 많았다. 또 한국 IBM, 한국스페리 등 컴퓨터 회사들이 컴퓨터 도입기관의 직원들을 재교육시켜 배출한 요원들도 부지기 수였다. 도입기관의 직원 재교육은 컴퓨터의 간단한 조작이나 감시인력의 확보를 위한 것이었다. 70년대 중반까지 컴퓨터를 가장 많이 판매했던 한국IBM의 경우 76년 말까지재교육 실적은 연인원 3천여명에 이르는 것으로 기록돼 있다.(한 사람이 여러 과정을 수강한 경우가 대부분 이었으므로 실제 숫자는 이보다 훨씬 적었음)
4천여명 요원 가운데는 또 1천5백여명 정도가 고졸 출신 카드천공요원(키펀처)이었을 것으로 추정되고 있다.(76년말 현재 국내 카드천공기 및 검공기도입실적은 1천2백여대에 이름)
단기간의 재교육과 재배치를 통해 양성된 인력이나 단순직인 키펀처들을기술 및 운영요원에 분류할 수 있었던 시대적 상황이 매우 흥미롭다. 하지만당시의 컴퓨터에 대한 사회적 가치관을 그대로 반영하고 있다는 점에서 또다른 의미가 있다고 할 수 있다.
사실 직원 재교육이나 키펀처의 양성은 그리 어려운 일이 못됐다. 또 마음만 먹으면 언제든지 인력 충원이 가능한 상황이었다. 더욱이 키펀처들은 75년을 기점으로 키펀치용역 수출업계가 사양세를 걸으면서 오히려 줄여 나가야 할 판이었다. 당시 정부의 고민은 바로 여기에 있었다.
76년말 시점에서 부족한 컴퓨터 기술 및 운영요원 1천9백여명의 대부분도기술관리요원, SE, CE, 프로그래머 등 장기간 교육에 의해서만 양성되는 고급인력일 터였다. 그런데 이같은 전문 인력부족 현상은 정부 차원의 근본적대책 마련 없이는 시간이 흐를수록 심화될 것이 분명한 상황이었다. 당시로서 4년제 정규대학 컴퓨터관련 학과 전공 전문인력 부족현상은 컴퓨터 도입확대와 정보화 시대를 앞두고 정부가 해결해야 줘야 할 최우선 과제의 하나이기도 했다.
76년 한해 우리나라에서 배출된 4년제 정규대학 전자계산학과 졸업생은 모두 1백1명이었다. 이해 첫 졸업생을 배출한 광운대, 중앙대, 동국대, 홍익대등 4개 대학과 3회째 졸업생을 낸 숭실대 등 5개 대학 5개 학과를 합친 숫자였다. 1백명 이상의 컴퓨터전공 학사가 배출된 것은 현실적인 고급인력 부족을 메꾸기에는 턱없이 부족한 것이었지만 유사 이래 처음 있는 일이었던데정부의 공급인력 양성 정책에 서광이 비치기 시작한 일대 경사가 아닐 수 없었다.
우리나라에서 처음으로 4년제 과정의 컴퓨터관련 학과가 설치된 것은 70년초 숭실대(당시 숭전대)였다는 것은 널리 알려진 사실이다. 숭실대는 70년 3월 金淇龍 교수를 통해 당시 미국 대학들이 채택하고 있는 이른바 「커리큘럼69」를 토대로 전자계산학과를 설치, 30여명의 신입생을 받아들였다. 그러나 숭실대 전자계산학과가 첫 신입생을 받아 들이는 시점인 70년초 컴퓨터도입의 급증으로 1개과 만으로는 기술인력 확보에 대한 예측이 불가능해진상황이 되고 말았다.
컴퓨터 도입을 심의하는 과기처의 전자계산조직개발조정위원회에 접수된자료대로라면 70년 이후 컴퓨터 도입은 연평균 25% 이상씩 기하급수로 증가할 전망이었다. 그러나 숭실대 전자계산학과가 74년에 배출하게 될 첫 졸업생은 군입대 등을 제외하면 많아야 20명 선이었다.
이같은 예측에 따라 과기처와 문교부는 신입생도 받기전 다른 대학들로 하여금 전자계산학과의 추가신설을 협의하게 된 것이다. 이 협의에 의해 72년3월 광운대(당시 광운공과대학), 중앙대, 동국대, 홍익대 등 4개 대학이 동시에 전자계산학과를 신설하게 됐던 것이다.
77학번 신입생을 선발하기 직전인 76년말 5개의 대학의 전자계산학과현황을 살펴보면 60년대말 도입기, 70년대 중반까지 적응기를 거쳐 비로소 도약기로 접어든 우리나라 컴퓨터 환경을 적나라하게 읽을 수 있어 흥미롭다.
과기처 자료에 따르면 74년도 숭실대 1회 졸업생 22명부터 76년도 5개대학1회 졸업생을 모두 포함한 4년제 전자계산학과 출신 전문 졸업생은 1백55명인 것으로 나타나 있다. 재미있는 것은 76년 현재 졸업생 1백55명 가운데 군입대를 포함한 취업률이 83.2%(1백29명)에 이르러 당시 4년제 일반학과의 졸업생 평균 취업률 70%대를 상회하고 있었다는 사실이다.
기관별 취업 현황을 보면 정부기관(25), 금융기관(9), 컴퓨터회사(10), 연구소(5), 기업체(26), 교육기관(12), 대학원 진학(9), 군입대(33)등이었다.
나머지 미취업자 26명은 결혼(여학생)이나 타직종 취업 등으로 기록돼 있다.
당시 전자계산학과 재학생 및 졸업생들로부터 인긱 높았던 취직 기관으로는KIST, 한국은행, 5개 대학부설 전자계산소, 포항제철, 육군전산소, 한국IBM, 쌍용, 파콤코리아(현 한국후지쓰), 서울시청, 경제기획원 통계국 등이었던것으로 전해지고 있다.
각 대학의 4개년 학과 과정은 앞서 언급한 미국의 「커리큘럼xx」을 따른것이었는데 1학년은 교양과목 위주였고 2학년은 코볼과 포트란 등 프로그램언어, 계산기 실습, 어셈블리어, 회로이론, 선형대수 등, 3학년은 수치해석, 데이터 구조, 계산기 구조, 운용체제(OS), 계산기실습, 확률과 통계, 계산기언어론, 계산기 회로, 회로망 등, 4학년은 경영정보시스템(MIS), PL/1, 시뮬레이션, 아날로그/하이브리드, 운용과학(OR), 정보이론 등이다. 현재의 전자계산학과 과정과 비교해서 내용상으론 달라졌겠지만 과목상으로는 크게 변화된 것은 없다.
당시 대학 교수진들로는 광운대의 경우 주임교수였던 沈在洪을 필두로 李圭鎔, 金慶泰 등이 포진하고 있었고 중앙대에는 주임교수 李京煥을 비롯 金永燦 등이, 홍익대에는 70년 숭실대 전자계산학과 창설 주역이던 金淇龍을위시하여 주임교수 朴長春, 元裕鉉 등이 있었다. 또 동국대에는 주임교수 安思明을 비롯 洪永植, 朴忠吉, 丁奎連 등이, 숭실대에는 주임교수 李哲熙를위시하여 宋厚奉, 辛洪哲과 미국인 프린스 등이 재직하고 있었다.
학생들의 실습은 부설 전자계산소가 큰 역할을 수행했다. 당시 각대학의전자계산소들은 학사와 및 행정업무 처리에 지장이 없는 선에서 학생들이 실습할 수 있도록 문을 개방해 놓고 있었다.
5개 대학 전자계산소들이 보유하고 있던 장비들 가운데는 컨트롤데이터의「CDC 3100」 을 보유하고 있던 홍익대, 후지쓰의 「파콤230-15」를 보유하고 있던 광운대가 용량면에서 다른 대학들을 앞섰다. 중앙대, 동국대, 숭실대가 보유하고 있던 기종은 IBM의 「IBM 1130」이었다. 그러나 이들 5개 대학 전자계산소가 보유하고 있던 기종들은 세대 구분상으로 본다면 60년대 초반에 나온 2세대 중형급 컴퓨터들이었다.
기업이나 기관들에서는 이미 70년대 초반부터 IBM의 「시스템/360」과 「시스템/370」을 비롯 컨트롤데이터의 「사이버72」 등 대형에서 초대형급 3세대 기종 도입이 한창이었다는 사실을 감안하면 대학의 컴퓨터 시설은 당시로서도 상당히 낙후된 상황이었던 셈이다.
한편 4년제 대학의 전자계산학과 신설은 79년까지 서울대, 고려대, 연세대등이 가세 15개교로 늘었고 이때 입학한 학생들이 졸업하는 해인 83년에는졸업생 규모가 6백명 선을 넘게 된다.
<서현진기자>
작성일자 : 1996.04.11
서현진 기자 E-MAIL:jsuh@www.etnews.co.kr
컴퓨터 파노라마 (16) 도약기 (2) 상공부 정책의지와 전자기술연 출범 차례로 돌아가기
적극적이었던 것은 아니지만 상공부가 우리나라 컴퓨터산업 육성에 처음으로 직접적인 의지를 보인 것은 69년 1월 전자공업진흥법이 제정되면서 부터이다.
사실 상공부는 67년 개원한 과학기술처가 처음부터 컴퓨터를 포함한 정보산업 정책을 일괄하는 바람에 한동안 끼어들 여지가 없었다. 물론 상공부의컴퓨터산업에 대한 본격 개입은 전자공업진흥법이 시대와 상황논리에 맞게개정되고 처음으로 정보기기과라는 독립기구가 증편된 81년부터라고 할 수있다.
그러나 이미 69년의 전자공업진흥법 제정 때부터 상공부는 컴퓨터산업 정책을 직접 수행하고자 하는 의지만은 분명하게 나타내 보이고 있다. 전자공업진흥법은 실제 70년대 중반 이후 국내 전자공업계에 컴퓨터 하드웨어 국산화라는 거센 열풍을 몰아오는 실질적 계기와 분위기 조성 역할을 했다.
이런 역할은 81년 법개정시 『전자공업의 발전이 앞으로는 컴퓨터 등을 중심으로 이루어져야 한다』는 여론을 몰아왔고 이어서 「전자계산조직(컴퓨터일반)을 전자공업의 범위안에 포함한다」는 것을 법조문에 명확하게 하는 성과로 이어졌다. 상공부가 국내 정보산업 정책 주도권 경쟁의 전면에 나설 수있도록 해 줬던 셈이다.
전자공업진흥법은 사실 전자산업을 통해 경제부흥을 꾀하자는 정부 의지가강하게 담겨 있었다. 정부는 당시 59년 금성사가 진공관식 라디오를 조립 생산한 이후 싹이 보이기 시작한 우리나라 전자공업에 획기적 전환기를 마련하기 위헤 이 법을 제정한다고 그 배경을 발표하기도 했다.
전문 16조와 부칙으로 된 전자공업진흥법에 의해 같은 해인 69년 탄생된것이 바로 「전자공업진흥 8개년 계획」이라는 중장기 전자제품 개발 계획이다. 상공부가 마련한 이 계획은 69년부터 71년까지 1단계, 72년부터 76년까지 2단계로 나눠져 있었다. 그러나 이 계획이 상공부로 하여금 80년에서 90년대 초반까지 국내 정보산업을 주도할 수 있는 단초가 되리라는 것을 당시로서는 누구도 상상하지 못했다.
그도 그럴 것이 8개년 계획 가운데 1단계에서는 기본전자부품(컨덴서 등 17개 품목), 반도체(집적회로 등 10개 품목), 민생용 전자기기(TV 등 9개 품목), 산업용전자기기(특수전화기 등 10개 품목), 전기측정기기(오실로스코프등 9개 품목), 전자재료(세라믹소재 등 7개 품목)등 7개 분야 62개 품목의개발과제들만 포함돼 있었다.
2단계에서는 1단계 7개 분야에서 제외된 전자복사기 등 27개 품목과 신규로 전자계산기와 군사용 전자기기 등 2개 분야 6개 품목이 세로 추가된다.
눈여겨 볼 대목은 바로 2단계에서 추가된 전자계산기 분야인데 여기에는 탁상용 전자계산기, 중형전자계산기, 카드천공기(PCS), 자동 프로그램공작기(수치제어공작기), 세밀절단기 등이 포함돼 있음을 볼 수 있다.
상공부는 「전자공업진흥 8개년 계획」의 2단계에서 전자산업 개발 체제의확립을 위한 기본 목표를 제조기술의 연구개발, 양산체제의 확립, 생산의 합리화 등 3가지로 정하고 있었다. 이 가운데 상공부는 특히 제조기술의 연구개발 부문을 산학연의 연결고리로 삼는다는 방침 아래 8개년 계획이 마무리될 즈음인 76년 12월 30일 국내 최초의 컴퓨터와 반도체 전문 출연연구소를출범시키는데 이것이 바로 오늘날 한국전자통신연구소(ETRI)의 전신 한국전자기술연구소(KIET)다.
76년 12월 6일 발표된 정부 계획에 따르면 한국전자기술연구소의 설립은정부출연 41억원, 민간출연 10억원, IBRD차관 1천1백만 달러 등 모두 1백6억원의 거금이 투입되는 대규모 사업이었다. 또 제4차 경제개발5개년 계획에이 연구소 출범일정이 포함돼 있었던 터라 당시 경제정책 최고 기구였던 무역진흥확대회의를 통해 대통령에 그 전모가 보고됐을 만큼 비중이 컸었다.
구체적 게획에는 구미공업단지에 부지 3만평을 매입해서 78년 6월까지 컴퓨터 및 반도체 전문 대단위 기술연구용 단지를 건설한다는 것도 포함 돼 있었다.
연구소의 주요 사업은 전자계산기 부문에서 상용제품 제작 및 국산화추진, 관련공장의 운영, 기술훈련, 기술지원 등이었고 반도체 부문에서는 반도체의 설계, 제조, 공정 및 양산 기술의 국산화 추진 등이었다.
출범과 함께 한국전자기술연구소 초대 이사장에는 한국전자공업진흥회장이던 朴勝璨(당시 금성사 대표이사, 작고)이 임명됐다. 이는 한국전자공업회장이 당연직으로 한국전자기술연구소 이사장을 겸한한다는 규정에 따른 것이었다.초대 연구소장은 KIST소장을 역임한 바 있는 韓相準(현 한양대명예총장)이 내정됐다.
한국전자기술연구소 기본 운영 방침은 그동안 과기처 산하 한국과학기술연구소(KIST)의 컴퓨터국산화연구실을 중심으로 진행돼온 컴퓨터와 반도체부문의 연구개발 활동을 한곳에 집중시킨다는 것이었다. 즉 KIST 컴퓨터국산화연구실을 정부 출연기관으로 전환시켜 상공부 통제하에 놓는 것이었다. 결과적으로 한국전자기술연구소의 출범은 상공부가 우리나라 정보산업정책 결정의전면에 나설 수 있는 디딤돌을 마련해준 셈이다.
76년말 출범한 한국전자기술연구소는 실제 79년 구미 연구단지가 완공될때까지 서울 사당동과 역삼동 임시 사무실을 전전하면서도 16비트 및 32비트초소형(마이크로)컴퓨터에 대한 유닉스 운영체제 이식기술, 8비트 및 16비트마이크로컴퓨터 개발에 착수하는 등 좋은 출발을 보이고 있었다. 한국전자기술연구소는 특히 컴퓨터하드웨어(탁상용 전자계산기 또는 중형 전자계산기)국산화에 대단한 의지와 열의를 보였다. 당시 국내 전자산업 성장률은 매년고무줄 늘어나듯 신장되고 있었는데 예컨대 주력 수출 품목이던 흑백TV는 69년 이래 연 평균
컴퓨터 하드웨어의 국산화 추진 분위기는 바로 흑백TV의 신화를 재장조하자는 것에서 출발하고 있었다. 당시 한국전자기술연구소에서 컴퓨터 국산화를 사실상 진두지휘한 이가 바로 李龍兌(현 삼보컴퓨터 회장)이다.
70년 미국에서 귀국한 李龍兌는 76년 KIST 컴퓨터국산화 연구실장으로 재직하다 78년부터 한국전자기술연구소 부소장을 역임하기도 한다. 그가 이연구소에서 개발한 것이 국내 최초의 마이크로컴퓨터 「HAN-8」이다. 李龍兌는당시 한국전자기술연구소의 출범 배경과 컴퓨터 국산화 상황과 관련, 한 인터뷰에서 다음과 같이 밝히고 있다.
『우리나라 전자공업은 연간 40∼50%씩 성장하고 있습니다. 이런 추세라면80년대에는 영국을 앞질러 세계5위에 들어야 한다고...중략...그렇게 하려면전자공업이 선진화돼야 하고 따라서 컴퓨터와 반도체를 만들어야 하는데 아직 민간회사에서는 여건이 미성숙...중략...그래서 정부 차원에서 민간회사에 어떻게 도움을 줄거냐 하는 것을 생각하게 된 것입니다...예컨대 생산준비, 실험준비, 개발시설을 완비하고 필요한 기술인력을 모두 준비해 놓으면민간회사에서 초기 투자없이 컴퓨터산업에 막바로 뛰어들 수 있지 않은가...
중략...바로 그 역할을 한국전자기술연구소가 하려는 것이었습니다.』(경영과컴퓨터 81년7월호)
이어 그는 「HAN-8」의 개발에 대해서도 다음과 같이 밝히고 있어 당시 상공부의 입장이 무엇이었는가를 대변해주고 있다.
『「HAN-8」은 16비트인 「HAN-16」을 위한 준비단계 작품이었습니다. 미국에서는 이미 78년경 8비트 마이크로컴퓨터가 이미 시장에 나왔고 82년경에는 16비트, 86년경에는 32비트제품이 완성될 것으로 보입니다. 우리의 당면목표는 16비트 제품을 선진국과 동시에 세계시장에 내놓는 것입니다.』(경영과컴퓨터 81년7월호)
사실 상공부가 KIST 컴퓨터국산화연구실을 한국전자기술연구소로 개편하려했던 것은 당시 컴퓨터 국산화와 생산에 매우 적극적이던 업계 분위기가 한몫을 거들었던 것으로 보인다. 삼성전자, 금성전기, 동양전산기술(현 두산정보통신 전신), 고려시스템산업(92년 폐업) 등이 대표적인 기업들이었다.
이들 가운데 삼성전자는 미국 휴렛팩커드와 제휴하여 OEM방식의 미니 컴퓨터생산을 추진하고 있었고 금성전기는 일본 NEC의 미니컴퓨터 생산을 계획하고 있던 중이었다. 또 동양전산은 이미 75년경부터 미국 DEC와 합작생산 체제에 돌입해 있었고 고려시스템, 금호실업, 금성통신, 쌍용양회, 선경 등도외국회사와 기술제휴선을 찾고 있던 중이었다.
한편 한국전자기술연구소 출범과 때를 같이하여 또 하나의 연구소가 설립되는데 바로 과기처 산하의 KIST 부설 한국전자통신연구소였다. 이 연구소는77년에 한국통신기술연구소로, 다시 81년에 한국전기통신연구소로 2번에 걸쳐 명칭을 변경하며 우리나라 통신기술 개발지원을 담당하게 된다.
한국전자기술연구소와 한국전기통신연구소 외에 비슷한 기관으로 KIST 전산개발센터라는 곳이 하나 더 있었다. 과거 KIST 전자계산소가 확대 개편된전산개발센터는 비록 KIST의 부설 용역기관이었지만 연구개발 성격도 강해당시 척박했던 우리나라 소프트웨어 개발지원 부문을 사실상 책임지고 있었다.
이를테면 70년대 중반 이후 우리나라 정보산업 영역은 컴퓨터 하드웨어, 소프트웨어, 통신 등 3대 분야로 짜여져 있었고 각 분야 마다에는 개발지원을 담당하는 연구소가 하나씩 있었던 셈이다. 결국 이시기의 움직임을 해당정부 부처의 역할로 풀이해 본다면 과기처는 상공부에 일정 부분 역할을 자의반타의반으로 넘겨준 것이고 상공부는 「전자공업 입국」 또는 「수출 지상주의」에 정보산업을 포함시켜보려는 강한 의지를 보인 것이라 하겠다.
<서현진기자>
작성일자 : 1996.04.18
서현진 기자 E-MAIL:jsuh@www.etnews.co.kr
컴퓨터 파노라마 (17) 도약기 (3) 후지쯔의 한국진출과 포항제철의 전산화 차례로 돌아가기
국내 컴퓨터역사에서 일본계 기업의 첫 진출기록은 후지쯔가 갖고 있다. 74년 2월 후지쯔는 서울 종로 소재 합통통신회관 빌딩(현 국세청)에 1백%(1억9천8백만원) 단독 출자한 현지법인 화콤코리아(현 한국후지쯔)를 설립한다.
화콤코리아의 출범은 이어 히다치와 일본전기(NEC)의 한국 진출을 불렀다.
더욱 의미있는 것은 IBM, 스페리랜드, 컨트롤데이터(CDC), 디지탈이큅먼트(DEC) 등 미국계가 휩쓸던 당시 국내 컴퓨터업계에 후지쯔 중심의 일본계 견제세력이 형성되는 계기를 마련해 줬다는 점이다. 또 당시 단순 키펀치용역에머물던 국내 소프트웨어 개발 수준을 운용체제(OS) 수준까지 끌어올리는 계기도 제공했다. 실제 출범 3년 만인 77년 화콤코리아는 무려 55만 달러어치의 OS를 개발, 일본에 수출하게 된다.
화콤코리아가 출범한 74년은 우리나라 컴퓨터역사가 도입기와 적응기 등시행착오 과정을 거쳐 이제 막 도약기로 접어드는 시점이다. 이미 60년대 말진출한 IBM, CDC, 스페리랜드와 달리 70년대 중반에서야 비로소 한국 진출을하게 된 배경에는 여러가지 비화가 있다. 화콤코리아가 당시 우리 정부의 외자도입법에 크게 제약을 받지 않고 출범하게 되는 과정이 그 가운데 하나이다.
화콤코리아를 출범시키기 전까지 후지쯔는 한국내 영업을 일본본사가 직접챙겼다.
후지쯔는 67년에 국내에 「파콤222」기종을 첫 판매한 이후 화콤코리아를출범시킬 때까지 11대의 컴퓨터를 한국에 공급했거나 계약한 상태였는데 모두 일본 본사의 직접 영업에 의한 것이었다. 이는 이미 7년 전에 현지법인을출범시킨 IBM의 22대에 이어 2위에 해당하는 실적이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후지쯔가 한국 진출을 미룬 것은 일본 본사 자체가 컴퓨터 사업을 시작한 지얼마되지 않아 현지법인 출자 여력이 없었던 데다 한국내 컴퓨터 마인드도신통하지 않다고 판단했기 때문이다. 더욱이 판매된 11대 가운데 한양대에공급된 「파콤230-10」 등 7대 이상이 이른바 대일청구권 자금에 의해 들여온 것이었다. 후지쯔 입장에서 보면 특별한 판촉활동 없이도 한국에서의 영업실적이 좋았다는 얘기다.
실제 후지쯔가 한국에 직판했던 11대 가운데 정부부처 및 공공기관 5대, 육사를 포함한 대학 5대, 포항제철 1대 등으로 민간기업은 하나도 없다. 그런데 여기서 눈여겨 볼 대목은 후지쯔가 포항제철을 고객으로 확보했다는 점이다. 포항제철은 화콤코리아가 출범하기 7개월 전인 73년7월에 공급계약을체결하고 출범 후인 74년 4월 「파콤230-25」기종이 설치된 곳이다.
94년 펴낸 한국후지쯔 사사 「한국후지쯔20년사」에는 『화콤코리아 설립을 위한 중요한 분수령은 73년 포항제철 전산설비의 수주 성공이었다』고 적고 있다. 초창기 화콤코리아에 재직했던 Q씨는 『포항제철을 고객으로 확보하지 못했다면 후지쯔의 한국진출은 최소한 80년대 이후로 연기됐을 것』이라고 들려주고 있다.
그도 그럴 것이 후지쯔는 73년 초부터 국내 컴퓨터업계의 이목을 집중시켰던 포항제철 전산화프로젝트 수주전에서 IBM, CDC, 스페리랜드(유니백) 등미국계 빅3와의 치열한 경쟁 끝에 당시 포항제철 사장 박태준의 최종 낙점을받는데 성공한다. 객관적 상황으로는 후지쯔가 낙점받을 이유가 거의 없었다. 빅3는 모두 60년대 말에 한국에 현지법인을 설립, 본격적인 영업망 및사후지원 체계를 갖추고 있었고 기종의 지명도에서도 후지쯔 「파콤」을 앞서고 있었기 떠문이다.
포항제철을 고객으로 확보하는데 성공한 후지쯔는 한달 만인 73년 8월 경제기획원에 외국인 투자인가 신청서를 제출, 현지법인 설립작업에 나서게 된다. 기종결정 후 곧 바로 투자인가 신청서를 낸 것은 67년 IBM이 국내 진출할 때와 비숫한 상황이 벌어졌음을 상기시켜줄 수 있는 대목이다. 당시 IBM은 경제기획원에 「IBM 1401」을 공급하면서 현지법인 한국IBM을 설립, 사후지원을 책임진다는 약속을 한 바 있다.
물론 포항제철 입장에서도 「파콤」을 택한 분명한 이유는 있었다. 70년대초반을 전후한 포항제철의 움직임을 살펴보자.
70년 부터 73년 7월까지 이어진 포항제철의 제1기 설비공사에서 일본통으로 알려진 박태준은 모든 모델을 세계 제1의 제철소인 신일본제철소에서 찾았다. 박태준은 또 담당자들에세 2기, 3기, 4기 설비공사와 밀접한 관계가있는 일관공정체계의 전산화 모델 역시 신일본제철소의 사례를 따르라고 지시했다.
그런데 신일본제철소가 도입한 전산시스템은 바로 후지쯔의 「파콤」기종이었다. 이 때문에 후지쯔는 신일본제철소 전산화 경험을 토대로 포항제철의공장설비 설계 과정에 개입함으로써 어느 정도 영행력을 갖고 있었던 것으로전해지고 있다. 또 포항제철 설립과정을 자문, 73년 우리 정부로부터 은탑산업훈장을 받았던 아카자와(赤澤璋一)씨가 기종 결정 당시 후지쯔 본사의 전무로 재직중이었다. 물론 이런 것들이 포항제철의 기종결정과 후지쯔의 현지법인 설립에 계기가 됐다는 구체적 증거는 없다.
73년 8월 경제기획원에 외국인 투자인가 신청서를 제출했던 후지쯔가 화콤코리아의 설립인가를 받아낸 것은 이로부터 5개월 만인 74년 1월이다. 신청서 제출로부터 인가가 날 때까지의 소요기간은 당시 상황으로 볼 때 약간 긴편에 속했다. 상황이 다르긴 했지만 IBM이나 CDC의 경우 2~3개월 가량이 소요됐다는 전력이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시일이 많이 소요되긴 했지만 결과적으로 후지쯔는 법적으로는 화콤코리아의 출범이 불가능했던 것을 가능하게만들었다.
화콤코리아의 출범인가가 늦어진 것은 후지쯔가 제출한 투자인가 신청서가우리 정부의 외자도입법에 배치되는 내용으로 돼 있었기 때문이었다.
외자법은 경제개발 5개년 계획에 따라 60년대 후반, 외국인 투자를 적극유치하기 위해 제정됐다가 72년 이후 일본기업들의 진출이 급증하자 73년 3월 개정에 이르게 된다. 이때 개정된 외자법은 외국인 투자 대상을 선별할수 있도록 하고 외국인 출자비율도 50%를 넘지 못하도록 규정해 놓고 있었다. 즉 합작법인 형태만 투자를 인가해 주도록 한 것이다.
그러나 후지쯔는 처음부터 이 법을 어길 요량이었던지 한국측 합작파트너를 확보하지 못한 채 신청서를 접수시켰다. 대신 『「파콤」용 OS를 개발, 제조, 수출하고 기술을 한국에 이전 한다』라는 것을 골자로 하는, 당시로서는 파격적 투자사업 내용을 제안했다.
우리 정부가 이같은 단독출자 신청을 받아들인 것은 외자법상의 분명한 「예외조치」 였다. 「한국후지쯔20년사」에서는 당시 이같은 예외조치의 수용을 위해 일본 후지쯔 관계자들이 재무부, 상공부, 문교부, 과기처 등 관련부처를 직접 방문, 「양해」를 얻어 마침내 74년 1월 경제기획원으로부터 조건부 투자인가를 얻어냈다고 적고 있다.
당시 경제기획원의 화콤코리아에 대한 투자인가는 「파콤」용 OS를 개발해서 전량 후지쯔로 수출할 것과 회사 설립후 3년 이내에 30%, 5년 이내 50%의주식 또는 지분을 한국인에 양도한다는 조건부였다. 그러나 화콤코리아는 이후 여러번의 자본금 증자 과정이 있었지만 조건부를 이행하지 않았고 한국후지쯔로 개명한 현재까지도 지켜지지 않고 있다.
화콤코리아의 초창기 멤버 가운데 황칠봉(효성데이터시스템 사장), 김용대(선경정보시스템 전무), 이의일(세중컴퓨터시스템즈 사장), 송재형(타스크포스시스템 사장)등이 아직도 현직에서 활동중이다.
한편 화콤코리아를 출범시킨 후 후지쯔는 한국에서 미국계 기업들 못지않은 왕성한 사업을 벌이게 된다. 사업 부문은 크게 「파콤」시리즈의 영업(하드웨어 임대)과 투자인가서 상에 명기했던 OS개발 및 수출 등 두 갈래로나누어져 있었다.
「파콤」영업의 경우 출범 당시 국내 공급실적이 11대였던 것이 2년 만인76년에 26대에 이르는 등 큰 폭의 신장세를 보였다. 이같은 신장세는 특히당시 김대중 납치사건과 육영수 여사 저격사건 등 한일관계가 최악으로 치달은 상황에서 이루어졌다는 점에서 각종 후일담이 적지않게 전해지고 있다.
이 기간 동안 화콤코리아에 주재했던 한 일본인 직원은 『외출시 일본어를사용하지 말 것, 넥타이 차림의 정장을 하지 말 것』 등을 지시받은 기억이난다고 「한국후지쯔20년사』에서 회고하고 있을 정도다.
화콤코리아의 당시 주력 기종은 「파콤 230」모델로서 IBM의 대형시스템「시스템/360」에 대응하는 x5시리즈와 「시스템/370」에 대응하는 x8시리즈였다. x5시리즈란 이를테면 「파콤230-25」, 「파콤230-35」, x8시리즈는 「파콤230-58」, 「파콤230-48」 하는 식의 명칭이었다.
화콤코리아는 첫 고객으로 포항제철이라는 대어를 낚은데 이어 75년에는 IBM의 「시스템/360」을 사용하던 한국전력을 「파콤230-45S」로 리플레이스(Replace:기종대체 또는 타기종으로 업그레이드)시키는 혁혁한 성과를 올리기도 한다.
OS개발과 수출사업부문 역시 출범 이듬해인 75년부터 곧바로 흑자로 돌아설 만큼 호조를 보였다. 주요 개발분야는 핵심부분인 작업관리(Job Mamagement)를 비롯, 컴파일러, 어셈블러번역기, 분류/병합(Sort/Merge)프로그램과프로그램 동작상태를 추적하는 대화형 디버거(Interactive Debuger), 각종시스템유틸리티 등 OS를 구성하는 것들로서 고난도의 기술을 요하는 것들이었다.
이렇게 개발된 OS는 모두 일본 후지쯔에 수출됐는데 출범 첫해 14만 달러이던 것이 75년에는 39만 달러, 76년에는 55만 달러, 77년 76만 달러 등으로급상승했다. 당시 키펀치용역 중심에 국내 소프트웨어 총수출액은 75년에 75만 달러, 76년 77만에 불과했다. 화콤코리아 1개사의 수출액이 절반을 차지하고 있었던 셈이다.
<서현진 기자>
작성일자 : 1996.04.25
서현진 기자 E-MAIL:jsuh@www.etnews.co.kr
컴퓨터 파노라마 (18) 도약기 (4) 삼성전자와 휴렛패커드 차례로 돌아가기
대기업들이 국내 컴퓨터 산업분야 진출을 적극적으로 검토하기 시작한 시기는 76년부터이다. 당시는 국내에 컴퓨터가 도입된 지 10년째로 접어드는시기였다. 이때 국내 컴퓨터산업을 이끌었던 3대 축은 한국IBM 등 외국계 현지법인, 동양전산기술(OCE) 등 외국컴퓨터기종 국내 대리점, 한국전자계산(KCC) 등 소프트웨어 용역개발회사였다.
이 당시 삼성전자, 금성사, 대한전선과 같은 전자산업 분야 대기업들의 사업영역은 흑백TV, 냉장고, 전자레인지 등 정부가 수출을 주도하고 장려하는가전 분야에 집중돼 있었다. 대기업들이 조기에 컴퓨터 분야에 눈을 돌리지않았던 것은 관련 기술이나 노하우 축적이 전무했던 데다 사업전망에 대해서도 대부분 비관적 시각이 앞섰기 때문이다. 따라서 정책결정이나 투자에 대한 우선 순위에서도 컴퓨터는 항상 가전 등 다른 분야에 밀렸다.
그러나 75년을 전후하여 국내 컴퓨터 도입이 급증세를 보이고 동양전산기술과 같은 중소기업이 미니컴퓨터 단말기 등을 국산화하면서 대기업들의 시각이 달라지기 시작했다. 대기업들은 무엇보다도 전자산업이 고도화돼 가면서 전자 제품의 용도가 가정에서 산업 현장으로 확대돼가고 있음을 보았던것이다. 산업용 전자가 바로 컴퓨터인데 이때 부터 대기업들은 부랴부랴 시장진출을 검토하고 제품 공급선의 확보하거나 직접 생산방법 등을 찾아 나서게 된다.
76년을 전후해서 이같은 움직임을 보였던 곳으로는 삼성전자, 금성사, 금성전기, 금호실업, 대우, 금성통신, 동양정밀(OPC), 벽산, 쌍용양회, 두산등이었다. 이들의 컴퓨터 분야 진출에 대한 검토는 2가지 형태로 나타났는데하나는 미국과 일본 컴퓨터기업과 제휴, 국내에서 합작 생산을 추진하는 것이고 또 하는 외국기업의 대리점 사업을 통해 우선 노하우부터 축적해 보겠다는 것이었다.
전자의 경우 금성전기와 선경이 일본전기(NEC)의 미니컴퓨터기종 조립생산검토에 나섰고 대한전선은 후지쯔의 「파콤」시리즈 생산을 추진했다.금성통신과 동양정밀은 합작회사인 한국시스템산업을 설립하고 외국의 기술제휴선을 찾아 나설 정도였다.
또 후자 입장에서 외국업체의 국내 총대리점 사업에 나선 곳은 삼성전자(휴렛패커드), 금호실업(왕래버러토리즈), 오리콤(디지탈이큅먼트), OPC(데이터제너럴), 한국화약(포 페이스), 효성(히다치) 등을 꼽을 수 있다. 금성사는 79년 맨 마지막으로 하니웰사 제품을 국내 공급하면서 컴퓨터사업 참여를 선언하고 나섰다.
이들 기업 가운데 오늘날까지 컴퓨터 사업을 꾸준하게 이끌어 온 곳은 금성사와 삼성전자 뿐이다. 나머지 기업들은 모두 도산했거나 사업담당부서가다른 기업으로 인수된 경우에 해당된다. 국내에서 가장 잘 나가던 컴퓨터기종 가운데 하나인 디지탈이큅먼트(DEC)를 공급하던 오리콤의 경우 나중에 두산컴퓨터를 설립하는 등 승승장구하지만 80년대 DEC이 현지법인을 설립하자회사조직이 공중분해 돼버렸다. 금호실업은 컴퓨터코리아라는 기업에 사업자체를 넘겼고 동양정밀은 동양시스템산업이라는 계열사를 통해 투자의욕을 보여지만 80년대말 그룹 전체가 부도를 내면서 운명을 달리했다. 금성전기와금성통신은 금성사로 조직이 이관됐다.
물론 엄밀하게 따진다면 삼성전자와 금성사의 컴퓨터사업 부문에 대한 계보도 정통성을 갖고 있는 것은 아니다. 이를테면 삼성전자의 휴렛팩커드(HP)사업부문은 84년 삼성휴렛팩커드로 독립돼 나갔고 금성사의 하니웰사업 부분역시 81년 하니웰본사와의 공동 기술제휴 계약에 의해 계열사인 금성반도체로 이관되는 과정을 거쳤던 것이다. 따라서 오늘날 국내 컴퓨터 산업을 이끄는 양대 축으로 성장한 양사의 컴퓨터사업 부문은 적어도 계보상으로는 HP나하니웰과 무관하다고 볼 수 있다. 그러나 양사의 오늘날 위치가 HP와 하니웰의 국내공급 또는 합작생산 과정에서 축적된 노하우에 기반하고 있음은 누구도 부인할 수 없는 엄연한 사실인 것이다.
삼성전자와 금성사 등 두 별 가운데 컴퓨터사업을 먼저 시작한 삼성전자쪽이다.
70년대 초반 가전 분야에 이은 컴퓨터 분야에서의 별들의 전쟁은 76년 10월 HP와 대리점계약을 체결한 삼성전자의 선공으로 시작됐다. 삼성전자의 선공에 대한 금성사의 응수는 78년 8월 컴퓨터사업부를 신설하고 미국의 하니웰사의 대리점 사업을 시작하는 것으로 이어졌다. 양사 모두 세계적으로 선풍을 몰고온 벤처기업 출신의 미국 컴퓨터회사 제품을 국내 들여와 공급하는총판영업으로 국내 컴퓨터시장에 뛰어든 것이다.
하지만 이때의 제1라운드 별들의 전쟁은 에상 외로 싱겁게 끝났다. 사실금성사보다 2년 먼저 사업을 시작한 삼성전자의 승리는 이미 예고된 거나 다름 없었다. 금성사 입장에서도 80년대를 기대하는 선에서 1라운드 게임을 매듭을 지을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76년부터 79년말까지 삼성전자가 국내에 공급 HP 주력 「HP 3000」 미니컴퓨터 기종은 무려 50대가 넘는다. 이같은 실적은 미니컴퓨터 분야에서 HP보다 4∼5년 먼저 국내 진출한 DEC, 데이터제너럴, 왕 등 3총사 가운데 왕은이미 앞질렀던 것이고 데이터제너널과는 어깨를 나란히 하는 수치였던 것이었다. 반면 금성사는 이 기간 동안 공급한 하니웰 기종은 계열 럭키화학에설치한 「하니웰 레블6」 단 1대 뿐이었다.
삼성전자가 컴퓨터사업에 진출하게 된 배경에는 전자산업 전반에서 치열한주도권 경쟁을 벌인 금성사를 의식한 점이 없지 않았다고 당시 삼성 측 직원이던 Q씨는 들려주고 있다.
『75년 이후 삼성은 흑백TV, 컬러TV, 냉장고, 전자레인지, 세탁기, 디지탈오디오 등 가전분야에서 금성과 막상막하의 전면전을 벌이고 있었죠. 모든분야의 출발이 금성에 뒤졌지만 75년 이후 삼성의 만회가 눈에 보일 정도였죠. 이때 삼성 경영진들은 기존 분야에서 금성을 추월하는 것은 그다지 큰어려움이 없다고 자신하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새로운 분야, 이를테면 금성이 진출하지 않은 분야이면서 장래가 유망한 분야....그것이 바로 컴퓨터 분야였던 거죠.』
이런 결정을 내린 것은 75년 말이었고 삼성전자는 이때부터 미국과 일본지역의 그룹 거점망을 통해 대상 기업 물색에 나선다. 접촉 대상은 우선 국내에 현지법인이나 총대리점이 없으면서 시장성이 높은 제품을 내놓고 있는 기업이었다. 이때 삼성이 눈여겨 보았던 곳이 바로 미국 HP사였다. 74년 설립된 HP는 컴퓨터와 계측기 분야에서 미국시장을 휩쓸고 70년대 들어 일본 시장까지 넘보고 있었다. 삼성은 두말할 것도 없이 일본내 합작법인 요코가와휴렛팩커드(YHP)의 중개로 76년 8월 HP와 컴퓨터와 계측기 분야의 국내 독점공급 게약을 맺었다. 이어서 같은해 11월에는 전자사업본부 내에 HP영업과지원을 담당할 컴퓨터시스템부를 조직하게 된다.
삼성전자 컴퓨터시스템부가 급성장하게 되는 결정적 계기는 HP와 계약을체결한 지 1년 만인 77년 8월에 찾아 들었다. 서울대 등 8개 국립대학과 연세대를 포함, 모두 9개 대학의 컴퓨터 도입기종 일괄 입찰에서 삼성이 최종낙찰된 것이다. 이 입찰은 문교부가 고급 전산기술 인력 양성과 대학교육의질적수준 향상을 꾀한다는 취지 아래 국제개발은행(IBRD)자금을 동원, 75년부터 추진해 오던 것이어서 사회적 관심도 높았다.
조달청이 실시한 이 입찰은 대학마다 1대 씩 모두 9대의 미니컴퓨터 기종일괄 공급할 업체를 결정하는 것이었는데 참여회사는 삼성전자(HP), 동양물산(일본 오키전기), 동양전산기술(DEC), 한국전자계산(미국 프라임) 등 10개사나 됐다. 그뿐만 아니라 니혼미니컴퓨터(현 일본 데이터제너럴) 등 일본기업은 한국대리점을 거치지 않고 직접 입찰에 응하기도 했다. Q씨가 우연한기회에 입수, 현재까지 소지하고 있는 각사 응찰내역 문서들을 보면 「HP3000 II」를 제안한 삼성전자의 입찰금액은 모두 1백36만 달러로 기록돼 있다.
Q씨는 당시 「HP 3000 II」 9대분의 국제 입찰가격은 2백50만 달러였는데절반에 가까운 가격으로 응찰한 것은 HP본사의 강력한 추천이 있었기 때문이라고 들려주고 있다.
이전까지 HP기종 공급 실적이 1대에 불과하던 삼성전자는 한꺼번에 9대의공급을 계기로 본격적으로 전국적인 지원 및 영업 조직을 갖추게 된다. 삼성전자는 또 9대의 컴퓨터 설치가 완료된 78년 4월을 기해 컴퓨터시스템부와계측기부를 주축으로 하는 산업기기사업본부를 출범시키면서 독립채산제 성격의 컴퓨터 사업조직을 갖게 되었던 것이다.
삼성전자가 덤핑 입찰을 불사하면서 9개 대학 기종공급권을 따낸 것은 도입기관이 교육기관이자 공공기관이라는 점에서 그 파급효과를 노린 것인데이 의중은 그대로 적중한다. 실제 78년 한해 동안 삼성전자의 HP기종 판패실적은 국내 미니컴퓨터시장의 50%를 독식했고 HP의 해외판매업체중 일본 YHP에 이어 2위를 차지하기에 이르렀던 것이다.
89년 발간된 사사 「삼성전자 20년사」는 이때의 전후 사정에 대해 『77년전국 9개 대학 컴퓨터 공동구매 입찰에서 낙찰에 성공함으로써 사업기반을굳혀 나갔다. 이 성과에 힘입어 일반 기업체를 대상으로 판매를 촉진 시켰고...』라고 적고 있다.
삼성전자의 컴퓨터사업 부분의 초창기 주역들로는 초대 컴퓨터시스템부장전인수를 비롯, 영업과장 김영한(현하이테크리서치 소장), 지원과장 임득순(현 한국HP이사) 등이다.
한편 78년 8월 금성사는 당시 부사장이던 심흥주(현 큐닉스 회장)를 사업부장으로, 김대규(현 한국데이터베이스학회 회장)를 컴퓨터본부장으로 컴퓨터사업부를 발족시켜 삼성전자의 쾌속질주에 제동을 걸고 나섰다. 이어 78년10월 하니웰과 독점총판계약을 맺고 「하니웰 레블6」 기종의 국내 공급을추진하게 된다.
그러나 금성사가 70년대 말까지 주력한 부분은 76년 출범한 금성중앙연구소가 국산화한 금전등록기나 전자식 출납회계기 사무기기였다. 금성사는 삼성전자와 달리 이들 전자 사무기기를 마이크로컴퓨터 칩을 이용하는 최첨단컴퓨터 응용기기로 여겼고 금성중앙연구소를 통해 이들 기기를 시장 주력 품목으로 육성하려는 의지를 보이기도 했다.
<서현진 기자>
작성일자 : 1996.05.02
서현진 기자 E-MAIL:jsuh@www.etnews.co.kr
컴퓨터 파노라마 (19) 도약기 (5) 컴퓨터 국산화의 세가지 갈래 차례로 돌아가기
70년대 중반이후 컴퓨터 국산화는 대략 세가지 방향으로 진행되고 있었다.
하나는 동양기술전산(OCE) 등이 미국 디지털 이퀴프먼트(DEC)의 CPU보드 등핵심부품을 들여와 미니컴퓨터를 조립생산하는 방법이었다. 이를테면 DEC에서 공급받은 핵심부품에 국내에서 생산된 부품을 결합, 국산화율을 높여나가는 것이었다.
두번째는 당시 미국에서 화제가 되고 있던 인텔사의 8080 마이크로프로세서를 들여와 8비트 마이크로컴퓨터 또는 마이크로프로세서 내장 주변기기를개발, 생산하는 일이었다. 마이크로컴퓨터 생산은 70년대 후반 한국전자기술연구소, 80년대 초 삼보컴퓨터로 이어지면서 오늘날 마이크로프로세서에 기반한 PC산업을 일구는 기초가 된다.
세번째는 가장 활발했던 분야로 중대형 컴퓨터용 CRT단말기를 한글화하는작업이었다. 한글정보가 단말기 화면에 표시될 때 자모 모아쓰기 형태로 단번에 나타나는 기술이 개발된 것도 이때부터다. 한글 CRT단말기 개발은 우리나라 컴퓨터 이용률을 폭발적으로 증대시키는 요인이 됐고 컴퓨터 한글처리기술의 토양이 되기도 했다.
동양전산기술이 시도한 미니컴퓨터 국산화는 상당히 모험적이었을 뿐 아니라 그때는 획기적인 작업이었다. 동양전산기술은 DEC측과 두종류의 거래를하고 있었는데 하나는 당시 세계적으로 가장 인기있었던 미니컴퓨터 「PDP 8」, 「PDP 11」 등 「PDP」시리즈를 국내에 공급하는 총대리점 역할이었고또 하나는 PDP 11을 국내에서 직접 조립생산, 자기상표로 공급키로 한 일이었다.
당시 국내 최고의 컴퓨터 기술자들이 몰려있던 동양전산기술의 DEC 총대리점 사업은 매우 탁월한 것이었다. 70년 중반에서 70년대 말까지 국내에서 가장 많이 팔린 기종이 PDP시리즈였다는 사실은 이를 잘 입증해준다. 참고로 75년 2월 설립된 동양전산기술은 79년까지 4년 동안 모두 58대의 컴퓨터를 국내 공급했는데 이 수치는 67년 진출한 한국IBM이 79년까지 12년 동안 공급한75대에 이어 종합 2위에 해당하는 기록이다.
동양전산기술이 PDP 11을 조립생산하기로 결정한 것은 바로 이같은 판매실적에서 얻은 자신감에서 비록됐다. 동양전산기술은 초기에는 주요부품을 모두 DEC등 미국회사에서 조달해 PDP 11을 조립생산할 작정이었다.
예컨대 DEC의 PDP 11용 CPU보드 장치, 메모렉스사의 디스크장치, 컨트롤데이터의 CRT단말기, 데이터프로덕츠의 프린터, 도큐먼테이션사의 카드판독기등을 각각 별도로 구입, 이를 완제품으로 조립해내는 일종의 OEM방식이었던셈이다. 자기상표는 회사의 영문명칭 「Oriental Computer Engineering」에서 딴 「오리콤(ORICOM)」으로 정해졌다.
이렇게 해서 76년 처음 조립생산해낸 것이 바로 「오리콤540」이다. 오리콤540 시리즈는 기억용량에 따라 32에서 1백92까지 모델이 다향했던 것으로전해지고 있다. 오리콤540의 초기고객으로 동양나이론과 인하대학교 등이 기록에 남아있다.
오리콤540 개발 당시 동양전산기술에 재직했던 인물들을 보면 이윤기(전엘렉스컴퓨터 사장), 권순덕(현 한맥소프트웨어 사장), 김천사(현 두산정보통신 사장), 김병각(현 한국디지탈 전무), 김주현(현 삼성전자 전무), 김영한(현 하이테크리서치 소장), 김영식(현 엘렉스컴퓨터 사장), 최규대, 이정희(현 삼보컴퓨터 사장), 김의현 등 20~30대의 젊은이들이었다.
오늘날 이들이 하나같이 우리나라 컴퓨터산업을 떠받치고 있는 위치에 올라 있음은 주지의 사실이다.
이들이 동양전산기술에서 추진했던 컴퓨터 국산화의 목표는 상당히 원대하고 체계적인 것이었다. 이들은 하드웨어와 소프트웨어라는 두가지 측면에서단계별로 접근하고 있었는데 예컨대 하드웨어의 경우 기기단위OEM→부품단위OEM→부품생산을 거쳐 완전 국산화에 이른다는 것이었다. 또 소프트웨어 분야에서는 응용프로그램 개발→응용프로그램 패키지화→운용체계 개발에 이른다는 계획을 세워놓고 있었다.
동양전산기술의 미니컴퓨터 중장기 국산화 추진계획은 그러나 첫작품인 오리콤 540 시리즈가 동급 외국산 기종에 비해 가격 경쟁력에서 현격한 열세를면치 못하면서 1년도 되지 않아 위기를 맞게 된다. 그뿐만 아니라 거액을 투자한 오리콤540의 판매난이 가중되면서 사세가 기울었고 마침내는 회사경영권이 80년을 전후해 서서히 두산그룹으로 넘어가 이 계획은 영원히 빛을 보지 못하고 말았다.
하지만 동양전산기술의 신화는 다른 기업에 그대로 이어져 70년대 후반 삼성전자와 금성사가 각각 미국의 휴렛패커드와 하니웰 기종을, 효성그룹의 동양나이론은 일본의 히타치 기종을 각각 국내 조립생산키로 하는 결정을 이끌어내기도 했다.
금성전기가 미니컴퓨터보다 한단계 아래인 마이크로컴퓨터나 프린터 등 주변장치의 국산화를 시도했던 것도 따지고 보면 동양전산기술의 오리콤 540영향을 받은 결과라 할 수 있다.
금성전기는 76년 11월부터 77년 7월까지 한국과학기술연구소(KIST) 수체제어연구실과 공동으로 국내최초 마이크로컴퓨터 「GSCOM80A」와 역시 최초의국산 잉크제트프린터 「GS JET1200」 개발에 성공하게 된다.
금성전기와 KIST가 이때 GSCOM80A의 CPU로 장착했던 것이 바로 미국의 인텔사가 75년 발표한 8비트용 8080마이크로프로세서였다. GS JET1200 프린터제어에는 모토롤러의 6800마이크로프로세서 기술이 채용되기도 했다. 마이크로프로세서가 컴퓨터 CPU나 주변기기 제어에 처음으로 채택되는 순간이었다.
GSCOM80A는 특히 국내처음으로 디스크 오퍼레이팅 시스템 즉 도스(DOS)운용체계를 채용한 컴퓨터로 기록되고 있기도 하다. 이때 사용된 도스는 「MSDOS」의 할아버지격인 미국 디지털리서치사(92년 노벨사에 합병됨)의 「CP/M80」이었다. GSCOM80A는 또 응용프로그램 개발언어로 포트란이나 코볼이 아닌 베이식이 처음으로 사용됐다.
77년 7월 6일 서울역 럭키빌딩 종합전시장에서는 GSCOM80A 마이크로컴퓨터와 GS JET1200 잉크제트프린터, 「GSM 2000」도트매트릭스 프린터 등 3종의국산컴퓨터 발표회가 열렸는데 보기 드문 성황을 이뤘다.
당시 두개의 중앙일간지는 금성전기가 이날 발표한 3종의 컴퓨터 신제품에대해 『일반 사무용, 교육 및 과학기술용, 전자통신 및 산업기계제어용, 중대형 컴퓨터의 지능형 단말기용 등 그 용도가 무한해 국산컴퓨터 개발역사에획기적인 전환점을 이루게 됐다』고 적고 있다. (GSM80A, GS JET1200, GSM 2000 등은 80년대에 우리나라 컴퓨터산업에 지대한 영향을 미치게 되는데 다음 호에서 더욱 구체적인 내용을 알아보기로 한다)
한편 당시 업계에서 가장 활발했던 모아쓰기 한글CRT단말기의 개발은 78년부터 삼성전자와 금성사 등이 주도했다.
CRT단말기란 음극선관(Cathode Ray Tube)을 이용해 컴퓨터 처리결과를 화면에 출력하는 장치로 최근까지도 중대형 컴퓨터용 단말기로 가장 많이 사용됐다. 이 단말기는 자체에 처리장치를 갖지 않는 대신 키보드를 통해 주컴퓨터에 명령어를 보내고 그 처리결과를 화면으로 출력해주는 역할을 했다. 중대형 컴퓨터는 보통 수십대에서 수백대의 CRT단말기를 접속해 사용자들이 주컴퓨터의 자원을 시분할(Time Sharing) 방식으로 공유할 수 있었다.
CRT단말기의 한글화는 주컴퓨터에서 불러오는 정보를 CRT화면에 한글로 표시하는 것이었다. 물론 이전에도 한글CRT단말기는 IBM, 컨트롤데이터 등에서개발돼 상품화되고 있었다. 그러나 이들 단말기에 출력되는 한글정보는 한글자모 한 자에 영문 알파벳 한 자를 대응해 처리하는 방식이었다.
따라서 「많」이나 「옳」처럼 복자음 받침이 오는 한글 한 자를 표현할경우에는 영문 알파벳 넉 자를 한꺼번에 묶어 복잡하게 처리할 수밖에 없었다. 이 때문에 글자들은 화면상에 자모 단위로 출력돼 영문출력에 비해 처리속도가 크게 떨어졌고 인자품위도 형편이 없었다.
이같은 한계를 극복, 78년 3월 국내에서 처음으로 한글 모아쓰기 CRT단말기를 개발한 곳은 삼성전자였다. 삼성전자는 당시 판매에 호조를 보이고 있는 휴렛패커드의 미니컴퓨터 기종 「HP 3000」에 접속해 사용할 수 있는 한글 모아쓰기 CRT단말기 「ST 101」을 동방생명빌딩(현 삼성생명빌딩)에서 발표, 화제를 모았다.
뒤이어 코트로닉스사가 78년 7월 당시 미국 미주리대학 교수이던 김현영의도움으로 두번째 모아쓰기 한글CRT단말기를 개발했다. 코트로닉스 제품의 특징은 모아쓰기용 한글문자 생성기 프로그램을 롬(ROM)에 내장함으로써 시스템 안정성이 뛰어나다는 점이었다. 또 롬 속에는 초성 3벌과 중성 2벌 및 1벌의 종성이 들어있어 인자의 품위를 한층 높였다는 평가를 받아냈다.
78년 10월에는 국내에서 세번째로 금성사가 컴퓨터사업부 출범과 함께 모아쓰기 한글CRT단말기 「GDT9720」 개발에 성공했다. GDT9720은 최초로 자음과 모음만의 2벌식으로 키보드자판을 지원한 한글CRT단말기로 기록되고 있다.
모아쓰기용 한글 CRT단말기의 개발은 따지고 보면 한글처리를 소프트웨어적으로 구현한 결과였다. 한글 모아쓰기 처리 프로그램을 개발해 주컴퓨터의기억장치에 설치하거나 롬 반도체에 구워 본체에 내장함으로써 가능했던 것이다. 한글처리 기술은 80년대 중반에 등장한 청계천한글카드 등 일반 컴퓨터의 한글처리용 확장카드 개발기술로 이어졌고 워드프로세서 등 한글소프트웨어 개발에도 큰 영향을 미쳤다.
그뿐만 아니라 주민등록 조회나 영수증 발행 등 공공기관의 행정전산화 도입시기를 앞당기는 데도 커다란 역할을 했던 것으로 평가되고 있다.
서현진 기자
작성일자 : 1996.05.09
컴퓨터 파노라마 (20) 도약기 (6) 마이크로프로세서 혁명과 마이크로컴퓨터 차례로 돌아가기
미국의 벤처기업 인텔이 세계 최초의 마이크로프로세서 「4004」를 개발한것은 1971년이었다. 「4004」는 외부와 데이터를 주고 받는 버스 단위가 4비트로서 현재의 64비트 펜티엄 마이크로프로세서와 단순 비교해 보면 그 단위가 16배나 적은 것이다.
「4004」는 70년대 후반의 마이크로컴퓨터, 즉 PC혁명의 발단이 됐던 「8088」마이크로프로세서의 할아버지뻘이 되는 제품이다. 「4004」가 「8088」로 가기 전에 거쳤던 단계가 바로 아들뻘인 「8080」이다.
미국에서 「8080」 또는 그 계열 마이크로프로세서를 컴퓨터 중앙처리장치(CPU)로 채택한 마이크로컴퓨터가 출현한 것은 75년 MITS라는 소기업에 의해서였다. 국내에서는 77년 7월 금성전기(현재는 LG전자, LG산전 등으로 분산합병됨)와 한국과학기술연구원(KIST)이 공동 개발한 「GSCOM-80A」가 그 효시이다.
「GSCOM-80A」는 순수 국내 기술진에 의해 개발된 최초의 국산 마이크로컴퓨터였고 장차 마이크로프로세서 전성시대를 예고했다는 점에서 국내외 관심이 집중된 제품이었다.
「GSCOM-80A」는 그러나 성대한 발표행사까지 치뤘지만 경험부족으로 실전배치나 상업화에는 실패했던 것으로 기록되고 있다. 이 때문에 「GSCOM-80A」보다는 81년에 발표돼 상업화에 성공한 삼보전자엔지니어링(현 삼보컴퓨터)의 「SE 8001」이 최초의 국산 마이크로컴퓨터로 알고 있는 사람들이 대부분이다.
다시 인텔의 「4004」에 관한 얘기로 되돌아 가자. 「4004」에 집적된 트랜지스터수는 2천2백5개로 알려지고 있다.(참고로 펜티엄은 4백만개의 트랜지스터가 집적돼 있다) 인텔은 「4004」를 이용해서 「마이크로컴퓨터시스템4」라는 마이크로컴퓨터를 개발했다. 이 컴퓨터는 그러나 오늘날 숫자계산전용의 전자계산기(Calculator)정도의 성능을 발휘했던 것으로 전해지고 있다.
「마이크로컴퓨터시스템4」의 CPU로 채택된 「4004」의 계산능력은 46년에개발된 세계 최초의 컴퓨터 「에니액」보다 나았다. 1만8천개의 진공관으로구성된 「에니액」은 무게만 30톤이었고 전체 외형은 왠만한 덤프트럭만했다. 반면 가로세로 4x3mm였던 「4004」는 실제 크기가 「에니액」의 영문자인 ENIAC에서 첫자와 두번째자인 E자와 N자를 합친 것에 불과했다고 해서 화제가 되기도 했다.
그런데 「4004」는 단순히 크기가 작고 성능이 뛰어나다고 해서 주목을 받은 것만은 아니었다. 물론 전문가나 다른 반도체회사 관계자들만의 관심사였겠지만 「4004」개발이 갖는 진짜 의미는 다른 데에 있었다.
「4004」는 프로그램을 기록된 칩과 데이터 입출력 통로가 되는 칩 등 2개의 메모리칩으로 구성돼 있었다. 프로그램 칩 부문은 CPU로서 마이크로프로세서 자체를 구동시키기 위한 것이었고 입출력 통로는 처리를 위해 외부로부터 불러온 데이터를 호출해놓는 곳으로서의 역할이었다. 이를테면 컴퓨터의 중앙 처리과정과 단계를 그대로 축소해놓고 있었던 것이다.
인텔은 「4004」후속으로 74년 트랜지스터 집적도가 4천5백에 이르고 데이터를 주고 받는 단위가 8비트인 「8080」을 발표하게 된다. 「8080」은 「4004」보다 20배나 빠른 연산속도를 자랑했다. 인텔이 홀로 명성을 날리고 있는 가운데 75년에는 모토롤러가 「8080」에 대응하는 8비트 「M6800」을 발표했고 텍서스 인스트루먼트(TI)와 제너럴 인스트루먼트(GI) 등이 잇따라 마이크로프로세서 개발에 뛰어들었다.
벤처기업 MITS이 사상 최초로 「8080」을 탑재한 마이크로컴퓨터 「알테어」를 발표한 것은 모토롤러가 「M6800」을 발표할 즈음인 75년 이었다. 「알테어」는 75년 한해 동안에만 2천대가 제작돼 모두 팔려나갔고 MITS사는 졸지에 세계 언론의 스포트라이트를 받게 됐다.
그런데 MITS의 창업자가 누구였을까. 바로 오늘날 마이크로소프트 회장 빌게이츠와 그의 친구 에드 로버츠였다. 「알테어」의 성공을 처음부터 지켜본본 빌 게이츠는 최근에 출간한 한 전기에서 『마이크로컴퓨터의 장래가 매우밝다는 것을 직감으로 느꼈다』고 술회하고 있다.( 「빌게이츠의 왕국」).
그해 4월 선배인 폴 알렌과 마이크로소프트를 설립한 것도 이같은 직감에 의해서였다고 밝히고 있다. 마이크로소프트의 첫 소프트웨어 작품은 「알테어」에서 실행할 수 있는 베이식 언어였다.
75년 말에는 미국 캘리포니아 마운틴 뷰에 「바이트숍」이라고 이름 붙여진 최초의 마이크컴퓨터 소매점이 등장했다. 컴퓨터를 텔레비전 수상기처럼거리의 쇼윈도에 전시해 놓고 판매하는 시대가 온 것이다.
마이크로컴퓨터의 양대상맥인 애플이 탄생한 것은 76년이다. 널리 알려진얘기이지만 스티브 잡스와 스티브 우즈니액이 함께 설립한 애플사는 같은해4월 「M6800」을 CPU로 탑재한 「애플Ⅰ」을 발표했으나 실패로 끝났다. 1년만인 77년 4월에 발표한 「애플Ⅱ」가 대성공을 거두면서 세계는 바야흐로마이크로컴퓨터((당시까지는 PC라는 말이 사용되지 않았다) 열풍에 휩싸이게된다.
일이 이쯤 되자 시장조사회사들은 75년 당시 5천만 달러에 불과했던 반도체시장 규모가 마이크로프로세서의 가세로 76년에 1억5천만 달러로 3배 팽창했다고 발표했고 80년에는 4억5천만 달러에 이를 것이란 전망을 내놓기도 했다.
「알테어」에서 「애플Ⅱ」에 이르는 마이크로컴퓨터 열풍은 76년부터 국내에도 몰아치기 시작했다.
한국의 「알테어」를 만들겠다는 프로젝트는 76년 11월 금성전기 전산실과KIST수치제어연구실 공동으로 시작됐다. 금성전기 측은 주로 자금을 대고 KIST 측은 실질적인 연구개발 인력을 투입했다. 이 프로젝트에 참여한 인물들은 KIST 측에서 구지회(전 가인시스템사장), 이만재(현 숙대 교수)등 당시명성을 날리던 20∼30대 젊은 두되들이 주를 이루었고 금성전기 측에서는 유황빈(현 광운대교수)등이 가세했다.
이들이 개발한 것은 8비트 마이크로컴퓨터 「GSCOM-80A」와 이 컴퓨터에연결해서 사용할 수 있는 잉크제트프린터 「GSJET-1200」와 도트매트릭스 방식의 한글지원프린터 「GSM 2000」등 주변장치였다.
「GSCOM-80A」은 「8080」계열로 인텔이 76년 발표한 「8080A」를 CPU로탑재하고 있었다. 「8080A」는 64KB의 메모리를 지원할 수 있었고 「8080」보다 약간 작은 4천개의 트랜지스터 집적도를 갖고 있었다. 클럭속도는 2MHz였던 것으로 전해지고 있다.
주기억용량은 8KB였고 사이클 주기가 5백ns(나노秒)나 되는 램(RAM)이 기억장치로 사용됐다. 8KB의 주기억용량은 당시 디지탈이큅먼트(DEC)나 휴렛팩커드의 미니컴퓨터 기종들이 주로 16~32KB를 채용하고 있었다는 점을 감안하면 매우 많은 편에 속하는 것이었다.
「GSCOM-80A」에 채택된 데이터 버스는 미국에서 「8080」용으로 설계돼인기가 높았던 「S-100버스」였다. 「S-100버스」는 1백개의 유니버셜 형 버스와 22개의 슬롯(장치 연결구)을 갖고 있었다. 「GSCOM-80A」가 순수 국내기술진에 의해 제작됐다는 것은 바로 이 「S-100버스」에 마이크프로세서, 기억장치 등 핵심부품과 각종 입출력장치 등을 논리적으로 배열시킨 것을 의미한다. 즉 핵심부품의 배열을 독자적으로 설계해낸 것이다. <그림 참조>
「GSCOM-80A」의 디스크운용체제(DOS:Disk Operating System)로는 76년 미국 디지탈리서치사가 발표한 「8080」시리즈용 「CP/M-80」이 채택됐다. 프로그램 개발언어로는 마이크로소프트의 「알테어」용 베이식으로 결정됐다.
「CP/M-80」의 주요 명령어로는 editor, assembler, assign, list, sysgen, ddt, pip, basic 등으로 81년 발표된 「MS-DOS」의 명령어에 그대로 채용됐거나 큰 영향을 줬던 것들이다.
베이식은 당시까지 주력 프로그램 언어였던 포트란이나 코볼 등을 능가하는 고급언어로서 과학기술 및 일반사무용 응용프로그램 작성에 탁월한 성능을 발휘할 수 있다는 점이 특징으로 꼽혔다.
77년 7월 럭키빌딩 종합전시장에서 발표된 「GSCOM-80A」는 용도 및 주변장치의 구성에 따라 일반 사무용, 교육 및 과학기술용, 중대형 컴퓨터 단말기용, 계측제어용 등 4종류의 모델로 나눠졌다.
일반 사무용은 다양한 주변장치를 접속할 수 있어 관공서, 일반기업체 등에 설치할 수 있도록 한 모델로서 플로피디스크드라이브와 카세트테입레코더를 보조기억 장치로 사용할 수 있었다.
대학생과 대학원생을 주된 사용자층으로 한 과학기술용 모델은 베이식언어를 얹어 과학기술 계산을 쉽게 처리할수 있도록 한 것이 특징이었다. 모뎀을내장한 단말기용 모델은 스탠드얼론 기능을 가지면서 중대형 컴퓨터에 접속되면 배치터미널로도 사용이 가능한 인텔리전트형 컴퓨터였다.
계측제어용 모델은 관련 인터페이스장치를 부착, 공작기계, 전자통신, 의료기기, 측정기의 컨트롤러로 사용할 수 있었다.
「GSCOM-80A」와 함께 개발된 잉크제트 방식의 「GSJET-1200」프린터 역시「8080」시리즈는 아니었지만 제어장치로서 별도의 마이크로프로세서를 장착하고 있었다. 마이크로프로세서의 내장은 이 프린터가 어떤 컴퓨터에도 온라인으로 연결될 수 있음을 뜻하는 것이었다.
마이크로프로세서를 장착한 마이크로컴퓨터나 주변장치의 잇따른 출현은바야흐로 마이크로프로세서 전성시대를 예고하는 것이었다.
그러나 당시만해도 마이크로프로세서나 마이크로컴퓨터에 대한 대형컴퓨터공급회사들의 평가는 매우 부정적이었던 것으로 전해지고 있다. 70년대 후반당시 IBM, 스페리, 컨트롤데이터 등 기업관계자들이나 교수들의 기고문을 보면 마이크로프로세서나 마이크로컴퓨터를 대형 컴퓨터의 경쟁자로서보다는새로운 단위 부품 쯤으로 여기고 있음을 볼 수 있다.
역사의 아이로니였을까, 과학기술의 진보였을까. 그로부터 20년쯤 지난 오늘날 마이크로프로세서와 대형 컴퓨터의 위상은 완전히 뒤바뀌고 말았다.
<서현진 기자>
작성일자 : 1996.05.16
서현진 기자 E-MAIL:jsuh@www.etnews.co.kr
컴퓨터 파노라마 (21) 도약기 (7) 충북도청 행정정보시스템 시범사업 차례로 돌아가기
행정전산망, 금융전산망, 교육연구전산망,국방망, 공안망 등 5대 국가기간 전산망의 틀이 완벽하게 짜여진 것은 지금으로부터 10여년전인 87년을 전후해서 제정된 「전산망 보급확장과 이용촉진에 관한 법률」을 근거로 한다.
이 법령에 따라 86년 5월 한국통신진흥(자금지원), 87년 1월 한국전산원(전산망 감리및 표준)등 추진체계가 출범하게 된다. 또 한국데이타통신(행정전산망), 금융결제관리원(금융전산망), 시스템공학센터(교육연구전산망)등 전담사업자도 지정이 된다.
5대 기간전산망 가운데 정부가 최대 역점을 둔 부문은 두말할 나위 없이규모가 가장 컷던 행정전산망이다. 86년 총무처가 발표한 행정전산망의 목표및 추진전략은 「작은 정부 구현」과 「선진 경제사회 실현」이었다.
이가운데 특히 「작은정부의 구현」은 공공기관에 전산시스템을 구축하려는 목적과 방법을 그대로 표현해준 말이라는 점에서 사회 각계로 부터 엄청난 호응을 얻었다.
정치적 긴장감으로 팽배해 있던 당시 5공화국 정부도 정권 차원의 치적 사업으로 행정전산망 등의 추진에 적극성을 보이기도 했다. 지금은 여러가지사회적 여건으로 시들해졌지만 한때는 한강 治水사업 등과 함께 행정전산망기틀 마련을 5공화국의 3대 치적으로 꼽는 사람들이 적지 않았을 정도다.
그러나 우리나라 컴퓨터 역사를 좀더 멀리, 80년대에서 70년대 까지 거슬러 올라가보면 5공화국이 행정전산망 기틀을 마련했다고 주장하는 것은 매우성급한 평가였음을 알게 된다. 이를테면 오히려 5공화국이 「작은정부의 구현」시기를 최소한 5년정도 늪췄음이 드러나고 있는 것이다.
정부가 「작은 정부의 구현」개념과 같은 입장에서 행정전산화 사업 추진에 나선 것은 4공화국 말기인 78년 부터이다. 이때 벌써 정부는 경제기획원과 한국과학기술연구소(KIST) 공동으로 충청북도와 산하 시군을 행정전산화시범 道및 시범市郡으로 선정하고 본격적인 통합 기간망 구축에 나서고 있음을 볼 수 있다. 이같은 시범사업에 나서게 된 것은 78년 2월 총무처가 확정발표한 제1차 행정전산화 기본 계획에 따른 것이었다.
제1차 행정전산화 기본계획은 정부가 78년부터 87년까지 10년 동안에 걸쳐5년단위로 전국을 단일 정보권으로 하는 [행정정보시스템]을 구축하겠다는전략의 일환이었다. 이때 확정된 1차계획에는 78년부터 82년까지 5년동안 32개 정부기관의 99종에 이르는 중요 업무를 전산화 한다는 내용이 근간을 이루고 있었다.
그 주요 골자는 시도 단위로 컴퓨터 공동이용을 위한 부분 전산통신망을구성하며 지방행정업무의 전산화를 위해서는 특히 각 시도에 전산센터를 설치한다는 것 등이었다.뿐만아니라 공용 행정자료 데이터베이스 구축을 위한광범위한 수요조사 계획도 포함돼 있었다.
99개 중요 업무는 경제발전, 국방 및 안전보장, 치안, 행정능률화 및 대민봉사 향상 등과 관련된 것들이었는데 이를테면 예산관리, 세금징수, 주민등록관리, 공안정보관리, 취업알선 업무 등이 우선 순위로 돼 있었다.
2차 5개년 계획은 1차계획에서 기간단위로 개발된 업무의 계열별 통합, 군단위까지 연결되는 전국적인 전산통신망 구축, 분야별 행정자료의 단계적 데이터베이스 구축 등이 골자였다. 물론 2차계획은 1차계획의 성과에 따라 달라질수 있도록 예외 규정을 두고 있었다. 하지만 2차 계획의 궁극적인 목표가 전국을 단일 정보권으로 묶는 대단위 행정정보시스템의 구축이었음은 물론이다.
총무처의 제1차 행전전산화 기본 계획 발표에 앞서 이같은 행정정보시스템구축 계획을 주도한 곳은 놀랍게도 예산업무를 담당했던 경제기획원 이었다.
당시 기획원 예산국은 행정정보시스템 구축 사업이 장기적으로는 정부 예산절감 효과를 가져다 줄 수도 있다는 것을 자신하고 있었다.
70년대 초반까지만 해도 정부 주요기관의 전산화는 KIST, 금융단전자계산본부(KBCC), 중앙전자계산소(NCC) 등 연구소나 공공 전산센터를 활용하는 형태를 취해오고 있었다.
이가운데 67년 설립된 KIST는 당시 주요 정부기관, 교육기관, 민간기업의전산업무를 도맡다시피했고 69년 출범한 KBCC는 대부분의 시중은행 전산업무처리를 담당했다. 또 70년 발족된 NCC는 정부부처의 행정업무 전산처리를 일괄하고 있었다.
그러나 70년대 중반부터 저가 고성능의 미니컴퓨터 기종이 등장하고 민간기업의 전산시스템 도입이 급증하자, 정부기관에서도 독자기종 도입을 선호했고 기획원 예산국은 이 때문에 예산편성 때마다 부처 전산시스템도입 에산배정에 골머리를 앓았다.
이때 경제기획원이 생각해낸 아이디어가 바로 과학기술처 소속이던 NCC를총무처로 이관시켜 정부전자계산소(GCC)로 개편하는 것이었다. 그러나 이 계획은 실천에 옮겨지기는 했지만 GCC의 전산시스템 용량이 턱없이 부족했고정부기관들의 여전한 독자기종 도입 선호로 유명무실해지고 말았다.
예산 감축을 위해 기획원이 두번째로 입안해 낸 것은 「정부행정의 효율화」를 위해 기간망을 새로 구축하고 통합 전산 업무를 개발, 부처간 공동이용을 추진하는 일이었다.
이 두번째 아이디어를 공문서화 한 것이 바로 총무처의 행정전산화기본 계획이다. 흥미로운 것은 기획원의 첫번째 아이디어가 전산 예산 감축 그자체에 촛점이 주어져 있었다면 두번째 아이디어에서는 전산 예산은 그대로 집행하되 전산화 결과로 나타나게 될 행정비용 절감, 즉 장기적 안목의 예산 절감효과를 노렸다는 점이다. 그러나 정부부처의 통합 전산화 계획은 막대한예산이 소요되는 국가적 대사였음은 부인할 수 있는 사실이었다.
총무처의 1차 5개년 계획이 발표되자, 기획원은 행정정보시스템의 본격 구축에 앞서 78년 7월 시행착오와 예산상의 낭비를 줄이기 위한 시범 사업에먼저 착수하게 된다. 시범사업은 경험이 전무한 행정정보시스템 구축 과정에서 무슨 기술이 요구되는가, 어떤 제도적 지원이 따라야 하는가를 구체적으로연구하기 위해서도 꼭 필요한 과정이었다.
시범사업 수행자로는 국내 최고 수준의 전산시스템과 개발기술을 자랑하던KIST 전산개발센터(구 전자계산실)가 선정됐다. 시범사업 대상지역이 하필충청북도로 정해진 것도 상당한 이유가 있었다. 시범 사업에 직접 참여했던Q씨의 회고.
『당시 고급 내무관료 가운데 행정전산화에 가장 열성을 보였던 이는 충북지사인 정종택씨(현 환경부 장관)였고 그와 가장 절친한 친분관계를 유지했던 이가 바로 기획원 예산국장 강경식씨 (현 신한국당 의원)였습니다. 시범사업 성패에 자신의 진로가 걸려 있다고 판단한 강경식씨가 정종택이라는 강력한 후원자를 끌어 들인 셈이죠』
이때 기록을 보면 기획원 예산국과 시범사업자인 KIST 전산개발센터 측은연구책임자 안문석(현 고대교수), 실무 책임자 신동필(현 과학원 교수) 등을비롯 연구원 8명, 위촉연구원 9명, 자문그룹 8명등 30명에 이르는 대규모 프로젝트 추진팀을 구성 하여 78년 7월 청주로 내려 보냈다.다시 Q씨의 회고.
『처음에는 신동필 팀장 지휘하에 청주 시내에 아파트 2채를 전세내고 1년이상 동안 합숙을 했죠. 주된 작업 장소는 충북도청이었는데 그곳의 방한칸을 마련해서 전산실을 만들고 산하 시군에 원격 단말기를 직접 설치했습니다. 특히 음성군의 경우는 면 단위 까지 단말기를 설치, 시범 사업에 완벽을기하려고 했습니다』
충북도청과 산하 시군을 연걸하는 행정정보시스템 시범 사업은 80년 초까지 계속됐다. 79년 10.26사태 와중에서도 사업은 지속됐고 80년 봄 까지 최규하 대통령이 주재하는 월례 경제동향보고회에 그 추진과정이 정기적으로보고 되기도 했다.
그러나 80년 9월 새정부가 들어서면서 기획원 예산국장과 충북지사가 바뀌자, 정부당국의 행정정보시스템 구축 사업 대한 열의는 급격하게 식어갔다.
81년부터는 실무부처인 내무부의 사업기피로 시범사업은 아예 종지부를 찍고말았다.
시범사업의 중단은 결국 제1차 행정전산화 기본계획의 종료를 뜻했다. 물론 문서상으로 82년 말 제2차 행정전산화기본계획이 마련돼 발표되기는 했지만 연속 사업으로서의 의미는 크게 축소돼 있었다. 무엇보다도 사업 계획을추진할 당시의 정권이 몰락해 있는 상황이었고 추진 주체도 모두 바뀌어 있었다. 당연히 그 목표나 추진 방법도 변형될 수 밖에 없었다.
물론 81년이후 정부의 행정전산화 추진사업이 중단된 것은 아니지만 뚜렷한 비전이나 입장을 견지한 추진 주체가 있었던 것은 더더욱 아니었다. 한편오늘날에도 활동중인 국가기간전산망조정위원회의 5대 국가기간전산망 계획이 수면위로 부상한 시기는 85년경 부터이다.
국가기간전산망조정위원회의 발족과 함께 마련된 5대 국가기간 전산망계획은 그러나 78년 경제기획원이 예산 절감을 위해 기간망을 구축하고 통합업무를 개발, 부처간 공동이용을 실현하겠다는 행정보시스템 구축 계획을 확대 보완한 것에 불과한 것이었다.
무엇보다도 충북 도청 시범사업의 추진과정에서 얻었던 기술적 행정적 경험이 그대로 반영됐음은 물론이다. 특히 국가기간전산망조정위원회가 대통령비서실장을 위원장으로 하고 관련부처 차관급을 위원으로 하는 범부처 협의회 성격으로 구성된 직접적인 계기는 충북도청 시범사업에서 얻은 귀중한 행정적 경험이었다. 충북도청 행정정보시스템 시범사업 추진과정에서 관련 부처 사이의 행정적 조정문제로 실무책임자였던 신동필이 막판에 교체되는 된것등의 우여곡절 그 자체가 소중한 경험이 됐던 것이다.
< 서현진기자 >
작성일자 : 1996.05.23
컴퓨터 파노라마 (22) 도약기 (8) 전경련 보고서와 과학기술처 차례로 돌아가기
70년대 후반은 전국경제인연합회(전경련)가 우리나라 최대의 경제단체로부상한 시기라고 할 수 있다. 당시 제4공화국 정부는 수출 확대에 혈안이 돼있었고 그 결과 75년부터 79년까지 연평균 수출증가율은 28.8%에 이르렀고수입증가율도 22.9%나 됐다.
목표보다 3년 앞선 77년에 수출과 수입이 모두 1백억 달러를 넘어섰고 1인당 GNP도 1천 달러를 돌파하자 4공화국의 「수출입국」과 「고도성장」정책의 홍보는 절정에 달했다. 수출과 수입의 최일선에 있는 1백50여개 기업을회원사로 거느리고 있던 전경련의 입지가 급상승한 것은 당연한 일이었다.
70년대 우리나라 경제 전반에 막강한 배후로 부상한 전경련이 도약기에 접어든 컴퓨터 분야에 첫 一聲을 가한 것은 78년 9월이었다.
이때 전경련은 「기업경영과 정보산업」이라는 자체 연구보고서를 통해 정부 측에 장기적인 정보산업 육성발전 방안 마련을 촉구하고 나섰다. 그 대안으로 「정보산업육성법」의 제정을 주장했고 과학기술처와 상공부로 이원화될 조짐을 보이고 있는 정부의 정보산업 분야 정책 수립과정을 일원화 하라고 주장하고 나선 것이다.
언론에 보도된 이 보고서 내용은 과학기술처와 상공부 관료들 사이에서 적지않은 파장을 불렀다. 전경련이 이같은 연구보고서를 작성한 저의가 무엇이냐는 것이었다. 어떻게 보면 전경련이 성장일로에 있는 우리나라 정보산업을막강한 경제력으로 주도하겠다는 발상일 수도 있었다.
게다가 보고서의 각론 가운데는 관료들뿐 아니라 업계에까지 파문을 일으킨 몇 가지 문제된 내용도 들어 있었다. 그 대목을 요약해서 옮겨보면 다음과 같다.
『선진국일수록 컴퓨터산업이 고도로 발달돼 있고 컴퓨터 기종도 중, 대형에서 초대형이나 미니, 마이크로 컴퓨터급으로 바뀌어 가고 있다....중략....컴퓨터의 국산화는 부품의 생산 단계에서 실시하도록 하는 것이 바람직하다...중략...그러나 기술동향이 자주 바뀌는 상용컴퓨터를 국산화한다는것은 비생산적이다. 국산화 제품을 기다리는 것보다는 기존의 컴퓨터를 외국에서 수입해 오는 것이 더 효율적이고 바람직 하다...』
이런 대목은 당시 컴퓨터 국산화에 사력을 걸고 있던 많은 기업들과 연구소 관계자들의 분노를 샀다. 대다수 국민들의 정서에도 맞지 않는 내용이기도 했다. 의외의 반응이었다고 여겼던지 전경련 측이 『컴퓨터를 도입하려는기업 입장에서 보면 생산활동에 당장 투입돼 생산성 향상을 꾀할 수 있는 컴퓨터가 필요한 것 아니냐』며 한 발자국 물러섬으로써 문제는 더 이상 확대되지는 않았다.
전경련의 이같은 해명은 그러나 업계의 파장만을 잠재웠을 뿐 과기처와 상공부 관료들 사이에서 여전히 뜨거운 감자로 남아 있었다. 전경련의 보고서를 대하는 두 부처의 시각에 근본적인 차이가 있었기 때문이었다.
사실 전경련의 보고서는 정보산업에 대한 주도권을 놓고 경쟁을 벌이고 있는 과기처와 상공부 사이를 교묘하게 오가는 내용으로 채워져 있었다. 이를테면 어떤 대목에서는 과기처의 입장을 대변했다가 다른 대목에서는 상공부의 정책과정을 두둔하는 식이었던 것이다.
앞서 소개한 내용 가운대서 이를테면 『부품국산화..』 운운하는 부분은상공부 정책을 대변하는 것이었다면 『...수입해 오는 것이 바람직...』운운은 당시 컴퓨터 도입(수입) 심사를 총괄하던 과기처의 입지를 강화시켜 주고있는 셈이었다.
과기처의 경우 이미 67년부터 차관을 위원장으로 하는 전자계산조직개발조정위원회를 설치, 국내에 수입되는 모든 컴퓨터의 도입(수입) 심의를 전담하고 있었다. 과기처는 바로 이같은 도입 심의를 통해 국내 정보산업정책에 막강한 힘을 발휘해 오던 터였다. 당시 전경련 사무국 소속이었던 Q씨의 회고.
『수출입 주역이던 회원사들의 당면 목표는 당연히 생산성 향상에 의한 국제경쟁력 제고였습니다. 컴퓨터 도입이 절실했던 거죠. 그런데 컴퓨터 도입을 권장하는 과기처와 달리 상공부는 수입억제와 국산화에 주된 관심을 보였습니다. 연구보고서 작성은 이같은 극단을 돌파함으로써 회사들의 권익을 보호한다는 취지로 시작된 것이죠.』
당시 상용 컴퓨터의 99%가 IBM, 후지쯔, 스페리 등 미국과 일본제품이었다는 점에서 기업의 컴퓨터 도입은 곧 수입을 의미하는 것이었다. 따라서 무역수지를 관리하는 수출입 주무부처로서 상공부에게 과기처의 컴퓨터 도입확대정책은 적지않게 신경이 쓰이는 일이었다. 수출 1백억 달러를 기록한 77년만해도 5억 달러 미만이던 적자가 78년 상반기에만 벌써 15억 달러가 넘어서던상황이어서 여간 고심하지 않을 수 없었던 것이다.(참고로 78년 우리나라의수출액은 1백27억 달러, 수입은 1백49억 달러였다) 이런 배경 때문에 상공부는 무역수지 균형관리 차원에서 국산화에 대한 다양한 계획을 발표했고 한국전자공업진흥회와 한국전자기술연구소와 같은 단체 및 연구소에 대한 지원도아끼지 않았던 것이다.
두 부처의 당시 정보산업 관련 조직을 보면 과기처의 경우 이미 局단위인정보산업국을 두고 있었다. 정보산업국은 컴퓨터도입 승인업무 등을 위해 71년에 설치된 정보관리실이 확대 개편된 조직이었다.
반면 상공부는 83년 5월 직제 개편에 따라 정보기기과가 설치될 때까지 독립된 조직 없이 전자기기과에서 복사기나 계측기 등 다른 산업전자와 함께컴퓨터 관련 정책을 일괄하고 있었다. 그러나 상공부는 69년 시작된 전자공업진흥8개년 계획의 성공적 수행에 이어 76년 한국전자기술연구소 등에 출연하면서 부터 컴퓨터 하드웨어 국산화에 강한 집념을 보여오고 있었다. 전경련 사무국 소속이었던 또다른 Q씨의 회고.
『사실 전경련으로서는 두마리 토끼를 다잡고 싶었습니다. 정보산업이 미래산업으로 부상하고 있는 만큼 회원사들 역시 언젠가는 컴퓨터 생산자로 변신해야 된다는 것을 직감하고 있었죠. 장차 전경련의 입지도 다질 필요가 있겠다는 측면에서 보고서 말미에 첨부한 대목이 바로 하드웨어는 수입하되 소프트웨어는 국산화해야 한다는 주장이었습니다. 정부조직 내에 개발전담기구를 두고 여기서 개발된 소프트웨어를 상품화할 민간회사 설립이 시급하다는내용이었죠.』
그런데 전경련이 두 마리 토끼를 쫓기 위해 동분서주하는 동안 실마리는의외로 간단하게 풀려버렸다. 보고서가 나온 지 1백여일 만인 79년 1월 과기처는 전경련의 「기업경영과 정보산업」보고서의 주장과 대부분 일치하는 내용의 정보산업 육성책을 발표한 것이다.
우선 정보산업의 지속적인 발전을 위해 조세, 자금, 행정지원을 강화하기위한 정보산업육성법(가칭)을 제정하는데 그 골자는 기존의 각종 법규를 단일화한다는 것이었다. 물론 부품단위 부터 단계적으로 컴퓨터를 국산화하며소프트웨어 개발을 촉진시켜 수출산업으로 육성하겠다는 것도 포함돼 있었다.
부품단위부터 국산화하겠다는 것은 당분간 컴퓨터 수입을 지속하겠다는 의미여서 관계자들의 주목을 끌었다. 이같은 과기처의 컴퓨터도입 지속정책은그후 8개월 후인 79년 9월에 「전자계산조직 도입심의기준」이 마련됨으로써보다 강화되고 구체화됐다. 그런데 이때 마련된 「...심의기준」의 기본 지침을 보면 외국영화 수입쿼터제와 유사한 면을 볼 수 있는데 이를테면 다음과 같은 구절이 그 단적인 예였다.
『중형급 이상 컴퓨터 도입은 과기처 장관이 인정하는 컴퓨터 국산화 또는국내 전자산업 발전에 기술기여도가 높은 업체에 공급우선권을 부여한다. 단국방, 안보, 방산용이나 기타 과기처장관이 필요하다고 인정하는 경우는 예외로 한다.』
아무튼 과기처는 상공부보다 앞서 정보산업 육성정책을 발표, 정보산업 주도권 경쟁에서 상대방 기선을 제압할 수 있었고 이 과정에서 전경련은 과기처에 이론적 무장의 계기를 제공한 셈이 돼 버렸다.
한편 과기처의 정보산업 육성정책이 발표된 지 한달 만인 79년 2월12일 전경련은 산하 회원사 협의체인 정보산업협의회 창립발기인대회를 갖고 회장등 협의회 임원을 선출하게 된다. 정보산업 육성이 시금하다는 「기업경영과정보산업」보고서 내용를 실천에 옮긴다는 명분과 함께 기업경영의 과학화가이 협의회 운영 목적이었다.
그러면서도 정보산업협의회는 세부추진 우선목표로 정보산업의 기반조성사업을 제시, 전경련의 정보산업진출 의지를 강하게 드러내 놓고 있었다.
이날 임원 선출에서는 회장에 원영섭(혜인중기 회장)을 비롯해 부회장에강진구(삼성전자 사장), 강신호(동아제약 사장), 구두회(금성통신사장), 한상준(KIST 소장), 우용해(쌍용양회 사장), 정주영(현대건설회장) 등 이 추대됐다. 한상준을 제외하면 모두 전경련 회장단 소속이었다.
이렇게 출범한 정보산업협의회를 4년 후 계승한 단체가 바로 오늘날의 한국정보산업연합회이다. 83년 5월 전경련에서 독립, 정주영을 초대회장으로하고 과기처의 산하단체로 출범한 한국정보산업연합회(당시는 한국정보산업협회)는 지금도 기업경영의 과학화 등 정보산업협의회가 추구했던 명분과 목적을 그대로 이어가고 있다.
<서현진 기자>
작성일자 : 1996.05.30
서현진 기자 E-MAIL:jsuh@www.etnews.co.kr
컴퓨터 파노라마 (23) 도입기 (9) 컴퓨터 원격탐사로 섬을 발견하다 차례로 돌아가기
『컴퓨터가 어떤 일을 했다』라는 뉴스가 신기하고 놀랍게 들리는 것은 예나 지금이나 마찬가지일 터다. 인터넷으로 총선 개표방송을 중계하는 따위나본사와 원격지 지사간 컴퓨터 화상회의를 한다는 것은 지금도 그 자체만으로토픽감이 되곤 한다. 하물며 아직 컴퓨터가 생경한 70년대였음에야...
70년대 초반까지는 이를테면 사람이 할 수도 있는 일을 컴퓨터가 해냈다해서 놀라웠던 일이 많았다. 71년 서울시 교육위원회의 중학교 무시험 추첨같은 사건이 대표적이다. 사실 이때 무시험추첨 과정을 보면 컴퓨터가 갖는본래적 의미의 장점이 적용된 흔적은 거의 없어 보인다. 사람들은 단지 새로운 문명의 이기로 다가왔던 컴퓨터 그 자체에 놀라워 했던 것이다.
이같은 경외감은 사람들 사이에서 컴퓨터가 어느 정도 익숙해진 70년대 후반에도 지속됐다. 물론 이 때의 놀라움이란 예전의 그것과는 성격이 사믓 다른 것이었다. 이를테면 컴퓨터가 엄청난 힘과 가능성을 가지고 있다는 데 따른 놀라움 같은 것이었다. 끊임 없는 기술 개발에 힘 입어 기능과 성능이 확장됨으로써 컴퓨터 용도가 무한대로 뻗어나갈 것만 같은 기대감 같은 것이기도 했다.
70년대 초반에도 그랬지만 70년대 후반 역시 사람들에게 컴퓨터에 대한 경외감을 제공하는 역할은 한국과학기술연구소(KIST)가 전매특허였다. KIST는당시 전산시스템 연구 개발과 관련된 것이라면 주요 국책 사업은 물론 공공사업과 대형 민간 프로젝트까지 거의 도맡아 하던 곳이었다.
이때 KIST에는 성기수(현 동명정보대 총장)가 지휘하는 전산개발센터라는조직이 있었다. 이 조직은 67년 발족했던 전자계산실이 73년 전산계산부로승격된 후 다시 76년 센터 규모로 확대됐던 것이었다.
KIST전산개발센터가 70년대 초반에 수행했던 프로젝트로는 국산 컴퓨터 1호 「세종」과 한글 라인프린터 및 한글 잉크젯프린터의 개발 등 굵직굵직한컴퓨터 국산화 작업을 들수 있다. 대학 예비고사 채점업무, 전신전화 요금업무, 증권업무 등 공공기관 업무의 전산시스템 개발을 비롯 동아제약, 삼양타이어, 삼환기업 등 민간기업의 경영정보시스템(MIS)개발 프로젝트들도 대부분 이때 수행됐다. 업무전산화나 MIS 프로젝트들은 사실 미국이나 일본 같은선진국에서는 이미 보편화 된 것이었고 컴퓨터 사용 영역를 새로 개척하는분야도 아니어서 시스템 개발이나 경험 획득에 큰 어려움은 없었다. 이 때문에 이들 프로젝트는 당시 KIST 측의 주된 수익원이 돼주기도 했다.
KIST 전산개발센터가 70년대 후반기 들어 치중했던 프로젝트는 사람들에게경외감을 주면서 동시에 컴퓨터 활용 영역을 확대해 갈 수 있는, 모험성과 연구성이 강한 프로젝트가 대부분이었다. 그도그럴 것이 70년대 후반에는 한국전산(KICO), 한국전자계산(KCC), 정부전자계산소(GCC)등 KIST전산개발센터에버금가는 민간, 공공 정보처리센터들이 대거 자리를 잡는 시기다. 이들의 주요 업무가 전산시스템이나 MIS개발이었던 만큼 KIST는 새로운 영역을 찾아나서야 했던 것이다.
70년대 후반 수행했던 프로젝트들을 보면 국내 최초 의료정보시스템인 「메디오스(MEDIOS)」, 중, 고생을 거주지역 소재 학교에 배정함으로써 서울시교통란을 해소 해보려던 학생배정 시뮬레이션 연구, 인공지능과 모델링 기법을 이용한 사료배합 시스템 「페미스(FEMIS)」, 인공위성 자료를 정밀 분석하는 원격탐사 등 민간 업계로서는 엄두도 낼 수 없었던 최첨단 분야였다.
이 가운데 당시 사람들에게 풍부한 상상력을 제공했고 동시에 컴퓨터 활용역역을 크게 넓힌 것으로 평가되고 있는 원격탐사 프로젝트 하나를 소개해보기로 하자.
79년초 조직된 KIST의 원격탐사(Remote Sensing)팀이 대한민국 지도에 나타나 있는 서해안 일부 섬들의 위치가 틀려 있고 또 지도상에 기록돼 있지않은 섬들이 있다는 『놀라운 뉴스』를 내 보낸 것은 그해 9월 이었다.
KIST 전산개발센터 부장 성기수가 연구 책임자로 있는 원격탐사 팀은 서해안 경기도 옹진군 대부면 소재 「외지섬」 북동쪽 약 3km 부근 동경 1백26도40분 북위 37도 18분에 새로운 섬 하나가 존재 한다는 사실을 밝혀 낸 것이다. 원격탐사팀은 또 인근 동경 1백26도 37분 북위 37도19분 위치에 위치한「큰 가리섬」과 「작은 가리섬」이 지도상에 나타나 있는 곳보다 북쪽으로5백m 치우져 있다고 밝혔다.
이 뉴스는 당시 천문학자가 새로운 행성을 발견한 것 만큼이나 신선한 충격을 주었다.
원격탐사팀이 새로운 섬을 발견한 것은 미국 항공우주국(NASA) 소속 탐사위성 「랜드새트 C(Land Sat C)」가 경기만 일대를 근접 촬영한 자료를컴퓨터로 정밀 분석하는 과정에서 얻어진 결과였다.
원격탐사팀이 NASA로 부터 인공위성 자료를 요청한 것은 서해안 연안 수심등을 정확하게 측정하기 위한 것이었다. 이 프로젝트는 나중에 간척사업 등과 같은 국토 활용 자료로 이용할 수 있는 지리 데이터베이스 작성이 보다큰 목표였다. 나아가 원격탐사팀은 한반도 전체의 지리 및 해양 정보 데이터베이스를 작성할 요량이었다.
이 프로젝트는 특히 당시 서해안 일대에 걸쳐 대규모로 진행되던 국책 차원의 간척사업과 관련돼 안팎으로도 큰 관심을 불러 모으고 있었다. 정부는당시 간척사업이 국토 확장 내지는 활용에 대해 최상의 방안이라는 결론을내리고 적극 추진하던 중이었다.
위성사진을 이용한 원격탐사법은 72년 NASA가 지구위성 「ERTS 1」호를 쏘아 올리면서 처음 시작됐고 세계적으로 79년 4월 「랜드새트 C」가 발사된이후 본격화된 최첨단 기술이었다. 당시 신문들은 KIST 원격탐사팀의 위성사진 분석 기술이 세계적인 수준이었던 것으로 적고 있다.
이즈음 국내 신문들이 거의 매일 박스 기사를 통해 소개하던 「랜드새트 C」와 KIST 원격탐사팀의 컴퓨터 위성자료 해독법에 대해서 좀더 자세하게 알아보자. 당시 원격탐사팀의 일원이었던 Q씨의 회고.
『요즘 탐사 위성의 성능에 비하면 초보 수준에 불과한 것이지만 「랜드새트 C」의 위력은 대단했습니다. 제가 기억하고 있는 바로는 이 위성은 지상9백20km 상공에 떠서 지구 표면을 79평방m 단위로 촬영한 자료를 지구로 송신해 주었죠. 그런데 자료라는게 우리가 흔히 보는 사진 형태가 아닌 숫자였습니다. 색상을 2백56개로 나위어 검은색은 0, 흰색은 2백55와 같은 식이었죠. 이렇게 날라온 자료를 컴퓨터가 분석에서 밝기와 채도가 표시된 정밀 사진으로 만드는 것입니다』
원격탐사팀이 발견한 새로운 섬이나 위치 조정 등은 이같은 컴퓨터작업 과정에서 얻어진 산물이었다. 일이 이쯤 되다보니 KIST측은 국토 활용 차원에서 원격탐사에 대한 정부 지원을 건의하게 되고 그에 앞서 KIST 자체의 최우선 시범 사업에 선정되기에 이른다. 다시 Q씨의 회고.
『새로운 섬의 발견 등은 KIST가 자체 연구비로 수행한 첫 사업이었습니다. 그러나 연구가 워낙 방대한데다 그 결과가 당장 돈으로 되돌아 오는 것도 아니어서 장기적 대책 마련이 필요했죠. 그 아이디어의 하나로 KIST소장이던 천병두씨가 이 프로젝트를 KIST 시범 사업으로 선정했던 것입니다. 당시 박정희 대통령은 남다른 뜻이 있어서 였던지 KIST를 직접 챙겼는데 KIST측도 대통령 방문 때마다 뭔가 하나씩을 보여 주어야 했지 않았겠습니까. 시범사업이란 결과적으로 대통령 방문때 보여 줄 수 있는 일종의 전략(?) 프로젝트였습니다... 그러나 대통령은 이 원격탐사 프로젝트에 그다지 관심을 보이지 않았던 것으로 기억됩니다』 정책적 지원은 따르지 않았지만 KIST 전산개발센터의 원격탐사팀은 이후에도 자체기술 확보를 위해 나름대로 노력을기울였던 것으로 전해지고 있다. 이때 미국의 위성탐사 전문가인 제임스 밀러 박사나 일본 동경대의 무라이 교수 등이 초청돼 우리나라 원격 탐사 기술기반을 마련하는 계기가 됐다. 밀러 박사는 자신이 개발한 위성자료 분석용소프트웨어를 KIST의 「CDC 921」초대형 컴퓨터에 설치, 원격탐사 노하우를한국 측에 전수한 것으로 가록되고 있다.
이같은 기술 전수에 힘입어 KIST는 80년대초 자체 연구비로 국내 최초의한반도 위성자료 데이터베이스를 만들어 냈으며 밀러 박사의 소프트웨어를완전 국산화하는데 성공하기에 이른다. 이같은 성과는 곧바로 이어진 수자원공사의 제주도 수자원분석, 해양탐사, 자원탐사, 해양지도 제작, 도시계획등 인접 연구분야에 새로운 지평을 열었음은 물론이다.
한편 이때의 인연이 돼 원격탐사팀 연구원 가운데 김의홍(현 KIST지구환경정보연구부장)과 양영규(현 KIST 인공지능연구부장)가 각각 밀러 박사와 무라이 교수를 따라 일본과 미국 유학을 떠나게 된다. 두 사람은 모두 박사 학위를 받아 돌아왔으며 현재까지 이분야의 국내 최고 권위자로 명성을 날리고있다.
<서현진 기자>
작성일자 : 1996.06.13
서현진 기자 E-MAIL:jsuh@www.etnews.co.kr
컴퓨터 파노라마 (24) 도약기 (10) 경제개발 5개년 계획과 3대 전자관련연구소 차례로 돌아가기
새삼스런 말이긴 하지만 긍정적이든 부정적이든 70년대를 전후해서 우리나라 경제 개발을 이끌었던 지주가 경제개발5개년계획 이었음을 부정할 사람은아무도 없다. 그 위력도 대단해서 특히 3차(72~76년)와 4차(77~81년) 기간동안의 경제개발5개년 계획은 경제는 물론 사회 문화 전반에 이르기까지 거의모든 분야를 통제할 수 있는 법 이상의 것이었다. 정부가 경제개발5개년 계획에 과학기술 정책을 본격적으로 포함시킨 것은 4차 때 부터이다.
3차 계획이 무르익을 즈음 정부는 중동전쟁과 석유 파동을 겪게 되면서 경제개발5개년계획이 비약적 경제 성장을 가져왔지만 그 반대급부도 만만치 않아 경제의 대외 의존도 심화라는 현상을 통감하던 터였다. 뿐만아니라 계층간, 부문간, 지역간 불균형 까지 조장함으로써 지속적인 경제성장에 저해 요인이 배태되고 있음도 간파했던 것이다.
4차 계획의 기본 목표가 「자력성장 구조 실현」, 「사회개발 촉진」, 「기술 혁신과 능률 향상」으로 귀착된 것은 이 때문이었다. 이같은 목표설정에 따라 과학기술의 개발 촉진은 4차 계획의 핵심과제로 부상하게 된다.
4차 계획에서 과학기술 개발 전략은 크게 「자체 개발」과 「도입 기술의토착화」라는 2가지 방향에서 접근하고 있었다. 이를 위해 정부는 당시 거의유일한 국책 종합 연구기관인 한국과학기술연구소(KIST)의 역할을 재정립하기에 이르른다. 이를테면 기초과학연구 등 기업과 단위연구소가 할수 없는대형 국책 사업은 KIST가 맡고 현장의 당면 과제는 분야별 전문 연구소를 새로 설립, 역할 분담체제를 갖춘다는 것이었다.
이때 새로 설립되거나 KIST에서 독립된 연구소들이 한국선박연구소, 한국해양개발연구소, 한국통신기술연구소(KTRI), 지역개발연구소, 한국표준연구소, 한국화학연구소, 한국핵연료개발공단, 한국자원개발연구소, 한국기계금속시험연구소, 한국전기기기시험연구소, 한국전자기술연구소(KIET), 한국열관리시험연구소 등이다.
이 가운데 컴퓨터, 전자통신, 반도체등 전자산업 관련된 곳은 한국전자기술연구소(KIET), 한국통신기술연구소(KTRI), 한국전기기시험연구소 등 당시트로이카 불리던 3개 연구소였다. 그러나 이 트로이카 가운데 현재 까지 존치하는 것은 하나도 없다.
KIET는 상공부, KTRI는 체신부, 한국전기기시험연구소는 동력자원부(당시는상공부)가 각각 출연한 것이었다. 역할분담도 서로 다르도록 했다.그런데 문제는 KIET와 KTRI 및 이들 조직을 배출시킨 KIST와의 관계였다. 77년 3월 이3개 연구소 간에 합의된 역할분담 내용을 보면 KIST는 전자재료와 부품, 공정제어계측 등 기초 분야, 한국전자기술연구소(KIET)는 반도체와 범용 컴퓨터, 한국통신기술연구소(KTRI)는 교환, 전송, 단말등 통신기기를 각각 전담하는것이었다. KIST는 그동안 독점해 온 컴퓨터, 통신, 반도체 등 80년대 이후전자산업의 핵이 된 분야를 모두 아우 격인 두 연구소에 넘겨 준 것이다.
(다음 기회에 언급하겠지만 4공화국의 연구소 전문화 방침에 의해 KIST 등에서 분리 됐던 KTRI, KIET, 한국전기기기시험연구소등 3개 연구소 통폐합을 추진한 5공화국 방침에 따라 84년 현재의 한국전자통신연구소(ETRI)로 재 통합하게 되는 우여 곡절을 겪는다)
70년대 말에 동시에 진행됐던 3개 연구소의 출범 과정에 대해 좀 더 자세하게 알아보자. 3개 연구소의 출범 상황을 보면 몇가지 공통점이 있음을 발견할수 있다. 우선 연구소 출범에 대한 법적 근거가 모두 74년부터 발효된「특정연구기관육성법」이라는 점, 설립자 역시 모두 박정희 대통령이라는 점등을 들 수 있다. 출범 시기도 76년 12월 30일로서 모두 같다. 뿐만 아니라출범후 3개 연구소가 모두 4차 경제개발5개년계획의 과학기술 부문 개발을위한 특정 연구 기관으로 지정 됐음은 물론이다.
3개 연구소 가운데 한국통신기술연구소(KTRI)는 전자교환기의 전자교환기의 도입과 개발 사업을 주관하기 위해 76년 KIST부설 한국전자통신연구소(KCRI, 현재의 ETRI와는 다르다)라는 이름으로 먼저 발족됐다.
전자교환기의 도입과 개발에 대한 연구는 이미 66년 출범한 한국전기통신연구소(81년에 출범하게 되는 KETRI와는 다르다)에 의해 추진돼왔고 72년부터는 대통령의 지시에 의해 도입 대상 교환기들에 대한 성능 상의 장단점이파악된 상황이었다. 74년에는 「전자교환방식 공동연구 추진계획」에 따라한국전기통신연구소 내에 전자교환연구부가 구성되고 교환기도입에 대한 본격 연구가 시작됐다.
그러나 75년 이 연구 사업은 『전자교환기를 국내 기술진으로 개발하라』라는 박정희대통령의 지시에 의해 중단되고 만다. 이에 따라 국산 전자교환기 개발을 담당할 새로운 연구소 건립이 추진되는데 이때 발족된 것이 KIST부설 한국전자통신연구소이다. 부설연구소장은 KIST 부소장이던 정만영(전삼성반도체통신 부사장)이었다.
그러나 한국전자통신연구소는 연구소장만 있었지 아무런 준비나 기반이 마련돼 있지 않았다. 이같은 상태의 한국전자통신연구소를 「특정연구기관 육성법」에 의해 77년 12월 인수하고 명칭을 바꿔 산하 특정연구기관으로 탈바꿈 시킨 것이 바로 한국통신기술연구소(KTRI)이다.
KTRI는 77년 12월 10일 서울민사지방법원에서 박정희대통령을 설립자로 하고 출연금 1백만원으로 하는 설립등기가 마쳐짐으로써 정식 출범하게 된다.
초대소장은 정만영이 그대로 이어 받았고 조직의 핵심인 제1연구담당(전송부문) 부소장에는 김종련(현 데이콤 자문위원), 제2연구담당(교환부문)부소장에는 안병성(현 한국정보통신연구소 기술역), 제3연구담당(특수업무 및 통신시스템부문) 부소장엔 경상현(전 정통부장관)이 각각 임명됐다.
통신기기를 제외한 나머지 전자산업 분야 업체들이 큰 호응을 보냈던한국전자기술연구소(KIET)의 출범은 70년대 중반 전자산업 전반에 태동하던 두 갈래의 흐름이 하나로 통합되는 과정을 통해 이루어진 사건이었다. 그갈래의 하나는 정부의 전자공업 육성 정책에 의한 제도적 측면이었고 또 하나는 KIST의 전자 분야 연구진의 기술적 노력의 측면이었다.
제도적 측면의 경우 73년 석유 파동으로 새로운 국면을 맞게 되자 정부는74년 제2차 전자공업 육성책을 발표하는 등 당초 계획의 수정보완에 나서게되는데 이를 계기로 구체화 된 것이 구미 전자공업단지 조성과 한국전자공업진흥회의 출범이다. 정부는 또 전자산업의 핵심인 반도체와 컴퓨터 분야 기술 개발에 지대한 관심을 보여 이미 74년 한국전자기술연구소(가칭)을 등록해 놓고 「특정연구기관육성법」상의 특정 연구기관으로 지정해 놓고 있던터였다.
이런 움직임속에 KIST 측에서는 김만진(재미)과 이용태(현 삼보컴퓨터회장)가 각각 책임자로 있던 부설 반도체기술개발센터와 컴퓨터국산화연구실이정부 의지에 부합하는 각종 연구를 벌여 오고 있었다. 특히 김만진의 노력이돋보였는데 그는 반도체 기술의 중요성을 설파하는 한편 UNDP(유엔개발기금)등 해외 원조기관에 연구 계획서를 제출, 독자적인 자금 확보를 모색키도 했다.
김만진의 이같은 노력이 상공부 전기공업과장 유영준과 청와대 경제수석오원철 등에 수용되면서 비로소 한국전기술연구소의 태동이 시작됐던 것이다한국전자기술연구소는 76년 12월 정부 출연 41억원 등 내자 51억원과 IBRD차관 등 외자 1천1백만 달러를 투입하겠다는 정부 재가를 얻어 구미 전자공업단지에서 정식 출범하게 된다.(전자공업 육성 측면의 출범 비화는 본란 제16회 상공부부상과 한국전자기술연구소 출범 참고)
한편 한국전기기기시험연구소는 출범 당시에는 상공부 산하 특정연구기관이었으나 나중에 전력등 重電 분야를 전담하게 된 점동력자원부로 이관된 곳이다.
발전과 송, 배전 등 동력에 관련된 重電산업은 70년대 전반까지만 해도 초보 단계에 머물러 있었다. 경제개발계획으로 전기 수요의 급증에 따라 중전기 공업 기반이 확대일로에 있었으나 아직 이를 충당할 기술이나 대규모시험설 등이 갖춰지지 않은 상태였던 것이다. 이 때문에 기업들은 외국에서 기술과 부품을 들여와 제품을 생산하고 이의 시험을 다시 외국 기관에 의존하는실정이었다. 지속적인 경제 성장을 위해서는 이에 대한 해결책 마련이 시급했는데 75년 1월 중소기업중앙회에서 주최한 상공부장관과의 간담회에서 短絡시험설비의 필요성이 처음 제기됐다. 이어서 전기공업협동조합에서는 75년도 4대 사업의 하나로 시험소 설치를 계획하고 있었다.
이런 움직임이 가속화되고 있는 가운데 76년 2월 전기학회, 한국전력공사, 한국전기공업협동조합, 한국전기협회 등 21개 기관이 상공부에 모여 한국중전기시험소 설치추진위원회를 발족시키게 된다. 이 추진위원회가 실제 추진한 것은 기존 한국전력 부설 한전기술연구소를 상공부 산하 특정연구기관으로 개편하고 연구 인력과 설비도 그대로 활용한다는 내용이었다. 이 계획은 대통령의 재가를 얻어 그대로 확정됐고 한국전기기시험연구소는 76년 12일30일 창원 기계공업단지 내에서 추진위원위원장이던 정성계(서울대교수)를초대 소장으로 정식 출범하게 된다.
한국전기기기시험연구소의 업무는 주로 중전기 분야에 대한 각종 시험연구를 비롯 전기 용품의 품질 보증 및 검정 등이었지만 이는 과학기술에 관한제반 시험연구와 지원이 수반되는 것이어서 그 업적은 대단했다.
그러나 한국전기기기시험연구소는 출범 4년만인 80년 12월 한국통신기술연구소(KTRI)와 1차 통합돼 한국전기통신연구소(KETRI)로 다시난다.
<서현진기자>
작성일자 : 1996.06.20
서현진 기자 E-MAIL:jsuh@www.etnews.co.kr
컴퓨터 파노마라 (25) 도약기 (11) 차례로 돌아가기
우리나라 컴퓨터역사를 사건과 시대별로 구분해 보면 60년대 도입기, 70년대초 적응기, 70년대 중반 이후 도약기를 거쳐 80년대에는 방황기로 접어든다.
본란 「컴퓨터 파노라마」 역시 이같은 구분에 의해 67년 최초의 컴퓨터 도입 시점에서부터 70년대말 도약기까지 24회에 걸쳐 사건 주제별로 역사를 더듬어 왔다.
이 가운데 도입기는 67년 경제기획원의 「IBM 1401」 도입으로 시작된 우리나라 컴퓨터역사 시동기로서 컴퓨터 활용 및 개발 기술의 산실인 한국과학기술연구소(KIST)의 전자계산소의 탄생을 비롯 한국IBM, 컨트롤데이터코리아(CDK), 한국유니백등 외국계 컴퓨터회사들의 잇따른 국내 진출이 있었다. 우리나라 과학기술 정책의 요람인 과학기술처의 출범도 이 시기였다.
70년 초부터 중반까지의 적응기에는 컴퓨터에서 한글을 구현하기 노력의일환으로 한글프린터가 처음 개발됐고 중학교 무시험 추첨과 대학예비고사채점 및 전신전화 요금수납 자동화 등 대량 업무의 전산화가 착착 진행되는시기다. 또 KIST와 경제기획원 간에 이루어진 국내 최초의 데이터통신, 숭실대, 홍익대 등 대학가의 전산학과 설치, 금융기관 공동 컴퓨터센터인 금융단전자계산본부(KBCC)의 설립 등이 이루어 진다. 그러나 이 당시 컴퓨터가 마냥 문명의 이기만은 아니라는 사건이 벌어지는데 그것이 바로 국내 최초의컴퓨터 범죄로 기록되고 있는 반포 AID차관아파트 부정추첨 건이다. 그러나이 시기는 산업적으로 최초의 국산컴퓨터 「세종1호」의 개발을 비롯 컴퓨터판매 또는 소프트웨어 용역을 전문으로 하는 기업들이 대거 등장하는 등 산업적 기반을 닦는 시기이기도 하다.
70년 중반에서 후반까지의 도약기에서는 정부의 경제개발5개년 계획에 따라 컴퓨터가 경제발전과 수출산업 육성의 전략분야로 부상하는 시기로서 상공부와 체신부를 비롯한 정부부처 산하 각종 핵심기술연구소들이 출범함으로써 기반기술 지원 환경이 조성되는 등 신업적 도약의 발판을 마련하게 된다. 삼성과 금성 등 대기업들의 컴퓨터산업 참여러시가 이루어지는 것도 이때다. 그동안 컴퓨터와는 무관하던 방면에서도 컴퓨터 산업의 도약을 점쳐 보게되는데 전경련이 컴퓨터 산업을 괄목상대하게 돼 정보산업협의회를 발족시킨것이나 내무부와 총무처가 전국 기관의 행정전산망 도입 검토한 것 등이 그것이다. KIST의 일궈낸 성과로는 컴퓨터 원격탐사에 의한 대한민국 지도의재작성 등을 꼽을 수 있다.
도약기에 이어지는 80년 부터 86년 서울 아시안게임 직전까지는 우리나라컴퓨터 역사상 방황기에 해당되는 시기다.
이렇게 시대 구분을 할 수밖에 없는 것은 우리나라의 컴퓨터 산업과 환경이 정부의 각종 정책 의지에 의해 형성되고 확산됐다는 특성을 내포하고 있기 때문이다. 이를테면 통치자가 바뀌는 5공화국은 3~4공화국 때 펼쳐진 컴퓨터 관련 정책들이 대부분 뒤바뀌거나 새로 마련되는 등의 우여곡절을 겪는다. 물론 5공화국때는 컴퓨터뿐만 아니라 정부의 과학기술정책 전반에 대한기반이 새로 만들어지는 시기이다.
그러나 방황기라는 표현을 쓴 것은 반드시 3~4공화국 때의 정책들이 뒤집혀졌기 때문만은 아니다. 실제 80년대에는 전 세계적으로 과학기술 특히 반도체나 소프트웨어 등 컴퓨터 관련 기술의 비약적 발전이 이루어 지는 시기이다. 예컨대 반도체의 경우는 16Kb과 64Kb급 D램 등 메모리 분야, 80286과80386 등 마이크로프로세서 분야의 고집적도 경쟁이 본격화되는 시기이다.
또 소프트웨어 분야는 텍스트 위주 방식에서 그래픽 처리를 포함하는 방향으로 선회하면서 PC나 매킨토시 같은 데스크톱 컴퓨터들이 초강세를 보이는 등컴퓨터사용자 환경의 엄청난 변화를 예고하던 시기였던 것이다.
따라서 당시 이같은 흐름에 대한 정부정책과 업계 적응 노력은 상당한 혼선과 시행착오를 거쳤을 법하다. 방황기라는 표현은 이런 노력들이 한데 어울러져 우리나라 컴퓨터 역사가 80년 후반의 정착기로 들어서는 단초를 마련한다는 취지에서 비롯된 것이라 할 수 있는 것이다.
이런 점에서 이번 회에서는 본격적인 80년대 방황기로 넘어가기 앞서 그의미를 더욱 분명하게 새겨보는 기회를 갖고자 60년대~70년대 우리나라 컴퓨터역사를 연대기로 정리 해보기로 한다.
도입기
<1961년>
3월, 내무부 통계국 천공카드시스템(PCS) 1백30대 도입
<1964년>
5월, 한양공대 이만영 박사 전자관식 아날로그 계산기 개발
<1966년>
2월, 한국과학기술연구소(KIST) 출범 10.한국생산성본부, 전산화 교육 위해 전상호등 명 일본 후지쯔에 파견
<1967년>
1월, 한국생산성본부 전자계산소 발족
4월, 경제기획원 통계국, 인구센서스 처리업무를 위해 IBM 1401도입(국내최초), 과학기술처 출범, 한국IBM 창립
5월, 생산성본부, 파콤222 도입, 과기처, 전자계산기 사용개발 계획 발표
6월, KIST 전자계산실 발족 및 CDC 3300 도입
9월, 과기처 전자계산조직개발위원회 설치, 컨트롤데이타코리아(CDK)창립
10월, 재단법인 한국전자계산소 발족
<1968년>
3월, 성균관대, 전자자료처리학 전공 석사과정 신설
4월, 과학기술처 공무원 전산교육 실시
5월, 유한양행, IBM 1401 도입(민간 최초), 육군본부, 유니백9300도입
10월, 한일은행 NCR 500도입, 한국유니백 창립
<1969년>
1월, 서강대, 유니백 SS-80도입(대학 최초)
7월, 국세청, CDC3250 도입
9월, 국립건설연구소 파콤230-10도입
10월, 금융단전자계산본부(KBCC)발족, 연세대, 유니백SS-80도입, 서울 홍릉에 KIST단지 준공, 락희(현 LG화학), IBM 360-25도입
12월, 숭실대, IBM 1130도입
적응기
<1970년>
1월, 외환은행 NCR C-100도입
2월, 중학교 컴퓨터 무시험 추첨
3월, 숭실대 전자계산학과 설치(대학 최초)
4월, 과기처산하 중앙전자계산소(현 정부전자계산소) 발족, KIST와 경제기획원 데이터통신(국내 최초)
7월, KIST, 체신부 전화국요금관리업무 전산화 개발
10월, 농촌진흥청, 파콤230-10도입
11월, KIST, 한글라인프린터 개발
<1971년>
1월, 부산은행, 버로스 E-8000도입(지방은행 최초)
2월, 대한항공 IBM 1130도입
3월, 고려대, 전자정보처리전공 석사과정 신설, 스페리랜드코리아(현 한국유니시스) 창립
4월, 한국전자계산주식회사(KCC)창립
5월, 한국보험전산(현 교보전산)창립
7월, 한국전력, IBM 360-40도입
9월, 철도청, 유니백9400도입
12월, KIST, 덕수상고에 단말기 설치(고교 최초), KIST, 대학예비고사 채점 전산화
<1972년>
1월, 연합철강, IBM 360-25 도입
3월, 광주컴퓨터센터 창립(지방 최초), 한국전기통신연구소, PDP 8/E(국내최초 DEC기종)
10월, KIST방식기기실 노바01(최초 데이터제너럴기종) 도입, 치안본부, 유니백9400도입, 주민등록전산화
11월, 외환은행, 서울-부산자점간 온라인 개통(국내 최초)
<1973년>
2월, 한국정보과학회 탄생, KIST, 국산 컴퓨터 1호 세종 완성
9월, 영남대, 파콤 230-25 도입(지방대 최초)
10월, 관세청, 유니백9480 도입, 반포AID아파트 부정추첨사건(최초의 컴퓨터 범죄)
11월, 호남정유, IBM 1130 도입
<1974년>
2월, 대한조선공사 IBM 370-135도입, 화콤코리아(현 한국후지쯔) 창립
5월, 목포상고, 노바01 도입(고교최초)
6월, 건설부, CDC 3170 도입
8월, 체신부, 유니백 1106 도입
9월, 제일모직, IBM 370-135도입
도약기
<1975년>
1월, 박대통령, 행정전산화 추진 지시
2월, 동양전산기술 창립
6월, 총무처, 행정전산계획관실 설치
8월, 정부 행정전산화추진위원회 구성, 서울시, 유니백 90/60 도입, 금성사(부산), IBM 370-115 도입
9월, 동양전산기술, 「오리콤540」개발(최초 국산 OEM기종)
<1976년>
2월, 한국전자공업진흥회 창립총회
4월, 월간 컴퓨터 창간(국내 최초 컴퓨터전문지)
10월, 삼성전자, 미HP와 계약체결 컴퓨터 판매사업진출
11월 , KIST와 금성전기, GSCOM-80A(최초 국산마이크로 컴퓨터) 및 잉크젯프린터 개발
12월, 한국전자기술연구소(KIET), KIST부설 한국전자통신연구소(KCRI), 한국전기기 기시험연구소 발족
<1977년>
2월, 과기처 정보산업국 둘내 컴퓨터실태조사(국내 최초)
9월, 상업은행 보통예금 온라인실시(국내최초)
10월, 문교부, 전국 8개 국립대학에 HP기종 보급
11월, 한국은행, 사이버71기종 도입
12월, 한국통신기술연구소(KTRI)발족 <사진>
<1978년>
2월, 총무처, 행정전산화 기본계획 발표
3월, 삼성전자공업, 한글모아쓰기 CRT단말기개발(국내 최초)
7월, 행정전산 시버사업 추진(충북도청)
8월, 금성사 컴퓨터사업부 신설
12월, 대신증권, 증권업무 전산화(국내최초)
<1979년>
2월, 중앙일보, 자체 전산실 운영(언론사 최초), 전경련, 정보산업협의회 발기
9월, KIST, 후지쯔에 국산 소프트웨어 수출(국내 최초), KIST, 원격탐사로 서해안 새로운 섬발견
10월, 한국일보, 컴퓨터 한글자동문선 및 식자기 개발(국내최초)<서현진 기자>
작성일자 : 1996.06.27
서현진 기자 E-MAIL:jsuh@www.etnews.co.kr
컴퓨터 파노라마 (26) 방황기 (1) 컴퓨터 도입 승인기준이 마련되다 차례로 돌아가기
1967년 경제기획원에 「IBM 1401」이 도입된 이래 80년대 말까지 우리나라에 설치된 거의 모든 컴퓨터는 정부의 승인이 있어야만 도입(수입)이 가능했다.
정보산업을 총괄하고 있던 과학기술처는 80년 11월 시대에 걸맞는 새로운컴퓨터 도입기준을 마련하는데 이것이 바로 「전자계산조직 도입승인 기준」이다. 이 기준을 토대로 정부는 과기처 차관을 위원장으로 하는 전자계산조직도입심의위원회를 정기적으로 열어 기업(또는 기관)이 신청한 컴퓨터도입신청서를 심의 도입승인 여부를 결정했다.
지금은 아무런 쓸모가 없어졌지만 이 도입 기준은 국내 컴퓨터 산업 발전과 정보화 촉진 과정에 상당한 관계와 의미를 갖고 있었다. 국내에서 필요한컴퓨터의 99%를 외국에서 수입해 오던 시절이었다. 당시 우리나라 컴퓨터 산업의 발전이나 정보화의 시작이 이 도입기준에서부터 비롯됐다는 말이 나올법도 했다. 공급자(수입판매자)와 수요자(사용자)간 의무와 역할까지를 규정하고 있다는 점에서 이 도입기준이 우리나라 정보산업 발전 방향을 제시한최초의 母法이라고 주장하는 이도 있을 정도다.
실제 컴퓨터 도입 기준은 별다른 정보산업 관련 법규가 없었던 상황에서생산성 향상을 위한 기업 전산화의 촉진제 역할을 해냈고 컴퓨터 업계 측면에서도 기업 생존에 절대적인 영향을 미치고 있었던 것이다.
80년대 과기처 공보실이 수행했던 업무 가운데 하나는 도입기준에 따라 컴퓨터 도입 승인을 얻은 기업(수요자)과 도입기종 리스트를 언론에 발표하는것이었다.
발표 주기는 처음에는 반기별로 하다 분기별로 이어졌고 나중에는 매달로회수를 눌려나갔다. 이렇게 발표된 리스트는 업계에서 큰 뉴스거리가 됐다.
경쟁기업들은 도입 컴퓨터 기종의 규모나 사양으로 미루어 상대 기업의 경영전략을 짐작할 수 있었고 해당 기업 측에서는 컴퓨터 도입 그 자체만으로 기업의 위상을 대내 외에 알릴 수 있었기 때문이다.
정부의 컴퓨터 도입 심의는 67년 과기처 출범과 함께 마련된 「전자계산기사용 개발 7개년 계획」에 따라 같은 해 9월 전자계산조직개발조정위원회를설치하면서 시작됐다.
그러나 이때의 심의는 당시 우리나라의 컴퓨터 총 도입 대수가 2~3대에 불과했고 소프트웨어 용역 등 컴퓨터 기본 운영 환경을 받쳐주는 분야가 전무했다는 점에서 수요자의 무분별한 컴퓨터 도입을 통제하려는 의도가 다분했었다.
전자계산조직개발조정위원회의 결정에 따른 실무나 조정 역할은 초기에는과학기술처 진흥국이 맡았다. 컴퓨터 관련 정책업무가 점차 확대되기 시작한71년부터는 컴퓨터 산업을 제도적으로 뒤바침하기 위해 조직된 정보관리실이주관했다. 정보관리실은 75년 정보산업국으로 확대 개편되는데 이곳에서 79년 9월에 마련한 것이 바로 「전자계산조직 도입 심의 기준」이다. 이 기준은 컴퓨터도입 심의를 처음으로 문건화 한 것으로 의미가 있다. 이전까지의도입 심의는 어떤 기준이 없이 이루어졌다는 얘기다.
79년 기준은 76년 이후 급증하기 시작한 컴퓨터 도입 수요에 효율적으로대처한다는 목표에 의해 마련됐다. 실제 73년의 경우 한해 동안 도입된 컴퓨터 대수가 12대에 불과하던 것이 75년 22대, 77년 50대, 79년 1백72대 등으로급증하기 시작했다. 기업과 기관의 컴퓨터 도입 신청이 급증하자 전자계산조직개발조정위원회는 79년 들어서부터는 이틀에 1대꼴로 도입 심의를 해야할지경에 이르게 됐다. 결국 과기처는 도입 심의에 대한 일종의 가이드 라인의필요성을 느꼈고 이렇게 해서 「전자계산조직 도입심의 기준」이 마련됐던것이다.
79년 기준은 크게 3가지 항목으로 구성돼 있는데 컴퓨터를 판매하려는 공급자(수입자)에 대한 자격 요건을 규정한 「기본지침」, 컴퓨터를 도입해서사용하려는 수요자 측의 「수용태세」, 도입 후 공급자가 수요자에게 기술공여 등을 권장하는 「경과조치」 등 이었다.
그러나 이 기준은 도입 심의 가이드 라인으로서 기능은 그런대로 쓸 만했지만 규정이나 내용이 지나치게 형식적이고 포괄적이어서 시대 상황에 적합하지 못했다. 67년의 경우에서 처럼 컴퓨터 도입을 적극 권장하기보다는 통제 성격이 강해 산업적 측면에서 악법의 소지가 다분했다는 점과 각각의 규정이나 조항의 의미도 애매하다는 점 등이 주된 지적 사항이었다. 예컨대 『중형급 이상 컴퓨터 도입은 과기처 장관이 인정하는 컴퓨터 국산화 또는 전자산업 발전에 기술기여도가 높은 공급업체에 공급 우선권을 부여한다』라거나 『업무의 내용, 성격 및 기타 사항으로 보아 전산화가 절실히 요구되고있는지의 여부를 따진다』라는 조항들이 그 단적인 예였다.
80년 11월에 마련된 「전자계산 도입 승인 기준」은 79년 기준에서 나타난문제점을 해결하고 보완하기 위한 성격이 강했다. 이 기준에는 문건 규모가표준 문서 용지로 5장이 넘었을 만큼 매우 구체적인 규정과 내용들이 담겨있었다.
80년 기준은 공급자의 요건 구비 도입금지 대상 공급자와 사용자간 계약사용자의 요건구비 등 크게 4가지로 돼 있었는데 모든 규정이 79년 기준과달리 객관적인 수치로 구체화 돼 있는 것이 특징이었다. 우선 공급자는 공급기종 유형별로 일정한 숫자의 엔지니어들을 보유해야 하고 일정한 양의 유지보수용 부품을 구비하고 있어야 했다. 또 고장 등 비상시를 대비한 백업용기종과 유지보수 체제를 반드시 갖추도록 의무화 했다.
도입금지 기종으로는 발표시기를 기준으로 임대차의 경는 5년 이상, 직접구입시는 3년 이상된 기종을 대상으로 했다. 이미 업그레이드 됐거나 대체기종이 발표된 제품도 금지 대상에 포함시켰다. 정부의 표준화 방침에 부합하지 못하는 기종도 마찬가지였다.
계약규정에서는 공급가격 및 유지보수 비용규정 원칙과 예외 조항이 명시돼 있고 사용자의 요건 구비항목에서도 도입 사전준비, 개발요원 확보, 전산실 설치 등 전담조직기구 마련 요건이 객관적인 수치로 규정돼 있다. 이처럼도입 기준을 구체적으로 적시해 놓은 것은 공급자나 수요자가 이를테면 객관적인 조건만 갖추고 있으면 언제든지 컴퓨터 도입을 승인하겠다는 뜻이었다.
이에 대해 당시 과기처에서 80년 기준안 마련에 참여했던 Q씨는 다음과 같이 회고하고 있다.
『79년 기준은 지나치게 형식적이었던 데다 심의 과정에서도 주관적 심의의 소지가 다분했었지요. 80년 기준은 신청한 사용자 기관에 관계 없이 조건만 갖추면 도입이 가능토록 하는 일종의 자동승인 체제를 기반으로 작성됐습니다. 심의위원회의 심의 기능을 대폭 축소했다고나 할까요. 한마디로 국내외 적으로 대세가 돼버린 컴퓨터 도입을 정부가 일일히 통제할 수는 없다고본거죠. 또 심의에 몇 달씩 소요돼 전산화 일정에 차질을 빚기가 일쑤였던도입 기업과 기관들이 크게 환영했던 것으로 기억됩니다.』
실제 과기처는 80년 기준 마련에 앞서 향후 국내 컴퓨터 설치 예상치를 조사했는데 80년 6월말 현재 총 누적대수가 4백75대이던 것이 83년에는 한해에만 4백20대, 86년에는 6백7대가 각각 도입될 것으로 분석돼 있었다. 이와는별도로 판매가격(FOB)기준 10만 달러 미만인 미니컴퓨터와 마이크로컴퓨터도83년 1천7백70대, 86년 5천7백여대가 각각 도입될 전망이었다.
과기처로서는 79년 기준 마련 당시와는 엄청나게 달라지고 있는 산업환경을 직시하지 않을 수 없었던 것이다.
그러나 과기처가 80년 기준을 마련한 이면에는 이같은 산업환경의 변화 요인 외에 더 복잡한 사연이 있었다. 기준안 마련에 참여했던 다른 Q씨의 회고.
『80년 기준 마련은 상공부의 전자공업진흥법 개정 방침과 무관하지 않았습니다. 당시 상공부는 향후 전자공업의 발전이 컴퓨터 등을 중심으로 이루어져야 한다는 여론을 등에 없고 「전자계산조직을 전자공업의 범위 안에 포함한다」라는 조문을 81년 개정 예정인 전자공업진흥법에 추가시킨다는 방침을 정해 놓고 있었죠.(본란 제16회 「상공부의 부상...」참조) 과기처로서는정보산업 영역 관할권 고수를 놓고 상공부와 정면 대결이 불가피한 상황이었습니다. 이에 앞서 79년에는 전경련이 경제발전을 위해서는 컴퓨터 수입 제한을 완화해 줄 것을 정부 측에 요청(본란 제22회 「전경련의 보고서와 과기처」참조)하던 터여서 과기처로서는 사면초가의 압력직면해 있었지요.』
Q씨의 말대로라면 과기처의 81년 도입기준 마련은 경쟁부처의 경쟁의식이나 여론의 압력을 피해 정보산업 관할권을 지키려는 고육책이었던 측면이 없지 않았던 것으로 보인다. 어떻게 해서든 정보산업 분야 母法 격인 컴퓨터도입기준과 도입 심의 기득권을 유지하고자 했다는 것인데 이를 위해 과기처는 결국 전자계산조직도입심의위원회의 권한을 대폭 축소하는 내용의 80년기준을 마련한 셈이다.
<서현진 기자>
작성일자 : 1996.07.04
서현진 기자 E-MAIL:jsuh@www.etnews.co.kr
컴퓨터 파노라마 (22) 방황기 (2) 차례로 돌아가기
80년대 초반, 그러니까 5공화국 초기 정부의 컴퓨터 국산화에 대한 열의와맹신은 3~4공화국 때에 못지 않았다. 당시 신문, 잡지의 관련 기사나 관계자들의 회고를 들어보면 그 강도가 오히려 훨씬 강했음을 알 수 있다. 이를테면 한번 정해진 정부의 업무처리규정이나 시행령 같은 것도 정부의 컴퓨터국산화 의지 실현에 필요하다면 심지여 개정 보름여 만에 다시 개정해 버리는 일도 서슴지 않았다.
지난 회(21회)의 본란에서는 70년대 말 「전자계산 도입 심의기준」에 이어 80년 11월 과기처가 새롭게 마련한 「전자계산조직 도입 승인 기준」에대해 적은 바 있다. 또 이 기준이 일정한 조건만 갖추면 누구나 컴퓨터 도입(수입)이 가능케 한 일종의 자동 승인 체제였다는 것도 설명한 바 있다.
당시 과기처에는 「전자계산조직 도입 승인 기준」 말고도 이 기준의 시행세칙격인 「전자계산조직 도입 업무처리 규정」이라는 것이 있었다. 이는 컴퓨터의 도입 승인 신청서 제출 요령이나 양식 업무 또는 수입 추천업무 등의규정을 골자로 하는 것으로서 77년 제정 이래 81년 6월 8일 까지 모두 3번의개정이 이뤄졌다. 그런데 이 규정이 3차 개정이 있은 후 정확하게 16일만인6월 24일 순식간에 4차 개정이 이루어 지는 우여곡절을 겪게 된다.
정부의 4차 개정에 대한 뜻은 몇 달만에 곧이어 2가지 결과로 나타났다.
그 하나는 같은 해 7월3일 정부가 86년까지 1백35억원의 연구개발 자금을 민간 업체에 지원하는 등 컴퓨터 국산화를 국책사업으로 설정했다는 발표였다.
또 하나는 그로부터 2개월 뒤인 9월4일 컴퓨터 국산화 지원에 대한 첫 조치로서 컴퓨터도입 심의 기관인 이전자계산조직개발조정위원회는 이날 열린제5차 도입심의회의에서 한국은행, 한국전력 등 공공 기관이 신청한 87대의CRT터미널과 64대의 데이터 모뎀의 도입을 전격 중단시킨 것이다. 이들 제품은 IBM, 후지쯔, NCR 등 외국계 회사로부터 도입하려던 것이었는데 중단 이유는 이 품목들이 국산화를 추진하는 회사들에 의해 국산화됐거나 국산화 중이어서 이를 보호하겠다는 명분이었다.
「전자계산조직 도입 승인 기준」에서 공급자(수입자)와 수요자(사용자)가일정한 조건만 갖추면 도입 자동 승인된다던 것이 엇그제의 일이었던 터라외국 컴퓨터 공급 업계, 국산화 업계, 사용자 등 3자가 일희일비할 수 밖에없는 상황이 벌어진 것이다.
「전자계산조직 도입 업무처리 규정」의 3차 개정의 골자를 보면 도입 심의 기준에서 국산화 여부에 관련, 3개 조항을 추가 보완하는 것이었다. 도입기종이 표준화와 공동 활용 목적에 부합하지 않거나 국산 대체가 가능한 것은 심의를 보다 엄격하게 적용하겠다는 내용이었다. 그런데 불과 16일 만에있은의 4차 개정에서는 여기에 다시 공공기관과 민간업체에 대한 심의 기준을 달리 적용한다는 것이 추가된 것이다.
3차 개정 때만 해도 공공, 민간 구분이 없이 30만 달러 이상 컴퓨터에 대해서만 일률적으로 심의 기준을 적용했는데 4차에서는 공공기관의 경우 10만달러 이상으로 그 대상을 대폭 낮춰버린 것이다.
엄격한 심의 기준을 적용한다는 것은 그 대상에 국산화 품목이 있을 경우는 외국 기종의 도입을 사실상 금지한다는 의미였다. 한국전력 등이 도입 신청했다 기각당한 CRT터미널과 데이터 모뎀은 동양나이론(효성컴퓨터), 대한전선, 동양정밀, 삼성전자 등에 의해 국산화가 진행되고 있는 분야 였다.
이와관련 당시 우리나라 정보산업 정책을 실무 총괄 과기처 정보산업국장최영환은 한 신문 인터뷰에서 『국산화 진전도에 따라 공공기관에 대해서는국산제품을 활용토록 조치할 것이며 민간 부문에 대해서도 이 조치를 확대해나갈 것』이라고 언급, 파문을 일으킨다. 국산화 품목들을 성능이나 안전성에관계없이 우선 통제 가능한 공공기관부터 반 강제로 공급함으로써 정부의 컴퓨터 국산화 시책을 강력하게 밀어부치겠다는 방침임을 암시하는 대목이다.
당시 언론들은 「전자계산조직 도입 업무처리규정」에 대한 3~4차 개정에대해서는 직접적인 관심을 보이지 않았지만 한국은행 등이 신청한 CRT터미널과 데이터 모뎀이 전자계산조직개발조정위원회의 결정에 의해 도입 중단됐다는 뉴스에 대해서는 대서 특필하는 열의를 보였다.
이같은 결정에 대해 언론들은 외국컴퓨터공급업계, 국산화 업계, 사용자등 3자의 서로 다른 입장을 대변하는 내용들을 싣고 있어 흥미롭다. 당시 신문, 잡지 내용을 재구성하여 각각의 입장을 들어보자. 당시 정부정책이 얼마나 강성이고 독단적이었나를 그대로 보여준다. 우선 외국컴퓨터 공급업체들의 입장.
『(비록 외국제품을 수입해오긴 하지만) 우리도 CRT분야에 국산 시제품을갖고 있다. 국산화 시책은 찬성하지만 이번 조치에 앞서 어떤 경과조치 같은것이 필요했었다고 본다. 권고사항이었던 것이 갑자기 의무사항으로 바뀌면사용자 입장에서도 크게 당황할 것이 아니겠는가...』동아컴퓨터(NCR공급선), R전무
『이 시점에서 완전히 국산으로 대체한다는 것은 기술과 노하우 측면에서무리이다. 앞으로 1∼2년 후 정식제품이 나온다고 하는데 그때까지는 기다려야 하는 것 아니냐. 국산화 조치는 찬성하지만 컴퓨터를 국산화 한다는 명목으로 국산화 업체만 보호하는 결과만을 낳을까 우려된다』스페리코리아(현한국유니시스), K상무
『이번 조치는 국가에서 여러 면을 고려한 조치로 생각되기 때문에 (성급하다느니, 너무 늦었다느니) 가타부타 애기할 수는 없다. 하지만 정책은 사용자들이 전산화를 성공적으로 이끌수 있는 방향으로 정해져야 한다는 것이 내개인적 소견이다』한국IBM, K상무
『이번에 한국전력에서 도입키로 한 CRT는 더미형이 아닌 인텔리전트형이다. 물론 국산대체가 불가하다는 것은 아니다.그러나 그럴 경우 더미터미널에 고가의 미니컴퓨터를 붙여야 하는 2중 낭비가 발생한다. 무조건 묶어둘 것이 아니라 기술적, 기능적으로 세분해서 조치를 적용할 필요가 있다』화콤코리아(현 한국후지쯔), H상무
사용자 입장 역시 공급업체들과 대동소이한 입장을 보이고 있다.
『다른 은행과 달리 우리는 이번 도입 금지 결정에 묶인 품목이 CRT 3대 밖에 않돼 큰 지장이 없을 것으로 보여 일단 다행스럽다. 그러나 이번 조치는 1년 정도의 유예기간을 뒀으면 하는 생각이다. 업계나 사용자들이 준비할 수 있도록 정책에 대한 사전 홍보가 필요다는 것이다』한국외환은행 K부장
반면 국산화 업체들은 외국 공급사들을 의식, 적어도 겉으로는 침착한 태도를 일관하고 있으나 정부조치가 매우 흡족함을 굳이 숨기지는 않고 있다.
『터미널이나 마이크로컴퓨터 수입을 전면 금지하라고는 할수 없다.그러나컴퓨터산업을 육성한다는 입장에서 보면 이번 조치는 당연하다는 생각이다.
국산이 기술적으로 문제가 있고 미국 등에 비해 크게 뒤졌다고는 하나 한번만든다고 결심하면 어떤 것이든 해낼 자신이 있다』대한전선, K부사장
『우리 회사 제품은 지금 당장 적용 가능하다. 따라서 이제는 사용자들의인식 제고와 이에 대한 정부의 홍보 등 후속조치만 남아 있다. 선진국의 기술개발 사이클 때문에 우리가 전면적으로 도전하는 것은 불가능하다. 하지만이번처럼 가능한 범위부터 설정, 추진하면 해결할 수 있다』동양나이론, K상무
『국산에 대한 선입관은 무서운 것인데 누구를 탓할 수는 없지 않은가. 문제가 있다면 IBM 등 외국회사들이 본체에 자사가 개발한 터미널만 부착할수 있도록 하는 정책을 펴왔다는 것이다. 이번 조치를 계기로 국산 사용자에대한 세재 혜택등 현실적인 정책 지원이 필요하다고 본다』동양정밀, K전무
한편 80년대초 국내 업계의 컴퓨터 국산화 움직임은 분야별로 다양하게 시도됐던 70년대의 그것과는 달리 보다 구체화되고 있음을 볼수 있다. 예컨데70년대 중반이후 부터 본격화된 국산화 움직임은 대략 3가지 방향으로서 하나는 동양전산기술이 미국 디지탈(DEC)사의 핵심부품을 들여와 미니컴퓨터를조립 생산하는 것이었고 또 하나는 금성전기 등이 중심이 돼 당시 급부상한인텔사의 8080 마이크로프로세서 기반의 8비트 마이크로컴퓨터를 개발하는일이었다. 세번째는 중대형컴퓨터용 한글CRT단말기의 개발이었다. 이 세번째움직임이 바로 80년대 초반 컴퓨터 국산화 움직임에 직접적인 뿌리가 닿고있다고 볼수 있다.
80년대 초반 업계는 정부의 강력한 국산화 시책에 힘입어 CRT와 모뎀등우선 가능한 분야부터 파고 들었는데 이때부터 유행한 말이 이른바 『국산고유 모델의 개발』이라는 말이었다.
대표적인 기업으로는 오리콤(동양전산기술의 후신), 삼성전자, 금성반도체, 동양정밀, 삼성전관 등이었는데 이들은 70년대 말 모방 단계에서 벗어나정부 시책을 토대로 선진 원천기술을 그대로 국산화하겠다는 의지에 불타 있었다.
<서현진 기자>
작성일자 : 1996.07.11
서현진 기자 E-MAIL:jsuh@www.etnews.co.kr
컴퓨터 파노라마 (28) 방황기 (3) PC산업의 태동 차례로 돌아가기
오늘날 소형컴퓨터 또는 개인용컴퓨터를 PC라고 부르는 것은 새삼스런 일이 아니다. 또 PC라는 말이 Personal Computer의 첫자를 딴 약어이기에 앞서81년 8월 IBM이 발표한 「IBM PC」라는 고유 상표명에서 따왔다는 것도 널리알려진 얘기다.
81년 미국 라스베이거스 컴덱스쇼에서 발표된 IBM PC는 인텔의 8비트 마이크프로세서 8080A를 CPU로, 마이크로소프트의 「MS DOS 1.0」을 운용체계로탑재한 것이었다. 오늘날 PC는 대부분 이 IBM PC의 아키텍처 규격을 따르고있고 실제로 소프트웨어적인 호환기능이 제공된다. IBM PC와 호환이 가능한PC를 특별히 IBM호환PC라고 부르기도 한다.
우리나라에서 PC라는 말이 처음 사용되기 시작한 것도 81년부터다. PC라는말이 이렇게 빨리 사용된 것은 뉴스위크와 타임지 같은 주간지, 또는 뉴욕타임스 등 유력 일간지들이 IBM PC 발표기사를 대서 특필했기 때문이다. 이 유력 주간지나 일간지들은 PC가 당시 매우 생소한 단어였지만 IBM이라는 초대규모 공룡기업이 발표한 새로운 컴퓨터라는 점에서 그 장래성을 의심하지는않았다. 그러나 그당시 우리나라에서 사용되던 PC라는 말은 IBM PC와는 무관했다.
80년대 초반 국내에서 PC라 불리던 컴퓨터들은 미국 애플의 「애플」 탠디의 「TRS 80」 일본의 아스키와 마이크소프트가 공동개발한 「MSX」 미국 오스본의 「오스본」 국내 삼보전자(현 삼보컴퓨터)의 「SE 8001」 등이었다.
IBM PC가 발표되기 전까지 이들은 모두 마이크로컴퓨터라는 이름으로 불렸다. 대개는 인텔의 8080A, 모토롤러의 6800A, 자일로그의 Z-80, 페어차일드의 F-8과 같은 8비트 마이크로프로세서가 CPU로 장착돼 있고 주기억기억장치로는 32~6백48 정도의 램(RAM)이 사용됐다.
마이크로컴퓨터라는 개념은 국내에서 두가지로 통했는데 하나는 인텔이나모토롤러의 마이크로프로세서를 CPU로 채용했음을 의미하는 것이었고, 또 하나는 컴퓨터 성능이나 용량의 크기를 나타내는 등급의 한 단위로였다. 당시통용되던 컴퓨터의 등급에는 대형(메인프레임), 중형, 소형, 미니컴퓨터와같은 것이 있었는데 마이크로컴퓨터는 미니컴퓨터 다음으로 최하위 기종을뜻했다. 80년 11월 과기처가 마련한 「전자계산조직 도입승인 기준」을 보면등급별 기종을 판매가격(FOB)으로 구분하고 있음을 볼 수 있는데 대형은 70만달러 이상, 중형은 30만달러 이상, 소형은 10만달러 이상, 미니컴퓨터는 2만달러 이상, 마이크로컴퓨터는 2만달러 미만의 컴퓨터로 정의하고 있다.
마이크로컴퓨터, 아니 PC는 애플 등 외국제품이 3백만∼4백만원을 호가, 지금의 펜티엄급 PC보다 훨씬 비쌌고 국산인 삼보전자의 SE 8001도 2백만50만원을 넘었다. 당연히 일반인보다는 교수, 연구원 등 특수 계층이 주된 사용자였다.
PC의 공급은 유일한 국산제품을 생산하고 있던 삼보전자를 비롯, 애플의국내 총대리점 한국소프트웨어(뒤에 삼보컴퓨터에 흡수)와 국내 최초의 바이트숍(BYTE Shop) 방식의 공급체계를 지향했던 엘렉스(뒤에 한국소프트웨어와함께 삼보컴퓨터에 흡수) 등이 독보적 위치를 차지하고 있었다. 특히 엘렉스가 도입한 바이트숍은 많은 개발 및 지원 인력체제가 필요한 기존 메인프레임 공급방식과는 달리 가전제품처럼 거리의 상점에서 컴퓨터를 판매한다는개념으로 엄청난 파문을 불렀다. 75년 미국에서 처음 출현한 바이트숍은 77년 출범한 래디오 샥이나 컴퓨터랜드와 같은 프랜차이즈(연쇄점)형태로 발전했고 80년대들어서는 PC 산업의 폭발적 확대에 지대한 역할을 했다.
삼보전자와 엘렉스 외에 PC의 공급에 가세한 업체들은 초창기 청계천 컴퓨터상가를 일구어 낸 희망전자, 홍익컴퓨터, 로얄컴퓨터, 에이스컴퓨터, 골든벨, 한국마이컴, 브레인컴퓨터, 석영전자 등 이른바 조립PC 제 1세대들이었다. 이들은 오디오 조립키트가 판을 치던 청계천 상가 3층에 바이트숍 형태의 소규모 점포를 내고 6800A와 Z-80기반의 본체만을 조립, 저가로 공급함으로써 특히 학생들에게 큰 인기를 모았다. 제1세대 조립업체들이 공급한 제품은 주로6800A 기반의 애플II 복제품이었다. 이들은 마이크로프로세서, 주기판, 플로피디스크드라이브, 카세트 레코더, 입출력용 인터페이스, 모니터 등을 대만등에서 개별적으로 구입해서 지적재산권이 엄연했던 제품을 그대로 복제, 공급함으로써 짭짭한 재미를 보았던 것이다.
삼보전자나 청계천 조립 제1세대... 물론 이런 상황만을 놓고 우리나라 PC산업의 태동을 이야기할 수는 없을 터이다.
우선 당시 대부분의 회사들이 주식회사의 형태를 취하고 있기는 했으나 자본금 1천만원 미만에 종업원도 서너명 수준인 초미니 기업을 벗어나지 못하고 있었다. 또 조립PC 제1세대들도 대부분 종업원 1-2명을 거느린 점포단위개인 기업 수준이었다.
그러나 무엇보다도 이들 기업이 구멍가게 수준을 벗지 못한 가장 큰 이유는 PC가 너무 비싸 시장 수준의 수요가 형성되지 못했다는 점 때문이었다. 82년 까지 국내에 공급된 PC는 모두 합쳐 1천여 대가 채 되지 못했다. 중대형급 컴퓨터를 외국에서 들여와 국내공급하던 삼성전자, 금성사, 대한전선 등대기업들이 PC시장에 뛰어들고 싶어도 뛰어들 수 없었던 이유도 거기에 있었다.
상황이 이쯤되자 81년 5공화국이 들어서면서 정부내 일각에서는 전자공업육성책의 하나로서 PC산업 활성화 대책이 관계 부처별로 제기되기 시작했다.
물론 그 주역들은 정보산업 분야 주도권을 놓고 치열한 정책 경쟁을 벌여온과기처와 상공부였다.
82년 2월 과기처가 먼저 정부 예산 10억원을 투자해서 82년말 까지 실업계고등학교 등에 5천여대의 PC를 공급하겠다는 것을 골자로 하는 교육용컴퓨터공급계획을 전격 발표했다. 이발표는 업계에 적지 않은 파문을 일으켰다. 연간 시장 규모가 5백대도 않됐던 상황에서 5천 대의 수요가 발생한다는 것은누가봐도 엄청난 사건이었던 것이다.
이 계획은 82년 2월18일 있었던 부처별 새해 업무보고에서 이정오 과기처장관이 대통령에게 보고한 내용 그대로 였다. 이 계획은 당시 과기처 정보계획국장 신만교가 주도해서 작성한 것이었다. 그런데 이 해의 과기처 업무보고는 다른 부처의 여느 것과 마찬가지로 새정부 출범후 첫번째로 치뤄졌다는점에서 다소 과장이 있더라도 현시적인 내용이 들어갈 필요가 있었다. 이를테면 도전적인 성격의 신임 대통령에게 뭔가 한건을 터트려 줘야 할 판이었는데 그것이 바로 5천대 교육용컴퓨터 공급 계획이었던 셈이다. 신만교와 함께 이 계획을 작성한 당시 Q씨의 회고.
『그러나 이 계획은 준비 기간이 너무 짧았던 데다 작성에 필요한 사전 조사는 물론이거니와 문교부, 상공부 등 관계 부처간에도 충분한 협조가 이루어지지 못한채 발표되고 말았죠. 공급 완료시기를 그해 연말로 잡아 놓고도공급 대상 기종 규격이나 조달 방법 등에 대해서는 구체적인 언급이 없었던것이 그 단적인 옙니다. 이를테면 연두보고 시기에 맞추느라 대상기종을 컴퓨터 개발전문 국책연구소인 한국전자기술연구소(KIET)를 통해 새로 개발할것인가, 아니면 기존 민간업체들이 생산하는 모델을 사들일 것인가 조차도고려하지 못했던 것이죠.』
아뭏튼 이 엄청난 양의 PC를 어떤 루트를 통해 확보하느냐가 가장 큰 관건이었다. 과기처는 결국 대통령에게 보고한지 3개 월만인 82년 5월 상공부의협조를 얻어 산하 KIET를 통해 교육용 컴퓨터를 새로 개발할 민간업체 선정에 나서게 된다. 또 각급 학교에 대한 공급시기도 1년이나 늦어진 83년말에야 완료됐고 이에 앞서 정부 조달 가격 결정을 놓고도 한바탕 홍역을 치루게된다.(개발업체 선정과 공급에 관해서는 다음호에서 언급키로 한다)
과기처가 KIET를 통해 교육용 공급업체 선정에 나설 즈음인 그해 5월 상공부는 「전자계산기 산업 육성을 위한 전문업체 선정요강」이라는 것을 발표했다. 컴퓨터 생산업체를 유형별 부품별로 전문화한다는 것과 이 요 강에 따라 선정된 업체들은 시설, 운전, 기술개발 등 각종 자금을 우선적으로 지원한다는 것이 골자였다.
상공부의 생각은 마이크로컴퓨터, 마이크프로세서, 플로피디스크드라이브등 PC관련 분야와 32비트급 미니컴퓨터 등을 개발할 업체를 분야별로 2-3개를 선정, 제한경쟁을 통해 국내 컴퓨터산업을 고도화시키겠다는 발상이었다.
상공부의 이같은 계획은 파괴력면에서 과기처의 교육용컴퓨터공급 계획 발표를 능가했고 기업들의 관심도 상상을 초월할 정도였다. 요강 발표 한달만인6월10 일 마감까지 전문업체 선정 신청업체수와 신청부문은 무려 87개사 1백94개 분야에 이르렀다. 그러나 「전자계산기 산업 육성을 위한 전문업체선정요강」에 의한 분야별 업체 선정은 5공화국이 끝날 때까지도 이루어지지 않았다.
과기처와 상공부의 발표문들은 시행상에 적지 않은 문제점들이 노정되기는했지만 국내 컴퓨터업체들로 하여금 PC산업에 눈뜨게 하는 직접적인 계가가돼줬다는 점에서 높이 평가되고 있다. 과기처의 교육컴퓨터 공급계획의 경우즉각 파문을 일으켜 삼성전자, 대우전자(대한전선의 후신), 금성사, 동양나이론 등 대기업들의 참여를 유도해 냈다.
또 상공부의 전문업체 선정요강도 고려씨스템, 큐닉스, 한국상역, 한독, 금성반도체, 동양정밀, 금성통신등 대기업 계열 또는 중견업체들의 PC본체관련부품 개발에 즉각 나서게 하는 효과를 거뒀던 것이다.
<서현진 기자>
작성일자 : 1996.07.18
서현진 기자 E-MAIL:jsuh@www.etnews.co.kr
컴퓨터 파노라마 (29) 방황기 (4) 체신부의 부상 ... 전기통신에 정보통신 접목 차례로 돌아가기
과기처와 상공부의 정보산업 주도권 쟁탈전이 점입가경으로 치닫던 70년대말까지도 체신부는 정부 정책의 전면에 나서지는 않았다. 체신 업무나 전화고지서 업무 전산화 등 굵직굵직한 프로젝트을 잇따라 진행시켜 나가긴 했으나 그것은 어디까지나 부처내 고유업무일 뿐이었다. 하지만 결과적으로 보면이런 움직임은 훗날 체신부가 국가기간전산망의 주도권을 거머쥐게 되는 준비 작업, 즉 정중동이었음을 알수 있다.
체신부의 정중동이 표면에 떠오르기 시작한 것은 81년 10월 전기통신조직부문을 한국전기통신공사(KTA, 현 한국통신)라는 법인체로 공사화 시키면서부터이다. 체신부는 KTA의 출범을 70년대 초반부터 계획해오던 터였다. 이런 KTA를 통해 정보산업 정책의 전면에 나선다는 것이 체신부의 기본 구상이었다.
과기처가 과학기술 개발과 보급의 측면에서, 상공부가 컴퓨터의 국산화 측면에서 각각 우리나라 정보산업 정책을 주도하고 있었다면 체신부는 전기통신과 정보산업을 접목하는 또다른 접근 방식을 통해 정책의 최일선에 나설채비를 하고 있었던 것이다.
KTA를 출범시킨 직후 체신부는 전기통신과 정보산업을 접목시키는 시도로서 81년을 전후하여 잇따라 몇가지 중대한 사건(?)들을 터트리는데 한국데이타통신(데이콤의 전신)의 출범, 서울지역 114번호 안내시스템의 개통, 전자식공중전화기의 개발 등이 바로 그것들이었다.
82년 3월 한국데이타통신의 출범은 과기처의 <교육용컴퓨터 5천대보급계획>, 상공부의 <전자계산기 산업육성을 위한 전문업체선정 요강>등에 이어튀어 나온, 거의 홈런성에 가까운 체신부의 역작이었다. 체신부는 KTA와 민간 합작기업인 한국데이타통신을 통해 정보산업 육성 정책의 전면에 나설수있믐 교두보를 확보한 셈이었다.
114번호안내시스템의 개통이나 전자식 공중전화기의 개발은 체신부의 잠재력을 일반인에게 그대로 드러내 준 화제거리였다.지금 같아서는 아무런 뉴스거리가 못되는 것이지만 당시로서는 이 얘기가 언론마다 대서 특필됨으로써체신부의 위상을 한껏 높여줬던 것이다.
이전까지 114 안내는 교환양들이 전화번호부를 일일이 뒤져가며 가입자의요구에 응답해야 했는데 이 시스템이 개통되면서 부터는 그럴 필요가 없어졌다. 그러나 114 전화안내시스템의 개통은 무엇보다도 우리나라의 전화보급이급팽창할 것임을 예고해줬고 그것은 컴퓨터를 통해서만 가능하다는 것을 실증해준 최조의 쾌거였다.
지금도 사용되고 있는 전자식 공중전화기의 개발 역시 마찬가지였다. 이전까지 공중전화기(지금은 사라진 주황색 다이얼식 전화기)는 기구부품을 사용하던 것이어서 주화(동전)를 판별력이나 시외전화 기능 등 신뢰성과 확장성에 결정적 한계가 있었다. 그러던 것이 전화기 내에 「유-컴퓨터(U-Computer)」라는 초소형 마이크로컴퓨터를 채택하고 전자회로를 내장함으로써 신뢰성이 확장성 문제를 극복해 낸 것이다. 출범 과정이나 개발 비화를 알아보기로 하자.
<한국데이타통신의 출범> 차례로 돌아가기
82년 3월10일 창립총회를 갖고 출범한 한국데이타통신의 설립 작업은 이미81년 8월부터 체신부의 내부 프로젝트로 착착 진행되고 있었다. 81년 8월 체신부는 정부와 업계인사를 주축으로 <국내 정보산업을 적극 육성하고 정보유통(정보통신)의 대량화 및 고속화를 실현하기 위한 전담기구 설립 위원회>라는 긴 명칭의 별동조직을 조직하고 그 책임자(위원장)에 오명 차관을 내정했다. 오명 차관은 통신정책국장 이해욱 등을 축으로한 설립 작업 전담반을 이끌고 이듬해 1월 27일 발기인대회에 이어 3월10일 창립총회까지 한국데이타통신 출범의 산파역을 맡게 된다.
창립총회에서는 큐닉스 대표이사 이용태가 초대사장으로 선임됐고 정부, 기업, 언론 관계자 등 지도급인사가 망라된 12명의 비상근 임원과 감사가 임명됐다. 주요인사를 보면 이해욱, 정문화(총무처 행정관리국장), 신만교(과기처 정보계획국장), 최순달(한국전기통신연구소장), 김성진(연합통신사장), 강진구(한국전자통신사장)등이었다.
주식회사로 출범한 한국데이타통신의 성격은 25개 출자사의 기업적 성격이나 지분 비율을 들여다 보면 보다 분명해진다. 출범 자본금 59억8천만원 가운데 최대주주인 KTA는 20억원(33.45%), 한국전자통신(삼성반도체통신의 전신), 동양정밀, 국제상사 등은 각각 5억원씩(8.36%)을 출자했다. 또 KBS, 금성반도체, 대영전자, 대한전선(대우통신 전신), 연합통신 등이 각각 3억5천~2억원 씩을, 삼성전자, 한국상역(현 한국컴퓨터)이 각각 1억원씩을 출자했다.
이밖에 금성사, 동양나이론, 제일정밀 등 12개사가 5천만원 씩을 출자, 0.83%씩의 지분률을 확보했다.
지분률 배분 문제는 90년대 초반 개국한 서울방송이나 최근의 PCS사업자 선정등 사례에 비견될 만큼 치열하지는 않았지만 당시로서는 큰 화제거리가 아닐 수 없었다. 대부분 한국전자공업진흥회 회원사들이었던 이들은 컴퓨터 국산화 분야에도 적극적인 관심을 보이던 기업들이었던 데다 체신부의 전기통신과 정보산업의 접목 정책에 적극 동조하는 세력들이기도 했다. 따라서체신부는 한국데이터통신의 출범을 계기로 확실한 민간 후원 기반을 마련해놓은 셈이었다.
이처럼 체신부와 출자사들의 이해 관계가 맞아 떨어져 출범한 한국데이타통신의 사업목표는 다음과 같은 것들이 골자였다.
1.데이터통신망의 구성과 운용 2.데이터통신 회선, 부가장치, 단말기의 대여 3.컴퓨터에 의한 정보처리, 정보 수집가공 및 판매 4.소프트웨어 개발 및판매 5.국내외 데이터뱅크와의 연결운용 6.데이터통신기술의 연구개발과 실용화 7.데이터통신에 관한 표준화연구, 교육훈련, 홍보
<114전화안내시스템> 차례로 돌아가기
77년 한국통신기술연구소(KTRI)에서 개발이 시작됐다가 KTRI의 후신인 한국전기통신연구소(KETRI)에 의해 완성된 114번호안애시스템은 81년12월 서울을지전화국에서 전면 개통된 국내 최초의 자동전화번호안내시스템이다.
우리나라의 전화번호안내는 57년 7월 서울 중앙전화국 교환과 안내계로 발족, 서울지역 가입자 번호를 안내해오다 70년 8월 을지 전화국으로 시설과 업무가 이전됐다. 그러니까 114 번호안내시스템은 그동안 을지전화국 안내양이일일히 전화번호부를 뒤져 수동으로 처리하던 안내업무를 전산화한 것이었다. 당시 을지전화국 안내과장 J씨의 시스템도입 배경에 대한 회고.
『전화가입자 수가 1백만명 정도면 수작업이나 전산시스템에 의한 작업이별반 차이가 없습니다. 3백만명이 넘으면 문제는 달라지죠. 컴퓨터가 작업하는 시간은 1백만명 일때나 3백만명 일때나 큰 차이가 없는데 안내양의 수작업시간은 기하급수적으로 늘어나게 됩니다. 당시 서울시 가입자수는 연평균35만명씩 증가하고 있었는데 그 추세대로라면 86년에는 3백만명을 돌파할 것으로 예상됐습니다. 3백50여명이나 되던 안내양을 무작정 늘릴 수만은 없었습니다. 장기적인 대책이 필요했던 거죠』
114번호안내시스템 프로젝트는 휴렛팩커드(HP)의 「HP 1000」(미니급) 2대를 비롯, 한글단말기(CRT터미널) 2백60여대가 투입된 대규모 사업이었다. 처음엔 대수롭지 않게 여겼던 KTA(물론 그 주체는 체신부였겠지만) 측은 개발완료시점에서 114번호안내시스템 프로젝트에 상당한 관심을 가졌던 것으로전해지고 있다. 시스템 개발책임자였던 KETRI 소프트웨어실장 C씨의 회고.
『시스템 개발 막바지에 접어들면서 KTA는 단말기 접속수를 늘리기 위해「HP 1000」의 고유한 운용체제 대신 새로운 운용체제 개발을 요구하는 등설계변경을 요구해왔습니다. 또 114안내 뿐아니라 나중에 전화요금 고지서와고객청약 데이터 등을 동반 처리할 수 있도록 확장성을 염두에 둔 설계를 요구하기도 했지요. 이시스템을 표준화해서 인구 50만명 이상 도시에 추가 공급하기 위해서였죠』
KTA가 뒤늦게 114번호안내시스템에 대해 생각이 달라진 것은 간단했다. 폭주하는 가입자 안내전화에 대응 기능외에 잘만 활용하면 반대로 전화가입자의 폭주를 불러올 수도 있음을 간파한 것이다. 114번호안내시스템 때문만은아니겠지만 아뭏튼 국내 전화가입자는 KTA의 소망대로 87년 1천만대를 넘어서는 쾌거를 이룩하게 된다.
<전자식 공중전화기> 차례로 돌아가기
체신부는 81년초반 만해도 주화 판별 기능, 장거리자동전화(DDD)기능, 112.119등 긴급통화 및 다양한 무료서비스 기능, 전력소모가 적고 크기 작으며 가격이 저렴한 특징 등을 동시에 만족시킬 만한 공중전화기의 개발이 국내기술로는 불가능하다는 결론을 내려놓고 있었다. 당시 정부 측에 신형 전자식 공중전화기 개발을 밀어부쳤던 체신부 국장 P씨의 회고.
『비관적인 결론에 도달하면서 정부는 외국기기의 대량 도입을 적극 검토하기 시작했죠. 그때 비공식적으로 알아본 일본산 공중전화기 1대 값이 무려2백만원정도 였습니다. 상부에서 난색을 표명했던 것은 당연한 일이었지요.
청와대 쪽에서 어떻게든 국산을 만들어보라는 지시가 떨어졌습니다. 결국 KETRI가 그일을 맡았는데 KETRI는 1년여 만에 일본산 전화기 5백대 값인 1억원의 연구비만을 투입, 현재도 사용되고 있는 전화기를 개발해낸 것이죠』
이렇게 개발된 전화기는 곧 금성통신과 동양정밀에 설계기술이 전수돼 82년 7월부터 양산에 나서게 된다. 나중에는 수요가 폭발하면서 10여개의 기업이 추가 생산에 참여하는 결과를 가져오기도 했다.
이 전자식 공중전화기는 특히 주화판별 기능이 뛰어나 컴퓨터의 위력이 실감되기도 했다. 그러나 이전화기는 통화 도중 동전이 부족할 때는 사전에 경보음을 울려주면서도 통화가 끝났을 때 남은 거스름돈(낙전)은 그대로 삼키고 마는 얌체기능을 갖고 있었다. 이 때문에 낙전 뮨제는 사회적 문제로 대두되기도 하여 KTA를 공궁에 몰아 넣기도 했다. 공중전화의 낙전 수입 처리 문제는 그러나 87년 체신부의 공식 발표 한마디로 해소되고 만다. 그발표내용이 무엇이었을까.낙전수입으로 교육용컴퓨터를 구입, 전국의 초등학교에보급한다는 것이었다. 물론 이때는 이미 체신부가 우리나라 정보산업 정책에깊숙하게 관여하던 시기였다.
<서현진 기자>
작성일자 : 1996.07.25
서현진 기자 E-MAIL:jsuh@www.etnews.co.kr
컴퓨터 파노라마 (30) 방황기 (5) 1981년 선거개표 방송 차례로 돌아가기
81년 3월 25일에 치른 제 11대 총선은 우리나라 컴퓨터 역사에도 중요한의미를 부여한 큰 사건이었다. 사상 처음으로 KBS가 총선개표 전산시스템을도입, 이날 저녁부터 다음날 새벽까지 계속된 개표과정을 10시간 동안 TV로생중계했던 것이다.
물론 이날 사람들이 감탄한 것은 TV가 아닌 컴퓨터의 위력이었다. 80년을전후해 최고 잘나가던 미국 프라임사의 중형컴퓨터 「프라임750」을 호스트로 삼은 총선개표 전산시스템은 전국 2백43개 개표소에서 쉼없이 쏟아져 들어오는 중간개표 결과를 실시간으로 처리, TV화면에 그대로 보여줌으로써 컴퓨터와 방송역사의 새로운 장을 열었다. 이날 방송은 또 개표 데이터를 「정당별 득표현황」이나 「당선확실」 등 시청자들의 다양한 정보욕구를 충족시켜주는 형태로 재가공해 시청자의 놀라움을 자아냈다.
이날 개표방송의 하이라이트는 초반 밤 10시부터 시작된 후보들간 밀고 밀리는 당락에 대한 접전이었다. 11시부터 새벽 2시까지 계속된 제주선거구에서 2위를 놓고(중선거구였으므로) 변정일 후보와 강보성 후보가 90표차 안팎으로 엎치락뒤치락했던 싸움은 압권이었다.
하지만 전국 92개 선거구에서의 당락 윤곽은 새벽 1시에 거의 드러났다. 70년대까지만 해도 개표 후 12시간 이상 소요되던 작업이었다.
KBS가 프라임750 공급회사였던 한국전자계산(KCC)과 공동개발해 이날 선보인 총선개표 전산시스템 응용프로그램은 20종에 이르렀다. 「선거구별 개표현황」 「정당별 당선자 및 상위득표자현황」 「정당별 득표현황」 「투표율현황」 「연령별, 학력별, 직업별 당선자 및 후보자 분석표」 「최소, 최다득표 당선자 현황」 「전국구 의석 배분표」 「정당별 당선자 수 예상표」「정당별 공천자 당선율 현황」 「최근소 표차」 「최연소 및 최고령 당선자」 「당선확실지역 및 후보자」 「최근소 표차 당락지역」 「정당별 상위 득표자 유망자」 등이 대표적인 것들이었는데 오늘날 TV방송사들이 선거개표방송 때마다 경쟁적으로 선보이는 기상천외한 응용프로그램의 전형은 이미 이때 마련됐음을 볼 수 있다.
선거를 치르고 나서 개표결과를 빨리 알고 싶은 일반인들의 욕구는 지금이나 예나 다를 바가 없을 터였다. 또 그 결과를 다른 매체보다 빨리 알리려는언론사들의 보도경쟁도 마찬가지였을 것이다.
80년 9월 11대 대통령이 취임하고 5공화국 출범을 위한 제8차 개헌 국민투표와 총선일정이 잡히면서 KBS는 비로소 처음으로 컴퓨터에 의한 선거개표방송 아이디어를 냈고 곧 이어 준비작업에 나선다.
70년대 말까지 컴퓨터를 이용한 TV개표 생방송은 생각할 수 없는 일이었다. 자체적으로 개표나 집계용 컴퓨터를 갖추지 못했기 때문이었는데 라디오방송이나 신문조차도 중앙선거관리위원회가 개표와 집계를 완료할 때까지 기다렸다가 그 결과를 받아서 보도하는 데 그쳤다. 따라서 중앙선관위의 작업이 늦어지면 투표율이나 후보 당락소식도 그만큼 늦어질 수밖에 없었다. 그보다 더 아이러니한 일은 중앙선관위조차도 컴퓨터 장비를 갖추지 못했었다는 점이다. 이 때문에 투표 때마다 선관위는 유선망을 통해 전국의 개표소로부터 일일이 결과를 수집해 집계한 후 이를 언론사에 제공하는 정도에 그치고 있었다.
이같은 상황에서 이날 저녁 자정을 전후하면서 총선개표 전산시스템이 위력을 발휘하자 그때까지 중앙선관위에서 개표결과를 초조하게 기다리고 있던신문, 방송기자들이 우르르 KBS전산실에 몰려들었다. 당시 KBS 전산실장이던K씨의 회고.
『새벽 1시경이 되자 시청자들의 문의전화가 빗발쳤어요. 어느 지역 어느후보의 현재 득표현황을 알고 싶다는 것 등이었는데 전산실 직원들이 전화기를 손에 든 채 다른 손으로 키보드를 두드려 가면서 일일이 대답을 했습니다. 나중에는 KBS 라디오쪽에서 전산실로 쳐들어오더군요. 리포터가 다짜고짜 디스플레이 화면을 보고 그대로 마이크에 읽어대는 겁니다. 뒤이어 선관위에 있던 신문사 기자들이 몰려와 보고 적는데, , , . 내 자신이 그렇게 자랑스럽기는 처음이었습니다.』
물론 KBS와 문화방송 등 방송사도 81년 3월 제 11대총선 이전까지만 해도방송제작용은커녕, 일반 업무처리용 컴퓨터시설 하나 제대로 갖추지 못한 상황이었다. KBS의 경우 78년부터 일부 자체업무를 전산처리하고 있었지만 전산실 조직만 갖추었을 뿐 컴퓨팅 파워는 KCC에서 시간단위로 임대해 사용하는 형편이었다. K씨의 얘기를 다시 들어보자.
『전산실에는 24명이나 되는 직원이 있었지만 KBS 경영진은 월 임대료가 1천만원이 넘을 때까지는 자체 컴퓨터를 도입하지 않기로 못을 박아놓고 있었습니다. 그러던중 시청료 징수, 자재관리, 인사, 급여, 해외 방송송출 등의업무가 폭증하고 81년부터는 방송제작 관리를 전산화한다는 방침을이 우면서자체 컴퓨터 도입이 추진됐습니다. 이 방송제작 관리 전산화 부문에 총선개표 전산시스템 개발내역이 포함돼 있었던 겁니다.』
선거개표 전산시스템은 이미 70년대말 미국 TV방송사 사이에서 도입돼 그위력을이 발휘하고 있었다. KBS는 이 위력에 상당한 공감을 가졌던 데다 문화방송과 시청률 경쟁에서 앞서야 한다는 중압감에 시달리고 있었다.
이 추진일정에 따라 KBS는 그동안 컴퓨팅 파워를 임대해오던 KCC를 통해프라임750을 80년 말까지 도입키로 했다. 또 총선 사흘 전까지 선거개표 전산시스템 개발을 완료한다는 방침을 굳혀놓고 있었다. 모든 시스템의 개발은KCC가 맡아서 하기로 했다. 그런데 추진과정에서 의욕이 지나친 나머지 결정적인 문제가 발생했다. 전산실장 K씨의 회고.
『전산실 입장은 어차피 개발해야 될 시스템이라면 하루라도 빨리 앞당겨보자는 것이었습니다. 제 8차 개헌국민투표를 불과 두달여 앞둔 시기였는데이왕이면 총선에 앞서 국민투표용 시스템부터 개발해보자는 욕심이 생겻습니다. KCC측에 이 작업이 가능한가를 타진해보니 충분하다는 겁니다. 자체시설없이도 KCC 시설을 이용할 수 있었죠. 유관부서에 이 계획을 알리고 관련자료 준비 등 사전 정지작업에 한달을 보낸 다음 선거를 20여일 앞둔 10월초부터 본격적인 개발에 나섰습니다.』
그러나 이렇게 개발된 국민투표용 개표전산시스템은 방송에 사용되지도 못한채 개표를 불과 몇 십분 앞두고 치명적인 사고를 내고 말았다. 시험중 정전사태가 발생했는데 백업체제를 갖추지 못했던 개표전산시스템 데이터베이스가 한순간에 파괴돼 버린 것이다. 당시 KCC의 기술담당 상무였던 L씨의 회고.
『국민투표 개표전산시스템 개발은 KCC나 KBS 모두 구체적인 계획없이 막연한 기대감으로 시작했던 것이었습니다. 시스템 개발에서 제일 중요한 것은경험인데 이를 무시했던 겁니다. 기계(컴퓨터)의 신뢰성을 너무 맹신했던 것도 실패의 한 요인이었습니다. 그도 그럴 것이 당시 프라임기종의 명성은 중형컴퓨터 분야에서 IBM을 능가하고 있었으니까요. 설마 전기 쇼크로 시스템이 파괴되리라고는 상상하지 못했던 거죠.』
사실 시스템이 다운된 가장 큰 이유는 당시 우리나라에 공급되던 전력의품질이 매우 불량했기 때문이었다. 전압이나 전류 흐름이 고르지 못했는데은행 온라인 시스템 등의 80% 이상이 이런 이유로 다운됐다. KCC측의 잘못은바로 이같은 돌발상황에 대비해 처음 설계부터 백업체제를 염두에 두지 않았다는 점이다.
국민투표용 개표전산시스템의 실패는 KBS측에 큰 충격을 줬다. 전후관계를알지 못했던 KBS측은 즉각 81년의 총선개표 전산시스템 개발에 난색을 표명하고 나섰다. 개표작업은 적어도 10시간 이상 계속될 터인데 이같은 사고가생방송중에 발생하면 방송사 이미지 추락은 불보듯 뻔했기 때문이었다.
일이 이쯤되자 KCC는 자체 조직 안에 「KBS지원 긴급대책위원회」라는 것을 만들어 총선개표 전산시스템 개발에 기업사활을 걸겠다고 다짐하고 나섰다. 여기서 포기하면 국내에서 가장 잘나가던 프라임 기종의 신뢰도에 먹칠을 하는 것이고 그렇게 되면 이 사업에 주력해온 회사 경영전반에 큰 타격이가해질 상황이었다.
우여곡절 끝에 KBS 전산실이 KCC와 공동으로 총선개표 전산시스템 개발팀을 재구성한 것은 80년 12월이었다. 단서 조항이 붙은 것은 아니지만 만약또다시 실패할 경우 KCC는 모든 것을 책임지겠다는 각오였고 KBS 전산실도여차하면 사표를 제출하겠다는 다짐을 거듭한 결과였다. 이같은 각오와 다짐덕택으로 시스템개발은 예정대로 선거 사흘 전에 완료돼 프롬프트상태를 유지할 수 있었다.
이때 개발된 총선개표 전산시스템은 프라임750 호스트와 프라임550 백업장치, 3백MB급 디스크장치 3대, 마그네틱테이프장치 2대, 프린터 2대 등을 비롯, 5대의 디스플레이 단말기, 2대의 그래픽 단말기, 10대의 데이터입력 단말기 등으로 구성됐다. 시스템은 서울본사 산하 8개 지방국을 중심으로 2백43개 개표소를 유선망으로 직접 연결한 것이었다.
81년 3월 25일의 총선개표 전산시스템에 대한 관심은 컴퓨터가 단순히 선거개표방송의 백본으로 사용됐다는 의미 때문만은 아니었다. 일반인들은 그렇다치더라도 컴퓨터업계와 방송계 인사들은 제 11대 총선 선거개표 전산시스템의 가동상황을 지켜보면서 장차 있게 될 컴퓨터와 TV방송의 결합을 나름대로 그려봤던 것이다. 국내에서 TV프로그램 제작 및 방송에 컴퓨터장비가사용된 것도 공식적으로는 이 선거개표방송이 처음이었던 것으로 전해진다.
서현진 기자
작성일자 : 1996.08.01
컴퓨터 파노라마 (31) 방황기 (6) 국가 표준화사업 실패로 끝나다 차례로 돌아가기
우리나라 컴퓨터 도입역사에서 70년대는 정부와 업계 모두 오로지 앞만 보고 달려왔던 시기였다. 어떻게든 컴퓨터를 많이 도입해서 업무의 전산화를확대하는 것이 급선무였던 것이다. 또 컴퓨터 하드웨어를 국산화 하여 수출전략품목으로 육성하겠다는 의지에 불타기도 했다.
물론 하드웨어의 국산화 열기는 과기처, 상공부, 체신부 등 당시 관련 3부처가 벌였던 정보산업 정책 주도권 싸움의 핵으로 부상하면서 80년대에 들어서면서도 계속된 현상이었다. 이 싸움이 가능 했던 것은 지금과 달리 국산화라는 것이 정부 정책이나 입김이 있어야만 추진할수 있었기 때문이었다. 이를테면 업계는 정부가 끌어 주는데로 앞만보고 달리면 되는 식이었던 것이다.
그러던 것이 컴퓨터보급이 급속하게 확대되는 80년대 들어서면서 정부와업계는 앞쪽 뿐아니라 옆과 뒤도 함께 돌아다보아야 할 여러 <의무>를 느끼기 시작한다. 이 <의무> 가운데 하나가 수십여종이 난립해 있던 한글코드나 키보드 자판배열의 통일 등 컴퓨터 분야 표준화작업이었다.
컴퓨터 분야의 표준화 <의무>는 우리가 사용하는 언어인 한글과 한자를컴퓨터에 제대로 적용하려는 일단의 노력이기도 했다.
특히 관심을 모았던 한글코드의 통일은 이를테면 기본적으로 키보드에서한글을 입력해서 모니터나 프린터에 그대로 출력돼 나오도록 하는 컴퓨터 부호처리 체계를 국가차원에서 표준화하갰다는 것을 의미했다. 한글코드는 그러나 이처럼 단순한 작업을 의미하는 것만은 아니었다. 나아가서는 워드프로세서 등 응용프로그램에서 한글로 된 데이터를 작성하거나 받아들일 수 있어야 하고 데이터베이스의 검색이나 정렬(소팅)시 한글 가나다순 처리가 가능해야 했다.
이같은 원칙을 기반으로 하는 정부 표준 한글코드가 처음 만들어진 것은 74년 9월이다. 과기처가 한국과학기술연구소(KIST)를 통해 만든 이 코드는 자소(초, 중, 종성의 단위)의 값을 7비트로 규정하는 <7비트N바이트>방식으로서 글자 하나의 값을 통털어 2바이트(16비트)로 규정하고 있는 오늘날의표준코드와는 근본적으로 다른 것이었다.
<7비트N바이트> 한글코드는 컴퓨터 보급이 활성화되지 못한데다 공급회사도 몇손가락에 꼽을 만큼 적은 상황에서 업계나 사용자 의견을 들어 볼 틈도 없이 정부가 일방적으로 제정한 것이었다. 한자코드에 대한 규정도 없었던데다 문제점도 적지 않게 노출됐다. 결국 컴퓨터 공급회사들이 아전인수격으로 만든 수십여종의 자체 코드가 범람하게 됐고 기종간 호환성은 물론이고한글의 과학적 특성이 철저히 무시돼 처리효율이 크게 떨어질 수 밖에 없는상황이었다.
키보드배열 역시 자판에 기본적으로 수용하는 한글자모의 갯수나 배열순이공급업체마다 모두 달라 혼선이 극에 달했고 한자코드는 79년에 마련된 <KSC 5714>가 있었으나 한글코드와 병행되지 못하는 반쪽코드였다.
상황이 이쯤되자 80년 10월 과기처는 정부기관「단체「업계를 대상으로 「표준화 활용에 관한 의견조사」라는 것을 실시하게 된다. 그러나 이것은 어디까지나 하나의 요식 행위에 불과한 것이었다. 본뜻은 컴퓨터분야 표준화사업을 범가국적인 사업으로 공식화하기 위한 것이었다. 당시 과기처 실무책임자였던 C기정의 회고.
『미국과 일본은 물론이고 대만 등이 컴퓨터산업을 자국의 미래 전략산업으로 꼽아놓고 있던 터였습니다. 그런데 우리는 가장 기본 환경인 표준화 문제조차 해결하지 못해 놓고 있었죠. 정부 정책의 효율성은 물론이고 산업 활성화나 컴퓨터 마인드 확산이 매우 불투명한 상황이었습니다. 그런데 이 표준화 문제는 누가 혼자 떠든다고 해서 해결되는 간단한 작업이 아니었다는거죠. 범부처 또는 민관을 통털어 어떤 분위기 조성이 필요하다고 본것입니다』
이같은 분위기는 일사천리로 확산돼 마침내 80년 12월29일 과기처, 상공부, 체신부, 문교부, 내무부, 총무처 등 6개부처를 비롯 업계, 학계, 연구계, 사용자 등이 과기처회의실에서 모여 회의를 열었다. 이날 회의에서 비로소컴퓨터 표준화 사업추진위원회의 구성과 표준화시안 마련을 위한 특별 연구반 설치가 합의 됐다.
컴퓨터 표준화사업추진위원회에는 당시 과기처 정보산업국장 최영환을 위원장으로 관련부처 등에서 책임자급 23명이 위촉됐다. 이 위원회는 표준화사업에 대한 계획수립과 연구반 구성, 표준의 시행에 관한 사항 등 정책을 결정하는 최고 실무기구였다.
특별 연구반은 컴퓨터표준화사업추진위원회측과 KIST측간에 있었던 연구용역 계약에 의해 탄생된 일종의 태스크포스팀이었다. 특별 연구반에는 KIST전산개발센터 소장이던 성기수와 이기식을 공동 반장으로 정왕호, 박동인, 정진욱, 변옥환, 박명호 등 당시 잘나가던 KIST의 젊고 유능한 연구원들이 대거 참여했다. 연구의 중대성을 감안 각 관련분야의 전문인사들이 연구자문위원에 위촉되기도 했다.
특별 연구반의 활동기간은 81년 5월말부터 82년 1월말까지 8개월 동안이었다. 활동기간동안 특별연구반이 새로운 시안을 마련할 때마다 자문회의가 이를 받아들여 검토했고 추진위원회는 자문회의의 검토 결과를 추인했는 일을반복했다.
구성원 대부분이 실패작으로 끝난 74년판 한글코드 제정에 참여한 경험을갖고 있던터라 특별연구반의 연구 활동은 신중한 편이었다. 첫 과제로 착수한 것은 40여개의 컴퓨터공급회사와 국산화업체에 대한 기초 자료조사였다.
그런데 이 기초 자료조사에서 놀라운 사실이 보고됐다. 한글코드와 키보드배열 종류가 조사 대상 업체수와 같은 40여종이나 되는 것으로 드러난 것이다.
문제는 이 40여종의 체계들을 어떻게 하나로 표준화(단일화)하느냐는 것이었는데 추진위원회는 특별연구반의 운신에 대한 폭을 넓혀주기 위한 다음과같은 3가지의 기본원칙을 마련했다.
1.컴퓨터산업의 국제화에 대비하고 국제 표준 규격과 관례를 존중한다. 2.
현행 다수 기종의 사례를 참작하되 표준화 단계에서 적용범위를 구체화 한다.
3.표준화가 미래 기술 발전에 저해요소가 되지않도록 배려한다.
이같은 원칙에 따라 마련된 특별연구반의 한글코드와 한자코드 및 키보드배열 표준 시안은 81년 12월 공청회를 거쳐 82년 1월 과기처에 공식으로 제출됐고 이해 5월 KS표준으로 확정됐다. 결론 부터 말하자면 이 표준가운데키보드 배열 분야는 큰 문제가 없었지만 핵심분야 였고 가장 관심이 높았던한글코드와 한자코드 74년판 보다 더 처절한 실패작으로 끝났다. 새로 제정한 코드에 대해 어떤 공급업체들도 관심을 가져주지 않았을 뿐더러 오히려업체들의 독자의 범람이 이전부더 훨씬 심해져 한글코드체계는 극심한 혼란에 빠져버린 것이다. 그러나 이같은 혼란은 이미 시안 마련과정에서 부터 예상돼 온 것이었다.
한글코드의 경우 기본 코드로서 기존 74년판 <7비트N바이트>코드를 그대로 유지한채 새롭게 <2바이트(16비트) 조합형>과 <8비트N바이트>코드를보조 코드로 추가한 것에 불과했다. <2바이트조합형>이란 초, 중, 종성을갖춘 글자 하나의 값을 무조건 16비트로 한 것이고 <8비트N바이트>는 초, 중, 종성을 구성하는 자소 하나 값을 8비트로 규정한 것이었다. 따라서 <8비트N바이트>는 <7비트N바이트>처럼 종성이 홑자음인가 겹자음인가에 따라 글자 하나의 값이 2바이트에서 4바이트까지 가변될 수 있는 코드체계였다.
새 표준에서는 3개 방식의 코드를 표준 규격으로 병행하자는 것이었는데여기에 업계가 호응을 보이지 않았던 것이다. 보조코드로 추가된 <2바이트조합형>은 당시 최고의 컴퓨터회사였던 한국IBM을 비롯 삼보전자, 큐닉스컴퓨터 등이 사용하던 것을 토대로 만들어진 것이었다. 이를테면 각사 코드체계를 이리 저리 짜깁기한 식이었다.
<8비트N바이트>역시 컨트롤데이터「스페리 등 대형컴퓨터공급사와 애플등에서 사용하던 것을 모은 것이었다. 각자 조금씩만만 노력하면 표준코드체계로 들어올수도 있었지만 실제 각공급사들은 여러가지 이유로 기존 독자코드체계를 고수했다. 상황이 이랬으니 <7비트 2바이트완성형>와 <3바이트>등 표준체계에 끼이지 못한 코드를 사용하던 공급사들의 입장이란 불보듯 뻔했다.
물론 당시 컴퓨터공급사들은 굳이 정부가 마련한 표준에 따를 필요가 없었다. 이를테면 87년에 개정된 <KSC 5601>의 <2바이트완성형>에서 정부기관 납품용은 무조건 표준을 따라야 한다는 강제 조항 같은 것들이 전혀 없었던 터라 공급업체들이 추가비용 지불을 감수하면서까지 코드 변경에 나서지않았던 것이다.
한자코드의 상황도 비슷했는데 과기처는 결국 3년뒤인 85년 다시 KIST로하여금 한글코드와 한자코드를 통합하는 새로운 표준 한글코드 제정을 요청하게 된다. 정부의 컴퓨터분야 표준화 사업이 또다시 실패를 인정하고 만 셈이다.
그러나 82년의 표준화 사업은 비록 실패했지만 남다른 의미도 함께 던져줬다. 사상 처음으로 국가적 사업이라는 인식속에서 컴퓨터 표준화사업이 추진됐다는 점과 한글처리의 중요성이 이 사업을 계기로 확산되기 시작했다는 점등이 바로 그것이다.
<서현진 기자>
작성일자 : 1996.08.08
서현진 기자 E-MAIL:jsuh@www.etnews.co.kr
컴퓨터 파노라마 (32) 방황기 (7) 청계천 전자상가 차례로 돌아가기
88년 서울 올림픽이 막을 내리기 전까지 청계천 전자상가는 누가 뭐라해도한국의 「실리콘밸리」로 통했다. 그러나 청계천 전자상가가 이전해 새로 자리잡은 용산 전자상가를 두고 다시금 한국의 실리콘밸리라고는 하지 않는다.
그 이유는 무엇일까.
청계천 전자상가 출신으로 10여개의 기업 연구소를 두루 거친 후 현재 굴지의 기업에서 마침내 임원 반열에 오른 중견 엔지니어 A씨의 설명.
『80년대 청계천 사람들에게는 순수한 정열이 있었습니다. 애플의 공동창업자인 스티브 잡스나 스티브 워즈니악, CP/M를 개발한 게리 킬 들 같은 영웅이 되는 꿈을 꾸었던 거죠. 돈은 나중 문제였습니다.』
A씨의 말은 청계천시대를 계승한 용산상가는 명분론적 영웅의 꿈보다 어떻게든 한몫 잡아보겠다는 실리론을 택했다는 것이다.
청계천 전자상가가 한국의 실리콘밸리로 불리게 된 직접적인 계기를 제공한 것은 당시 한 천재 컴퓨터 소년의 인터뷰를 실은 몇몇 신문이었다.
83년 1월 20일께 국내 신문은 일제히 「약관 16세 컴퓨터 박사」라는 제목으로 최초의 한글워드프로세서를 개발한 박현철 군(당시 서울 북공고 2년)을이규호 문교부 장관이 불러 장학금을 지급하고 격려했다는 기사를 실었는데그 내용에는 다음과 같은 대목이 있었다.
『박군은 중학교 2년 때부터 청계천 상가를 홀로 누비면서 조립용 트랜지스터 라디오와 오디오 부품을 구입, 이를 스스로 조립하면서 전자의 세계를터득했고 3학년 때부터는 상가 컴퓨터 전문가들과 교류하면서 컴퓨터를 익히기 시작했다. 박군이 개발한 소프트웨어는 한국의 실리콘밸리인 청계천상가에서 가장 인기있는 애플 컴퓨터용 한글워드프로세서였다.』
이 기사는 박현철 군의 천재성과 함께 한국 컴퓨터산업의 요람으로 청계천상가의 가능성과 잠재력을 일반인에게 널리 알리는 계기가 됐다. 실제 기사들도 박군의 천재성을 발굴한 것은 학교나 선생님이 아니라 한국의 실리콘밸리인 청계천 전자상가였다는 식으로 쓰여 있었다.
청계천에서의 경험을 토대로 현재 용산상가에서 주변기기 회사를 운영하고있는 P씨의 이에 관한 회고.
『제 기억으로는 이 기사가 컴퓨터 상가 청계천을 알리는 최초의 보도였습니다. 청계천 사람들은 한동안 박군 이야기를 화제에 올렸고 어떤 이는 기사를 그대로 오려 가게 유리문에 붙여두고 일반인들의 관심을 유도하기도 했습니다.』
한국의 실리콘밸리라는 명성은 희미해졌지만 아직 그 명맥을 유지하고 있는 청계천 전자상가는 청계고가도로를 중심으로 종로 쪽으로는 「세운상가」와 「아시아상가」, 을지로 쪽으로는 「대림상가」 등으로 이루어져 있다. 세운상가는 주로 가전과 컴퓨터를, 아시아상가는 전기, 전자부품을 각각 취급했고 대림상가는 유기장용 게임기나 오락기 전문상가였다. 이 가운데 한국의 실리콘밸리로 통했던 곳은 컴퓨터상가의 대명사 세운상가였다.
세운상가 건물은 행정구역상으로 종로구 장사동이지만 실제는 종로3가와청계천4가를 완전히 가로질러 맞닿는 형태여서 종로 방향에서는 종로 세운상가, 청계천 쪽에서는 청계천 세운상가 하는 식으로 불렀다.
이 건물은 67년 서울시가 시내의 전파상들을 한곳에 입주시켜 동양 최대의전자상가로 육성한다는 방침에 의해 건립됐다. 세운상가가 전자상가로 모습을 드러낸 시기는 삼성전자와 금성사가 본격적으로 TV와 세탁기 등을 생산했던 70년대 중반 이후였다. 가전 도매상이 이곳을 수도권과 지방을 연계하는최대 요충지로 여기면서 국내 최대 전자상가로 부상하게 된 것이다.
그런가 하면 70년을 전후해 이곳에서 트랜지스터 라디오나 컴포넌트 오디오 조립용품을 공급하는 점포들이 성시를 이루었다고 회고하는 이들도 있다. 70년대 후반 세운상가 일대에는 라디오, 오디오 부품 또는 조립 키트 전문점포만 2백여곳에 이르렀다고 한다. 이 때문에 박현철 군처럼 직접 완제품을조립해보려는 공업고등학교 학생과 전파상들이 세운상가를 안방처럼 드나들게 됐고 마침내는 전국에 조립 전자제품 전성기를 구가하게 됐다는 것이다.
가전과 오디오 일색이던 세운상가에 컴퓨터 부품과 조립 키트, 완제품을공급하는 점포들이 들어서기 시작한 시점은 불분명하다. 누가 이곳에 최초의컴퓨터 점포를 냈는지에 대한 자료도 전해지지 않는다. 현재 전국에 1백여개의 유통망을 가진 S씨의 회고.
『제가 입주한 79년 가을만 해도 컴퓨터 매장이 20여개나 됐지만 규모가작았고 취급 품목도 대형컴퓨터 소모품이나 주변기기 부품이었습니다. 애플완제품이나 조립 키트를 구비한 곳은 드물었습니다. 대부분은 문서세단기 등을 취급했고 어떤 곳은 밀수 오디오로 수익을 올리기도 했습니다. 컴퓨터만취급하게 된 것은 83년부터입니다.』
S씨의 회고대로라면 세운상가에서 처음부터 컴퓨터만 취급하겠다고 나선곳은 거의 없었다는 얘기가 된다. 수익이 좋았던 가전 등을 취급하다가 차츰컴퓨터에 손을 대게 됐다는 것이다.
아무튼 세운상가가 컴퓨터 상가로 발돋움한 시점은 박현철 군이 이곳을 누비던 82년께로 추정되고, 이 시기는 또 애플과 IBM이 주도하던 PC산업이 확장일로를 달리던 때와 일치한다는 점에서 흥미롭다.
PC는 대형컴퓨터에 익숙해있던 당시 사람들에게는 하찮은 것이었지만 크기가 작으면서 성능이 뛰어났고 가격이 싸다는 장점 때문에 컴퓨터를 새로 구입하려는 사람들에게는 대단한 호기심을 불러일으켰다. 또 TV나 라디오처럼대량판매가 가능하고 물류가 용이하다는 점에서 국내 업계는 너도나도 PC분야 진출을 계획하던 터였다. 세운상가가 컴퓨터전문상가로 탈바꿈하는 과정은 바로 이같은 배경을 근거로 하고 있었다.
82년말 세운상가 내부 상가배치도를 보면 1, 2층은 가전과 난방용품 등 전기제품, 3층은 사무기기와 수입 오디오 등 가전, 4층은 컴퓨터, 5층에서 8층까지는 아파트형 공장과 사무실로 이루어져 있었다.
이 가운데 4층의 컴퓨터상가는 2~3평에서부터 10평에 이르는 크고 작은 점포가 무려 1백40여개나 밀집해 있었다. 이들 점포는 각각 제품설계, 부품조달, 생산, 판매, 사후지원 등 일반 컴퓨터회사의 모든 업무를 직원 두세명이해결하는 초미니 기업형태를 취하고 있었다. 이 초미니 기업들은 독자적인상표보다는 「애플」나 「SE 8001」 또는 일본 아스키사의 「MZ-80」 등 유명 8비트 PC를 복제한 호환기종을 생산하는 일을 주로했다. 여기서 얻은 수익금은 독자적인 소프트웨어나 주변기기를 개발하기 위한 운영자금으로 쓰였다. 적어도 90년 초반까지 국내 PC사용환경에 필요한 각종 소프트웨어 개발이나 외국제품을 들여와 토착화하는 과정이 대부분 세운상가를 중심으로 진행됐다는 것은 이미 잘 알려진 사실이다.
그러나 이들 제품은 「청계천카드」(80년대까지 한글처리의 대명사였던 7비트 한글카드)하는 식으로 불렸다. 프린터출력용 롬이라든가 한글 바이오스를 비롯해 로터스1, 2, 3 등 외국 소프트웨어의 한글처리 솔루션, 다양한 형태의 입출력카드, 그래픽카드 등이 주요 개발품이었는데 이것은 일반 PC업체들도 감히 손댈 수 없었던 당시로서는 고난도 기술을 요하던 분야였다.
89년에 빛을 본 한글과컴퓨터의 「한글」워드프로세서 역시 세운상가를 드나들던 이찬진 씨 등 젊은이들에 의해 개발됐고 이것을 이곳에 입주해 있던S씨가 1천만원을 들여 상품화해준 결과였다. 이때의 기억을 이찬진 사장은이렇게 회고하고 있다.
『한글1.0을 개발하던 시절 학교(서울대)를 마치면 거의 매일 S씨의 가게에 나가 고객지원 아르바이트를 했지요. 겨우 점심값 정도 버는 것이었지만사실은 돈이 문제가 아니었습니다. 하드웨어에 대한 메커니즘을 이때 완전히익혔지요. 한글이 특정 PC에서만 실행되던 다른 워드프로세서와 달리 모든기종에서 호환성을 확보할 수 있도록 설계할 수 있었던 것도 이때의 경험 덕이었습니다.』
세운상가에서 팔리거나 완제품에 끼여 공급되던 제품의 가장 큰 특징은 저작권자가 없고 변종이 많다는 점이었다. 그 이유는 대부분의 제품을 개발자한 사람이 완성한 것이 아니라 여러 사람을 통해 필요할 때마다 조금씩 업그레이드되는 과정을 거쳤기 때문이다. 지금의 용어로 표현하면 이 과정은 특정제품을 해부해 새로운 응용제품을 개발해 내는 리버스엔지니어링(역공학)그 자체였다. 그러나 성행한 이 리버스엔지니어링 때문에 세운상가는 80년대말 미국과 일본 정부에게서 「동양 최대의 복제 소굴」이라는 오명을 뒤집어쓰기도 했다.
세운상가의 개발력은 정부에서도 인정하던 터여서 문교부 교육용 컴퓨터보급계획과 같은 정부정책에 직간접으로 참여하거나 전국 퍼스널컴퓨터경진대회 등 정부 공식행사의 스폰서로 나선 곳도 있었다.
당시 국내에서 마이크로컴퓨터나 PC라는 이름으로 국산 컴퓨터를 전문 생산하던 곳은 금성반도체, 동양정밀, 동양나이론(효성컴퓨터), 금성사 등 대기업 계열과 삼보컴퓨터, 한국상역(현 한국컴퓨터) 등 전문기업을 포함, 모두 10여개사 내외였다. 82년 말까지 국내에 공급된 PC는 대략 1천대 정도였는데 이 가운데 4백여대 정도를 세운상가에서 공급했던 것으로 전해진다.
82∼84년까지의 PC산업 초창기, 세운상가에서 명성을 날린 곳으로는 홍익전자, 경성반도체, 신성전자, 구미전자, 중앙컴퓨터, 희망전자개발, 한림전자 등이 꼽힌다. 사실 이들이 초창기 PC산업에 공헌한 노력만을 평가한다면이들 가운데 몇개는 적어도 96년 현재 국내 컴퓨터업계 기업순위에서 10위권내에 들어있어야 한다. 하지만 현실은 그렇지 못하다. 초창기 세운상가 멤버가운데 지금까지 기업으로 명맥을 유지하고 있는 곳은 30여곳 정도. 그나마그때나 지금이나 기업 외형에서 크게 다를 바 없는 모습을 하고 있는 곳이대부분이다.
<서현진 기자>
작성일자 : 1996.08.22
서현진 기자 E-MAIL:jsuh@www.etnews.co.kr
컴퓨터 파노라마 (33) 방황기 (8) 상용 워드프로세서의 등장-명필 차례로 돌아가기
서울 정도 5백주년 기념으로 제작해서 남산에 묻힌 타입캡슐의 수장품목에한글과컴퓨터의 「한글」워드프로세서가 포함됐다해서 화제가 된적이 있다.
그 이유는 아마도 컴퓨터가 벌써 한 시대를 대표할 수 있는 상징물로 자리잡게 된 까닭이었으니라.
그런데 충청남도 천안의 독립기념관의 유물 진열대 한켠을 주의깊게 살펴본 사람이라면 「한글」 소식보다 훨씬 놀라운 광경을 목격할 수 있게 된다.
이곳에는 지난 80년대를 풍미했던돼 우리나라 상용 워드프로세서의 원조 「명필」(名筆)이 전시돼 있다.
명필은 정확히 말하면 8비트 마이크로컴퓨터와 CRT터미널 등 하드웨어와문서편집용 소프트웨어가 일체화된 워드프로세서 전용기이다. 벌써 옛날 얘기가 돼버렸지만 90년대 초반까지만 해도 삼보컴퓨터나 대우통신 등 유명 PC회사들도 방식은 달랐지만 「젬워드」나 「르모」와 같은 워드프로세서전용기를 만들어 짧짧한 수익을 올렸다.
사실 오늘날과 같은 하드웨어 독립적인 워드프로세서 소프트웨어가 본격적으로 사용되기 시작한 것은 금성소프트웨어(현 LG소프트웨어)가 행정전산망PC용으로 내놓은 「하나」가 개발되던 87년을 전후해서 이다. 그러니까 「하나」가 등장하기 이전까지 명필은 우리나라를 대표하던 워드프로세서 였던것이다.
명필은 지금은 도산한 한화그룹 계열 고려시스템산업에 의해 83년에 선보여졌다. 같은 해 8월 29일자 일간 신문의 경제란에는 김승연 한화그룹회장, 당시 인천시장, 성기수 한국과학기술원(KAIST)전산개발센터 소장 등이 참석한공장 가동 테입 커팅 행사 사진기사가 일제히 게재돼 있음을 볼수 있는데 이행사는 하루전날인 8월 28일 명필의 생산라인이 준공됐음을 기념하는 것이었다. 이날부터 가동에 들어간 이 라인은 인천시 작전동에 소재한 한화그룹 부평 제2공장으로서 고려시스템산업은 이곳에서 연 3천대 규모의 명필을 생산할 요량이었다. 82년까지 우리나라의 총 마이크로컴퓨터(PC) 누적 보급대수가 1천여대 정도였으니 그 규모는 짐작하고도 남을만한 것이었다.
명필의 원 개발자는 KAIST 전산개발센터 제1그룹(당시 명칭)이었다.
제1그룹은 83년 과학기술처가 특정연구과제로 추진한 「보급형 워드프로세서개발」프로젝트를 산업체 위탁과제로 수행, 명필을 탄생시켰다. 공동 개발자로 기록돼 있긴 하지만 고려시스템의 역할은 명필을 상품화하고 이를 대량생산해서 시장에 내다파는 공급자였다.
명필 개발에 참여한 이들은 당시 전산개발센터 1그룹장이던 이기식(현 대우증권 부사장)을 비롯 정왕호(인터테크 이사), 박동인(시스템공학연구소 부장) 등이었다. 과학기술처는 원래 이 「보급형 워드프로세서 개발」프로젝트에 관심을 보이지 않았었을 뿐아니라 83년 특정연구과제에도 포함시키지 않았었다. 그러던 것을 성기수 소장(현 동명정보대 총장)과 공동개발자였던 고려시스템산업의 『노력』에 의해 특정연구과제로 추가되면서 그 비용의 50%가 정부 예산에 반영됐던 것이다.
명필의 탄생 과정을 살펴보기 위해서는 우선 79년 KIST(KAIST의 전신)가수행한 「정보산업토착화를 위한 소프트웨어 이전체제 개발연구」라는 출연연구과제를 수행하던 시기로 거슬러 올라갈 필요가 있다. 박동인 등이 참여한 이 프로젝트는 8비트 Z-80 마이크로프로세서 기반의 마이크로컴퓨터에 한글이 지원되는 CRT터미널과 라인프린터를 연결해서 한글워드프로세싱을 구현할 수 있는 시스템을 개발하는 것이었다. 이 프로젝트의 결과로 세상에 빛을보게된 것이 바로 국내 최초의 워드프로세서로 기록되고 있는 「워드80」이다.
미니컴퓨터와 워드프로세서전용기의 세계적인 공급회사였던 미국의 왕래버러토리즈의 지원을 업고 80년 10월 서울 을지로 미국문화원 강당에서 발표된워드80은 당시 사람들에게 큰 관심을 보이긴 했지만 시스템 구성방식이 까다롭고 가격이 너무 비싸 상용화에는 회의적인 반응이었다. 박동인의 회고.
『70년말 80년초의 워드프로세서 개발 목표는 줄 단위의 편집기(라인 에디터) 수준을 넘어 화면 단위 편집기(스크린 에디터)로 이동해가는 단계였죠.
또 삽입, 삭제, 치환 등이 주된 기능이었고 한글, 한자, 영문을 함께 처리할수 있는 편집기는 없었습니다. 따라서 이런 기능을 처리하기 위해 마이크로컴퓨터와 CRT터미널을 연결시키는 방법을 사용해야 했는데 그 구성방법이 복잡하고 어려워서 당시로서는 첨단 기법으로 인식되던 것이었습니다. 더욱이워드80이 발표될 당시 마이크로컴퓨터 한대가 웬만한 소형 아파트 한채 값이었으니 사람들이 고개를 저었던 것은 당연했죠』
워드80의 상품화가 한계에 이르자 81년 KAIST는 민간 지원금을 끌어들어이를 개량한 워드프로세서 전용기 「워드88」를 내놓게 된다. 민간차원에서자금을 지원한 곳은 고려시스템산업이었다.
이 워드88 개발의 경험으로 계승해서 소프트웨어의 기능을 향상시키고 전용 하드웨어를 개발해서 일체화 시킨 것이 바로 명필이다. 명필의 상품화와생산에 고려시스템산업이 참여하게 된 것은 바로 이같은 배경에서 였다.
82년 고려시스템산업에서 상품화된 워드88은 당초 예상과는 달리 기존 워드80의 단점을 크게 벗어나지 못해 시장에서 주목받는 제품은 되지 못했다.
이때문에 고려시스템은 한글, 한자, 영문을 자유자재로 처리할수 있는 새로운 워드프로세서, 즉 명필의 개발 계획을 세웠는데 이를 주도한 이가 워드88등의 개발에 직간접으로 참여했던 정왕호였다. 정왕호는 이에앞서 82년 7월고려시스템산업에 스카웃돼 자리를 옮긴 상황이었다.
고려시스템산업에서 그는 우선 자신의 계획을 이동훈 사장(현 제일화재해상보험 회장)에게 알려 회사차원에서 동참하도록 만들었고 나중에는 KAIST전산개발센터 성기수 소장까지를 끌어 들였다.
결국 정왕호는 82년 말 우여곡절 끝에 자신의 명필 개발 계획을 「보급형워드프로세서 개발」프로젝트라는 이름으로 과기처의 83년 특정연구과제로추가시키는데 성공하기에 이른다. 이 과정에서 청와대 등의 요로에 발이 넓었던 성기수 소장의 역할이 컷음은 물론이다. 특정연구과제에 포함됐다는 것은 작게는 전체 개발비의 50%를 정부출연금에 의해 충당할수 있다는 것이고크게는 제품 판로에 대한 보증수표를 얻어냈다는 것을 뜻했다.
이렇게 해서 명필 개발 계획 즉, 「보급형 워드프로세서 개발 ]프로젝트는이기식이 이끌던 KAIST 전산개발센터 1그룹에 의해 산업체 위탁과제로 채택됐다.
이과제를 수행한 1그룹은 이미 워드80과 워드88의 개발 경험을 갖고 있었다. 그러나 문제는 새로운 워드프로세서 전용기의 개발 목표인 『보급형』이라는 조건을 어떻게 충족시키는 일이었다. 『보급형』이란 이를테면 값이 저렴한 제품을 의미하는 것이었는데 83년 당시 Z-80을 탑재한 국산 마이크로컴퓨터 가격은 포니2 자동차 값과 맞먹는 7백만원을 홋가하고 있었다. 새로운워드프로세서도 좋지만 탑재할 하드웨어 값만 7백만원이 되는 제품은 아무리해도 보급형이 될 수 없음은 물론이었다. 이기식의 회고.
『궁리 끝에 일본 후지쓰에서 개발한 일본의 보급형 워드로세서 「오아시스」를 모델로 삼기로 했죠. 가격을 2백만원대로 낮출수 있다는 계산이 나왔기 때문이었습니다. 그런데 모델로 삼은 오아시스 기종의 국내 반입이 여의치 못해 개발팀이 그 실물을 본것은 명필의 개발이 거의 끝나갈 무렵이었씁니다.』
아뭏튼 명필은 1그룹이 개발에 착수한지 10개월만인 83년 8월에 탄생됐다.
생산단가를 최소화 하기 위해 수출용 CRT가 사용됐고 본체는 생산 중단된 금전등록기의 금형(고려시스템은 당시 이분야도 참여하고 있었다)을 변형시켜둘러씌운, 우스꽝스러운 모습을 하고 있었다. 그러나 이는 국내에서 처음으로화면(메뉴) 중심의 기능 선택과 편집이 가능한 워드프로세서의 등장을 의미하는 것 이었다. 83년 10월에 발간한 한 월간지에 게재됐던 명필의 첫 광고를 보면 권장소비자 가격은 프린터를 제외하고 2백61만원이었다.
명필의 첫 고객은 「보급형 워드프로세서 개발」프로젝트가 특정연구과제에 포함되는데 결정적 역할을 했던 청와대 비서실이었던 것으로 전해직고 있다.
명필은 이후 1그룹에 의해 84년 한자 처리기능을 추가한 명필II로 업그레이드 됐고 86 년 까지 명필IV 모델까지 개발됐다. 1그룹은 또 87년 명필의하드웨어를 인텔 80286기반의 IBM호환 PC용으로 이식했고 이를 계기로 스프레드시트와 그래픽기능을 함께 구현할수 있는 「수퍼 명필」의 개발까지 맡았으나 빛을 보지는 못했다.
한편 명필이 개발돼 나올 무렵인 83년 국내에는 영문 워드프로세서의 대명사인 미국의 「워드스타」가 소수 전문가들 사이에 보급돼 있었고 국산으로는 큐닉스가 개발한 「으뜸글」이 있었다. 1인용과 2인용등 2개 기종으로 돼있던 으뜸글은 워드스타처럼 문장 중간에 명령어를 입력하는 방식의 제품이었는데 메뉴선택방식의 명필과 달리 상당기간동안 교육받은 사람이 아니면쉽게 사용할수 없는 전문가용이었다. 사용자층이 서로 분명하게 달랐음에도불구하고 명필과 으뜸글은 당시 국내 시장상황이 워낙 좁아 곳곳의 입찰경쟁에서 부딪치곤 했는데 이런 기억을 두고 정왕호는 『명필의 발전에 가장 큰역할을 한 것은 으뜸글이었다』고 회고 하고 있다.
<서현진 기자>
작성일자 : 1996.08.29
서현진 기자 E-MAIL:jsuh@www.etnews.co.kr
컴퓨터 파노라마 (34) 방황기 (9) 정보산업의 해와 전산망조정위원회의 탄생 차례로 돌아가기
83년은 국내 컴퓨터산업 역사에 하나의 큰 획을 그은 해였다. 같은해 1월28일 정부는 83년도 제1차 기술진흥확대회의를 열고 83년을 「정보산업의 해」로 선언한 것이다. 정보산업의 해 선언은 정보화 실현을 위해 정부차원에서 각종 시책을 전개하고 수천억원의 예산을 투입하겠다는 것만을 뜻하는 것이 아니었다.
정부가 이제 막 손아귀에 잡힐듯 말듯하는 정보산업을 「투자할만한 가치가 있는 산업분야로 인정했다」는 것을 의미했다. 민간업계에도 정보산업의해의 선언은 큰 의미를 가져다줬다. 신제품 개발에 대한 투자, 표준화 수용등 쉽게 결론에 이르기 어려운 의사결정 과정에서 비로소 확신을 가질 수 있었던 것이다. 정부라는 우산 아래 오직 개발과 생산에만 전념할 수 있는 계기가 마련된 것이다.
정부 역시 70년대 후반부터 급증하기 시작한 컴퓨터회사나 전산화 도입을추진하는 기업의 난립과 돌출행동을 추스려야 할 필요성을 느끼던 터였다.
사실 82년까지만 해도 업계는 수시로 바뀌는 정부정책에 대해 모종의 불안감을 가졌다. 컴퓨터 국산화와 교육용 컴퓨터의 보급과 같은 특정과제를 놓고관련부처끼리 다툼을 벌일 징후가 곳곳에서 드러나면서 상황은 보다 심각해졌다. 일부 업체가 정부에 노골적인 불신감을 드러내면서 전산화 또는 국산화를 포기하겠다고 떼쓰는 일들이 빈번하게 발생하곤 했다. 82년께 과기처 정보계획국장이던 K씨의 회고.
『82년 7월 「전자계산조직(컴퓨터)의 도입 및 이용에 관한 규정」이 제정되면서 정보산업 정책의 핵심이던 컴퓨터 도입(수입) 심사업무가 과기처에서상공부로 이관됐습니다. 대신 과기처는 복마전으로 표현됐던 컴퓨터 국산화정책을 맡게 됐는데 만족스러울 리가 없었습니다. 어느날 갑자기 과기처는당시 국산화가 추진되고 있는 컴퓨터 품목에 대한 수입금지 조치를 취하게됩니다. 이른바 「국산화 지원 조치」라는 것이었는데 국산화 업체들은 두팔을 들고 환영했지만 전산화 계획을 진행하던 금융기관, 정부기관, 대기업 등컴퓨터 수요자측은 엄청나게 반발하고 나섰습니다. 그런 식이었지요.』 불신감만 더해주던 정보산업 정책이 정보산업의 해 선포로 가닥을 잡게 된 것은정부입장에서도 바람직한 일이었다. 정보산업의 해 선포를 계기로 83년 한해동안에만 기록에 남을 만한 다수의 굵직굵직한 프로젝트가 시작되거나 완료됐다. 당시 신문기사를 정리해보면 현재 정보통신산업의 근간을 이루는 정책대부분의 출발점이 83년으로 거슬러가고 있음을 볼 수 있다. 몇개를 추려본다.
83.3 정보산업 육성방안 대통령에 보고 과기처, 최초 국내 컴퓨터실태 조사
83.4 KBS 2TV, 국내 최초 컴퓨터강좌 프로그램 신설 정보산업육성법(안)마련
83.5 상공부 정보산업담당 정보기기과 신설 행정전산화 계획 확정83.7 청와대에 정보산업 육성위원회 설치 국가기간전산망 구상(안) 대통령에 보고
83.11 미국의 마이크로소프트 국내진출(큐닉스와 기술제휴)83.12 국가기간전산망 기본방침 마련
정보산업의 해 선포를 이끌어낸 83년도 1차 기술진흥확대회의는 대통령을비롯, 전 국무위원과 한국과학기술연구원(KAIST), 전자기술연구소(KIET), 한국데이타통신(현 데이콤) 등 출연기관과 공사, 한국전자공업진흥회 등 단체, 기업, 대학, 연구소 등 각계 대표 2백70여명이 참석한 가운데 그해 1월 28일청와대에서 열렸다.
기술진흥확대회의는 5공화국 정부가 기술개발이 국가발전의 원동력이 된다는 신념아래 기술 드라이브 정책을 추진하기 위해 70년대부터 지속돼온 무역진흥확대회의를 본떠 만든 정책 상설기구였다. 의장은 대통령, 주관부처는과기처였다. 각부처, 업계, 연구계, 학계 대표 등으로 구성되는 기술진흥확대회의는 82년 11월 첫회의 이후 분기별로 한번씩 열렸는데 주요 기능은 기술개발 제도 마련과 개선, 기술성공사례 발표, 공로자에 대한 훈포장 등을통해 산학연 기술개발 의욕을 고취하는 것이었다.
이날 열린 83년 1차 회의 내용은 결과적으로 정보산업의 해 선포가 핵심이었다. 대통령이 직접 주재한 이 회의에서 정부는 82년 11월의 첫회에서 한국데이타통신 이용태 사장(현 삼보컴퓨터 회장)이 정보산업계를 대표해서 보고했던 정보산업의 해 선언 건의를 정식으로 채택했다. 이 회의에서는 또 이정오 과기처장관이 정보산업의 해를 실현하기 위한 각종 시책을 전개하며 향후5년 동안 2천억원의 예산을 관련기술 개발에 투자하기로 하는 등의 정책방향을 제시해 언론의 큰 관심을 모았다.
이날 회의 이후 정보산업 정책 관련부처였던 과기처, 상공부, 체신부 등과유관부처인 문교부(컴퓨터 교육), 총무처(전산행정)등 5개 부처 관계자들이바빠지기 시작했다. 정보산업의 해를 정보산업 육성 원년으로 삼는다는 기술진흥확대회의 결의에 따라 2개월 안에 그 육성방안을 마련, 대통령에 보고해야 했기 때문이다.
83년 3월 14일 대통령에 정식 보고된 「정보산업 육성방안」은 정부가 체계적으로 정보산업 육성에 나서겠다는 것을 밝힌 최초의 정책문건이라는 의미를 갖고 있다. 뿐만 아니라 우리나라가 오늘날과 같은 정보통신산업의 자리를 다지는 계기를 제공한 행정전산망, 금융전산망, 교육연구전산망, 국방망, 공안망 등 5대 국가기간전산망 계획수립에 대한 직접적인 근거를 마련해주고 있기도 하다.
구체적인 내용은 다음호에서 소개하겠지만 정보산업 육성방안의 문건 말미에는 〈정보산업 육성을 위한 건의〉라는 것이 있는데 이 대목이 바로 오늘날 전산망조정위원회의 모태가 되는 정보산업육성위원회의 구성과 운영에 대한 것이다.
정보산업육성위원회는 정보산업과 반도체 관련업무를 관련기관별로 분담하고 협조체계를 구축하기 위한 정부내 기구로서 위원장에는 대통령 비서실장, 위원에는 과기, 상공, 체신, 문교, 총무 등 5개부처 차관과 청와대 비서실의정무2, 경제, 교문 수석 등 10여명이 임명됐다. 위원회의 주요기능은 반도체공업과 정보산업육성의 기본계획을 수립하고 중요 정책사항에 대해 심의하고조정하는 일이었다. 부처간 업무분장, 필요한 지원대책, 전문인력의 양성, 통신망과 컴퓨터의 이용기술개발사업, 관련제품의 생산 등 구체적인 역할 등에 관한 것도 포함돼 있다.
정보산업육성위원회는 정보산업 육성방안 문건에서 구성이 건의될 당시만해도 이미 활동중이던 반도체공업육성 추진위원회에 관련기능을 보강, 반도체 및 정보산업육성위원회라는 이름으로 한시적으로만 활동할 예정이었다. 81년에 발족됐던 반도체공업육성 추진위원회는 83년 64K D램의 개발완료를 목전에 두고 있었고 2백56K D램 개발에 착수하는 등 상당한 추진력을 과시하던중이었다. 따라서 독립기구를 만드는 것보다 반도체쪽의 성공사례와 운영방식을 그대로 활용하는 것이 좋다는 건의였다. 이같은 방침에 따라 정보산업육성위원회 위원장도 당초에는 청와대 과학기술비서관이 내정돼 있었고 위원도 KAIST 전산개발센터(현 시스템공학연구소) 소장, 한국데이타통신 사장, 총무처 행정관리국장, 과기처 정보계획국장 등 차관급보다 몇단계 낮은 인사들로 채워질 판이었다.
하지만 전자산업과 정보산업 육성에 강한 의지를 보인 것으로 전해지는 대통령의 지시에 의해 위원장은 비서실장, 위원은 전원 차관급으로 격상됐다.
당시 정보산업육성위원회 실무위원회에서 연구조사활동을 벌였던 C씨의 회고.
『대통령은 정보산업 육성방안을 보고받는 자리에서 위원장을 비서실장으로 격상시키고 위원회의 기능과 목적도 반도체와 정보산업을 동등하게 배분하라는 지시를 내렸다고 전해 들었습니다. 국장급들이 나설 일은 따로 있다는 말도 했다는 것입니다. 결국은 비서실장이 5월 14일 「정보산업육성위원회 구성과 운영에 관한 (대통령)의 지시」를 각부처에 하달함으로써 강력한힘을 갖는 위원회가 발족될 수 있었던 겁니다.』
83년 5월에 정식발족된 정보산업육성위원회는 자신을 탄생시킨 정보산업의해가 무색하지 않을 만큼 열성적인 활동을 벌였다. 이 위원회가 대통령이나위원장에 보고한 주요 정책문건들은 「국가기간전산망계획 관련 사항보고」(7월) 「국가기간 전산망 구성, 운영에 대한 각계 의견청취 보고서」(9월)「국가기간전산망 구성, 운영을 위한 제안」(10월) 등이 있다. 당시 우리나라 정보산업 현황이나 관련정책 수준 등을 짐작할 수 있는 중요한 내용이 담겨 있는데 정보산업육성위원회는 이들 보고서를 토대로 83년 12월 「국가기간전산망 계획(안)」을 내놓게 된다. 바로 오늘날 5대 국가기간전산망 사업의 시초가 되는 역사적인 문건이다.
정보산업 관련기구로는 사상 처음으로 대통령 직속으로 발족된 정보산업육성위원회는 이듬해 4월 기술진흥심의회가 발족되면서 기술개발 정책업무를이관하고 행정조정지원업무만을 수행하다가 84년 8월 전산망조정위원회로 개편된다. 전산망조정위원회는 84년 이후 오늘날까지 국가 정보통신산업 정책을 의결하고 심의하는 최고 기구로 통한다. 다시 정리해보면 83년 정보산업의 해의 선포는 바로 전산망조정위원회의 탄생을 알리는 소쩍새였던 셈이다.
<서현진 기자>
작성일자 : 1996.09.05
서현진 기자 E-MAIL:jsuh@www.etnews.co.kr
컴퓨터 파노라마 (35) 방황기 (10) 정보산업 육성과 대통령의 관심 차례로 돌아가기
지난회 「정보산업의 해와 전산망조정위원회의 탄생」에서 언급했듯이 1983년이 「정보산업의 해」로 선포된 것은 정부가 비로소 정보산업을 투자할만한 가치가 있는 산업으로 인정했음을 의미했다.
정보산업의 해가 선포되자, 정보산업에 대한 관심은 범국가적으로 급속하게 확대되기 시작했다. 그 가운데서도 특히 청와대의 관심은 유별났다. 어느날 전두환 대통령이 비서관에게 『정보화사회가 무엇인가』라고 물은 적이있었다. 물론 급작스런 질문은 아니었다. 평소 대통령이 관심을 가져오던 터라 이 비서관은 준비해 뒀던 답변이 있었다.
『경제사회 발전의 중추적인 원동력은 이제까지는 물질과 에너지라는 2대요소였습니다. 미래학자들은 앞으로 여기에 정보라는 것이 추가돼 3대 요소가 된다고 합니다. 그런데 궁극적으로는 정보가 물질과 에너지보다 상위 개념으로 부상하게 돼 결국은 정보화사회가 된다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어떻게 정보화사회를 추진해야 하는가?』『정보산업을 육성하는 일이 급선무라고 사료됩니다.』『정보산업이 무엇인가?』
『컴퓨터와 관련된 산업입니다. 구체적으로는 컴퓨터를 통해 정보를 수집하고 처리하며 전달시키는 분야가 있을 수 있습니다.』
『컴퓨터를 알기 쉽게 설명해 봐, 요즘 학생들 교과서에는 컴퓨터나 반도체 얘기가 나오나?』
대통령의 정보산업이나 컴퓨터에 대한 관심은 이를테면 이런 식이었다. 그가 취임 직후부터 전자산업과 함께 정보산업에 대해 유별난 관심을 가졌다는것은 널리 알려진 사실이다. 박정희 대통령 역시 정보산업에 깊은 관심을 보였던 데다 82년 이후 관련 부처 장관들도 부쩍 정보산업을 경제 발전에 연동시켜 한다는 식의 동향 브리핑이 늘고 있던 때였다.
대통령은 취임 초기 컴퓨터에 대해 호기심에 가까운 궁금증을 갖고 있었던것으로 알려지고 있다. 이 때문에 담당 비서관은 틈이 나는 대로 『컴퓨터는하드웨어와 소프트웨어로 구성돼 있으며...』 하는 식의 별도 교양시간을 마련하곤 했다.
87년 퇴임을 몇 달 앞둔 어느 날 대통령은 총무처가 주관한 한 행정전산업무개발 시범 행사장에 참석했다가 퇴임 후에는 컴퓨터를 본격적으로 배우고싶다며 퇴임 후 포부를 밝혀 화제가 된 적이 있었다. 컴퓨터에 대해 대통령이 그처럼 자신있게 말할 수 있었던 것은 담당 비서관의 교양 때문이었다는얘기가 농반진반으로 전해지고 있을 정도다. 컴퓨터에 대한 대통령의 지대한관심 때문에 일어난 몇 가지 에피소드가 있다.
83년을 정보산업의 해로 선포한 83년 1월 28일 기술진흥확대회의에서는 그후속조치로 2개월 이내에 정보산업 육성방안을 마련, 대통령에 보고하기로돼 있었다. 과기처, 체신부, 상공부 등 관련부처 실무자들 비롯해서 한국과학기술원 연구원들과 업계 전문가들이 이 보고서 작업에 함께 참여했다.
보고서 작업은 그러나 쉽지 않았다. 최대 난제는 무슨 내용을 담아야 할것인가가 아니라 내용을 어떻게 표현하느냐였다. 그도그럴 것이 보고서팀이작업에 앞서 청와대 비서실로부터 받은 지시사항은 무조건 이해하기 쉽게 작성하라는 것이었다. 보고서팀에 참여했던 K씨의 회고.
『난감했습니다. 사무자동화니 교환장치니 하는 용어들은 그런대로 가능했지만 예컨대 컴퓨터의 표준화니 정보교환용 코드니 하는 용어들은 표현할 방도가 없었습니다. 더욱이 표준화라는 용어는 보고서 내용의 핵심이었는데 정보산업 육성을 위한 선결과제로 컴퓨터의 표준화를 추진해야 한다는 것이 결론이었죠. 당시 국내에는 한글코드만 38종, 키보드 배열종류만 34종이나 되는 등 규격이 납립하고 있는 상황이었습니다... 그런데 아무리 생각해도 대통령이 이 말을 이해할 것 같지가 않았습니다. 그래서 다른 방도를 찾았지요.』
K씨는 이때 표준화라는 용어를 설명하기 위해 기발한 아이디어 하나를 제안했다. 서로 언어를 달리하는 각국의 민족 대표들이 모여 국제회의를 하는가상적인 상황을 통해 표준화 개념을 설명하자는 것이 K씨가 낸 아이디어였다. 이어지는 K씨의 설명.
『가령 한, 미, 일, 중 4개국 대표가 국제회의를 연다고 칩시다. 언어소통문제가 가장 큰 문제로 대두되는데 이의 해결에는 2가지 방안을 생각해볼 수있다는 것죠. 우선 1안은 모든 언어를 1대1로 통역할 수 있는 한영, 한일, 한중, 영일, 영중, 일중 등 6명의 통역사를 두는 것인데 그렇게 되면 회의가엄청나게 복잡해집니다. 2안은 표준 공용어를 두는 방안이죠. 유엔총회나 올림픽에서 영어를 공용어로 사용하는 것과 같은 방식인데 예컨대 한글을 공용어로 할 경우 한영, 한일, 한중 등 3명의 통역사만 필요하게 되며 회의 절차나 시간도 훨신 단축할 수 있지요... 또 공용어를 모국어로 삼는 한국의 입장은 얼마나 강화되겠습니까.』
컴퓨터 표준화 개념을 설명하는 가장 이상적인 방법으로서 K씨의 아이디어는 즉각 보고서팀에 채택됐고 최종 마무리된 정보산업육성방안 보고서 내용에 그럴 듯한 그림으로 그려져 83년 3월14일 대통령에게 보고됐다.
그러나 이 보고서 내용이 대통령을 얼마나 이해시켰는지는 구체적으로 전해지지 않고 있다. 다만, 현재 전산망조정위원회가 국가기간전산망사업 정책문서로 보존하고 있는 정보산업육성방안 사본의 맨 끝장에는 이 문건을 보고받은 직후에 쓴 것으로 보이는 대통령의 자필 메모가 첨부돼 있는데 이 메모내용으로 미루어 그 이해 정도를 가름해 볼 수 있을 뿐이다.
일반 용지(A4기준)크기의 백지에 1백여자 내외 분량의 이 메모에는 컴퓨터나 정보산업에 관련된 문구로는 정보산업기술위원회 위원장을 (과학기술비서관에서) 비서실장으로 격상하라(9월5월 본란 34회 참조)는 대목 외에 전자(정보산업), 콤퓨터, 하드(하드웨어의 약자인 듯), 소(소프트웨어의 약자인듯) 등 단지 4개의 단어만 등장하고 있을 뿐이다.(나머지는 대부분 반도체나부품 관련 용어로 채워져 있었다)
한편 전두환 대통령의 정보산업에 대한 관심도는 대내외에 과시되는 형태로 나타내 보이곤 했는데 아무튼 자의든 타의든 그는 재임기간 동안 전시회등의 행사 현장에 대규모 수행원을 대동하고 참석하는 일을 꽤 즐긴 것으로전해지고 있다. 80년 취임 2개월여 만에 찾았던 한국전자전(KES)을 거의매년 관람했던 일은 관련업계에 잘 알려져 있다.
대통령의 이같은 관심 때문에 일어난 해프닝 가운데 하나가 84년 4월22일잠실학생체육관에서 열린 「제1회 전국퍼스널컴퓨터경진대회」장에서의 정전사건이었다.
제1회 전국퍼스널컴퓨터경진대회는 과기처가 83년 정보산업의 해 선포와관련, 정부의 정보화실현 시책의 하나로 기획된 행사였는데 국내 최초의 컴퓨터경진대회였다는 점에서 이미 1년여 전부터 범국민적인 관심을 모아오던터였다.(제1회 전국퍼스널컴퓨터경진대회에 대한 내용은 다음 회에서 다룬다) 이날 행사는 경진대회 본선으로서 3백여명의 참가자들은 오전 9시 개회식에 이어 9시20분부터 체육관 바닥에 설치된 각자의 PC 앞에서 경시에 임했다. 예정된 시간(3시간)동안 제시된 규정대로 특정 프로그램을 작성하는내용이었다. 그런데 경시 시작 1시간이 지난 10시 20분경 체육관 전체에 갑자기 정전사태가 발생했다. 불과 1분도 못되는 정전 기간이었지만 경시장은난리가 났다. 1시간 동안 작업했던 프로그램 결과가 정전으로 깡그리 지워져버렸기 때문이었다. 초등부에 참가한 일부 어린 학생들이 여기저기서 목놓아엉엉 울기 시작했다. 경시장내 참가자들의 아우성과는 아랑곳 없이 10시30분경 또한번의 정전이 있었다.
참가자들은 대회본부 측에 강력하게 항의했고 본부 측은 결국 경시 마감시간을 12시20분에서 오후 2시20분으로 늦췄다. 이날에 벌어진 촌극의 또 다른하일라이트는 12시30분경 경시장 내에 공급된 빵과 우유상자들이었다. 참가자들이 경시시간의 연장으로 대회본부 측에 점심을 요구했고 본부 측이 이를수용, 참가자마다 식사대용으로 빵과 우유를 지급했던 것이다.
역사적인 컴퓨터경진대회를 엉망으로 만들어 버린 체육관 정전사태는 어이없게도 청와대 경호실의 무지 때문에 일어난 해프닝이었다. 이날의 정전은청와대 경호원의 소행(?)으로 드러났다. 그날 아침 예정에 없던 대통령의 경시장 방문이 계획되자 경호원들이 대회본부 측의 양해없이 안전 점검을 위해체육관 전기실의 전원스위치를 시험삼아 차단해본 것이었다.
경진대회의 실무책임자 가운데 한 사람이었던 A씨의 회고. 당시 A씨는 한국과학기술원(KAIST) 전산개발센터 소속 책임연구원으로서 행사용 장비와 기술 지원을 담당했었다.
『대통령의 방문을 통보받은 것은 당일 10시경이었습니다. 잔뜩 긴장하고있었는데 갑자기 정전이 되는 거예요. 그당시는 설마 경호원들이 전원 차단시험을 했을 거라고는 상상조차 못했습니다. 그후 두번째 정전 때도 제가 장비지원 등을 담당했는데 1회 때의 악몽이 생각나곤 해서 안정적인 전원공급을 위해 한전에 몇 차례씩 공문을 보냈던 일이 생각납니다.』
<서현진 기자>
작성일자 : 1996.09.12
서현진 기자 E-MAIL:jsuh@www.etnews.co.kr
컴퓨터 파노라마 (36) 방황기 (11) 교육용PC보급 계획-두마리 토끼를 다 놓치다 차례로 돌아가기
83년 「정보산업의 해」 선포를 전후해서 정부가 정보화시책 구현을 위해가장 심혈을 기울였던 부분은 국민에 대한 컴퓨터교육과 홍보였다. 83년 1월28일 이정오 과기처 장관의 기술진흥확대회의 동향 브리핑이나 83년 3월 대통령에 보고된 「정보산업산업 육성방안」에도 나와 있듯 교육과 홍보는 정부화 시책이나 정보산업 육성을 위해 가장 먼저 해결해야 할 과제였다.
컴퓨터교육은 전문인력 양성이라는 차원에서 각급 교육기관이 그 대상이었고 홍보는 정보화마인드 확산이라는 목표 아래 학생을 포함한 일반인 전체를대상으로 했다.
정보화시책을 입안한 주무부처인 과기처는 각급학교 교육과 일반인 정보화마인드 확산을 위해 두 가지 획기적인 행사를 고안해냈다. 예산지원을 통해각 교육기관에 교육용컴퓨터를 보급하는 것이 그 하나고 각종 정부시택을 알릴 수 있는 범국민적 행사를 마련하는 일이 그 두번째였다.
이 아이디어가 구체화돼 나타난 것이 10억원의 예산을 투입하기로 한 교육용컴퓨터 5천대 보급계획과 제1회 전국퍼스널컴퓨터경진대회 개최 계획이었다. 그런데 이 두 계획은 지금까지도 5공화국 시대의 전형적인 행정만능주의산물이라는 오명을 벗지 못하고 있다.
당초 의도가 변질돼 졸속 보급된 5천대나 되는 교육용컴퓨터는 초기부터거의 활용되지 못한 채 고색창연한 고철덩어리로 변하고 말았다. 하드웨어규격이 미흡했던 데다 실행할 소프트웨어는 태부족이었고 정부 후속지원도더이상 이어지지 못한 것이 그 이유였다.
전국퍼스널컴퓨터경진대회 역시 요란하게 치러진 한두해를 제외하고는 갈수록 축소돼 나중에는 스폰서가 바뀌면서 본래 명칭조차 사라지고 말았다.
행사비용이나 규모가 엄청난 장비를 모두 기업체 부담으로 돌리는 데 따른페단이 발생했고 참가 의의를 느끼지 못하는 참가자의 숫자는 해마다 줄어들었다.
교육용컴퓨터 5천대 보급계획은 사실 정보산업의 해를 계기로 입안된 것은아니었다. 이 계획이 처음 알려진 것은 82년 초 과기처의 새해 업무보고에서였다(7월 28일자 본란 「PC산업의 태동」 참조). 이정오 과기처 장관은 이보고에서 10억원의 예산을 투입, 각급 학교에 5천대의 컴퓨터를 보급하겠다는 원대한 새해 업무계획을 대통령에 보고했다.
이에 따라 82년 5월부터 보급 기종을 생산할 업체 선정과 기종 규격작업을벌였으나 여러 이해관계 때문에 이 계획은 지지부진한 상황이었다. 그러다가정보산업의 해 선포를 계기로 일정에 박차를 가해 83년 8월 해당 교육기관에컴퓨터보급이 끝나 일단 마무리됐다.
과기처의 교육용컴퓨터 보급계획은 그러나 졸속행정 탓으로 예산낭비만 초래했다는 비난을 면치 못했다. 사실 이 비난은 보급계획이 입안되던 82년부터 이미 예고돼 있었다. 과기처가 처음 이 계획을 세운 동기는 정보산업과컴퓨터 교육에 대한 정책 주도권를 동시에 확보하기 위한 것, 즉 두 마리 토끼를 한꺼번에 잡으려는 계획에서였다.
당시 과장 직책으로 이 계획에 관여했던 과기처 C씨의 회고.
『81년 새 정부가 들어선 직후 뭔가 참신하면서 파급효과가 큰 것을 찾고있던 때였습니다. 마침 컴퓨터 국산화에 대한 열기가 한창이었는데, 하지만컴퓨터만 국산화하면 뭐합니까. 규모의 경제를 이룰 만한 수요가 생기질 않았는데. 그래서 생각해낸 것이 교육용 컴퓨터 5천대 보급이었습니다. 컴퓨터국산화 업체들에 큰힘이 될 수 있는 것은 물론이고 컴퓨터 교육 확산이라는두마리 토끼를 동시에 잡을 것 같았습니다. 사전에 청와대측에 조율해보니매우 좋은 아이디어라는 것이었습니다. 예산 당국에 대한 조정은 두말할 필요가 없었지요.』
그러나 두마리 토끼는 쉽게 잡히지 않았다. 한국전자기술연구소(KIET)가대행한 이 프로젝트는 기종 생산업체 선정작업부터 쉽게 진행되지 못했다.
과기처로부터 용역을 의뢰받은 KIET가 규격작업만 하기로 하고 생산업체 선정은 상공부에 맡겨버리는 등의 우여절이 시작됐던 것이다(KIET는 상공부 출연기관이었다). 교육용컴퓨터를 생산 보급하겠다고 신청한 곳은 때마침 컴퓨터국산화 기치를 내걸었던 삼성전자, 동양나이론(효성컴퓨터), 삼보컴퓨터, 고려시스템산업, 대한전선, 금성사, 한국상역(현 한국컴퓨터), 동양시스템산업, 삼성전관 등 13개사나 됐다. 이들은 하드웨어의 구성, 소프트웨어의 내용, 응용프로그램 계획, 주변기기 등 4개 분야에 걸쳐 작성한 「교육용컴퓨터 개발계획서」를 상공부에 제출하고 낙점을 기다렸다. 그러나 제출된 계획서 대부분은 프로젝트 수행계획을 소개한 내용이라기보다는 그때까지 각사가개발중이던 상업용 시제품 규격만을 나열해놓은 것에 불과했다.
상공부는 이들 계획서를 토대로 적격심사를 벌여 이 가운데 삼성전자, 동양나이론, 삼보컴퓨터, 금성사, 한국상역 등 5사를 교육용컴퓨터 생산업체로선정, KIET측에 통보했다. 생산업체를 5사로 제한한 것은 업체당 공평하게 1천대씩 생산하게 한다는 뜻에서였다.
상공부가 심사과정에서 어떤 기준을 두고 업체선정 작업을 벌였는지는 전해지지 않지만 나중에 탈락된 업체들의 불만은 컸다. 어차피 KIET가 새로운규격을 제정할 터인데 계획서에 적힌 시제품 규격이 무슨 소용이 있겠느냐는얘기였다. 한마디로 심사결과에 승복할 수 없다는 것이었다.
그도 그럴 것이 KIET는 5사가 교육용컴퓨터 개발 생산업체로 선정된 82년7월에서야 기종의 기본규격을 제시하고 연내에 설계도면과 운영지침서를 제출하라는 일정을 통보하게 된다.
당시 KIET가 제시한 기본규격은 매우 간단한 것이었다. 데이터처리 성능은8비트로 중앙처리장치(CPU) 속도와 기본메모리는 각각 1 및 16 이상일 것, 소프트웨어로는 모니터 프로그램(롬바이오스를 그렇게 불렀다)과 베이식 언어 번역기가 기본이었는데 각각 8 롬에 내장해야 된다는 것 등이었다.
KIET는 이때까지만 83년 신학기 이전에 5천대분의 컴퓨터를 5사에서 각급학교에 보급할 방침이었다. 그러나 이 일정은 각 업체들의 이해관계가 얽혀5개월이 넘는 동안 답보상태가 계속됐다. 5사는 기존에 독자 개발해오던 것을 어떻게 하면 추가비용 부담없이 KIET 규격에 뜯어맞출까 하는 궁리만 하다가 허송세월한 셈이었다. 그나마도 83년 8월에나 끝마칠 수 있었던 것은정보산업의 해 선포를 계기로 관련부처들이 참여업체들에 약속된 일정의 준수를 독려한 결과였다.
제품개발이 끝날 즈음인 83년 초 5사 입장은 또다시 바뀌어있었다. KIET가당초 제시한 규격은 베이식 언어 정도만를 사용할 수 있는 가장 단순한 형태의 성능만을 구현할 수 있는 수준이었다. 그런데 실제 KIET가 대량 생산에앞서 83년 3월 각사의 개발품에 대해 최종 테스트를 실시했는데 5사 제품 모두가 기본 규격을 훨씬 초과하는 고급 기종으로 업그레이드 돼 있었다.
5사는 저마다 이 기종을 과기처 납품 외에 추가로 대량 생산해서 독자 시판할 계획을 새워 놓고 있던 터였다. KIET 규격은 애당초 컴퓨터 기능을 흉내만 낼 수 있는 일종의 최소 규격이어서 일반 사용자들이 요구하는 그것과는 큰 차이가 있었다.
KIET가 처음부터 최소규격을 제시한 것은 빠듯한 예산 때문이었다. 결국 KIET는 5사로부터의 대당 납품가격을 24만원으로 미리 정해놓고 거기에 맞는규격작업을 벌였던 것이다. 24만원은 과기처 예산 10억원에다 나중에 특별추가된 2억원 등을 합친 12억원을 5천대로 나눈 수치였다.
24만원의 납품가격에 맞출 수 있는 컴퓨터는 당시로서도 존재하지 않았다.
여기서 5사는 KIET 규격 준수가 무의미하다고 판단, 이 규격을 크게 상회라는 기종 개발 방침을 굳혔던 것이다. 삼성전자 컴퓨사업부 과장이었던 K씨의증언.
『삼성은 과기처의 계획이 교육용컴퓨터 보급 차원 그 자체보다는 민간업계 수요창출에 더 많은 기대를 걸고 있다는 것을 읽고 있었습니다. 나중에들은 얘기지만 다른 4사들도 과기처 납품가격은 대당 24만원에 맡추되 실제개발은 50만~60만원대의 시판기종 규격을 염두에 두고 있었다는 겁니다. 그러고 보면 5사는 앞뒤를 재고 있었는데 정부 관계자들만 몰랐다는 얘기죠.』
금성사 OA개발부문 책임자였던 또다른 K씨의 회고.
『최종 테스트 후 시판가격을 계산해 보니 본체 50만원, 모니터 6만원, 카세트 테입 드라이브(보조기억장치) 4만원 등을 합쳐 60만원 정도였습니다.
사정이 이랬으니 5사 모두 과기처 납품분만 생산할 리가 없었지요. 나름대로관납에 따른 적자 매출 보전 계획을 세웠던 겁니다.』 아무튼 이렇게 해서 5사가 생산한 기종이 「SPC-1000」(삼성전자), 「트라이젬-30」(삼보컴퓨터), 「스폿라이트 1」(한국상역), 「하이콤-8」(동양나이론), 「금성패미콤」(금성사) 등이었다.
이들 5개 기종은 83년 8월까지 전국 90개 상업고등학교, 10개 직업훈련원, 17개 각급 공무원교육에 골고루 배분됐다.
하지만 속칭 「차 떼고 포를 떼서」 24만원에 맞춰 납품된 컴퓨터가 제대로 쓰여질 리 만무했다. 당시 한 컴퓨터전문지 기자였던 P씨의 회고.
『누가봐도 사용이 불가능한 장난감 컴퓨터였지요. 더욱이 당시 컴퓨터 환경에서는 프린터나 플로피디스크드라이브 등 다른 보조기억장치 등을 추가하는 것이 일반적이었는데 그 비용이 1백20만원~1백50만원이나 됐습니다. 재정이 빈약한 상업학교나 직업훈련원에서 엄두를 냈겠느냐는 것이죠.』
그러나 과기처는 교육용컴퓨터 보급계획이 마무리된 83년 8월 이후 단 한차례도 이에 대한 보완책이나 추가지원책을 발표한 적이 없다. 물론 과기처입장에서도 이미 마무리된 것을 보고된 사업을 재검토하거나 보완할 만한 여력이 있었던 것도 아니었다. 83년 9월부터 과기처는 새로운 계획 시행에 나서는데 그것이 바로 10월부터 시작된 제1회전국 퍼스널컴퓨터경진대회 예선이었다.
<서현진 기자>
작성일자 : 1996.09.19
서현진 기자 E-MAIL:jsuh@www.etnews.co.kr
컴퓨터 파노라마 (37) 정착기 (1) 인천전국체전과 88올림픽 전산시스템 차례로 돌아가기
86아시안게임과 88올림픽은 우리 컴퓨터 역사에서도 하나의 획을 긋는 커다란 사건이었다. 누구도 성공을 자신하지 못했던 양대 스포츠 행사의 전산 프로젝트를 통해 우리나라의 컴퓨터산업은 거듭났다. 정보화사회 진행속도에도 엄청난 가속도가 붙었다.
컴퓨터업계에서는 지금도 86아시안게임과 88올릭픽 전산프로젝트를 「단일 프로젝트로는 최대규모」로 친다. 체육계에서도 이 양대 전산 프로젝트의 성공을 「스포츠과학의 새로운 장」이 열린 계기로 여기고 있다.
86 및 88 전산 프로젝트에 대한 논의가 시작된 것은 서울이 올림픽개최지로 결정됐다는 바덴바덴발 뉴스의 생생함이 채 가시지 않은 81년 가을이었다. 서울올림픽조직위원회 사무총장 이원경(전 외무부장관)이 한국과학기술연구원(KAIST)부설 전산개발센터 소장 성기수(현 동명정보대 총장)를 광화문 조직위 사무국에서 처음 만난 것은 10월 어느 날이었다.
『76년 몬트리올올림픽이나 현재 준비 중인 LA올림픽(84년)에 버금갈 88 올림픽전산시스템을 국내 기술로 개발할 수 있겠습니까?』
『당연하지요. 현재 기술만으로도 올림픽 때까지 훌륭한 전산시스템을 개발할수 있습니다. 올림픽전산화는 우리나라 정보산업에 미치는 영향이 엄청날 것으로 자신합니다. 이 영향력 때문에라도 외국 기업들에 이 프로젝트를 맡기면 않됩니다.』
『그렇다면 성소장께서 올림픽 전산화에 대한 기초조사를 좀해주시오.』
이원경 총장과 만난 직후 성기수 소장은 즉시 선임연구원 이단형(현 시스템공학연구소 책임연구원)을 팀장으로 하는 올핌픽 전산시스템 개발 기초조사팀을 만들었고 82년부터 본격 활동에 나섰다.
이 조사팀에 대한 예산지원은 그러나 올림픽 조직위원회가 아닌, 과기처의 특정연구개발사업비를 부랴부랴 끌어온 것이었다. 올림픽전산시스템 개발에 대한 단서를 제공하고도 조직위 측은 당장 필요한 비용을 82년도 예산에 포함시키지도 않았던 것이다. 전후 사정을 감안해 보면 두 사람의 만남에서 이원경 총장은 단지 88올림픽전산시스템의 윤곽 정도를 알아보고 싶어한 반면 성기수 소장은 엄청난 기대를 걸고 있었던 얘기가 된다.
막 출범한 서울올림픽조직위원회로서는 다른 업무에 비교해서 전산시스템의 개발계획 수립이 그리 시급했던 것은 아니었다. 더욱이 조직위 측은 여차하면 84년에 치뤄질 LA올림픽 전산시스템을 그대로 들여올 심산이었다. 실제로 LA올픽에서는 76년 몬트리올 올림픽 조직위원회가 미국회사를 동원해서 개발한 경기결과처리시스템( SIJO)를 들여와 약간 수정해서 사용할 판이었다.
그러나 국내최고 권위의 엘리트 기술집단을 자부하고 있는 KAIST 전산개발센터 측 입장은 달랐다. 88올림픽전산시스템을 자체 개발하는 일은 절대절명의 과업이었다. 무엇보다도 KAIST의 기술개발 능력을 대내외에 평가받을 수 있고 88년 이후 차기 올림픽전산시스템 수주 가능성 등 세계무대 진출을 가늠해 볼 수 있는 절호의 기회가 아닐 수 없었다.
KASIT를 출연연구소로 거느리고 있는 과기처 입장 역시 성 소장 말대로 프로젝트 를 성공적으로 추진했을 경우 국내 정보산업에 미칠 수 있는 영향력은 엄청나다는 것을 모를 리 없었다.
KAAST와 서울올림픽조직위원회간 시각 차가 결정적으로 깊어진 것은 83년에 들어서면서였다. 시기가 시기였던 만큼 서울올림픽조직위원회는 88올림픽에 이용할 전산시스템의 중요성을 비로소 인식했고 자체적인 연구조사에도 나서기 시작했다. 이해 봄 서울올림픽조직위원회는 막바지 준비작업에 도달한 LA올림픽조직위원회 측에 SIJO에 대한 정보제공을 요청했다. 일단 어떻게 돌아가는 시스템인가가 궁금했고 직접 개발한다면 자문도 필요한 시점이었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LA올림픽조직위원회 측의 답변은 의외였다. SIJO에 대한 견학이나 정보 제공을 조건부로만 허용한다는 것이었다. 조건이란 LA올림픽조직위원회가 그랬던 것처럼 서울올림픽조직위원회도 SIJO를 그대로 인수해 달라는 것이었다. LA올림픽조직위원회는 흑자 올림픽을 위해 갖가지 묘책을 마련 중이었고 그 가운데 하나가 바로 SIJO를 차기 올림픽조직위원회에 판매한다는 계획이었다.
88올림픽에 대한 국내외의 반응이 『과연 치룰 수 있을까』라는 비관론이 지배적이었던데 바덴바덴의 결정이 있기까지 고비 때마다 미국의 도움을 받은 바 있어 서울올림픽조직위원회로서도 LA 측의 이같은 조건은 그리 무모한 것은 아니었다. 당시 서울올핌픽조직위원회에 기술 담당으로 특채됐던 H씨의 회고.
『조직위 관계자 다수가 SIJO의 도입을 찬성하는 쪽이었어요. 게다가 고위층 역시 전산시스템 때문에 대세를 그르칠 필요가 있느냐는 시각이었죠. 올림픽을 치룬 경험이 전무한 데다 치안문제 등으로 안팍의 시선이 비판적이던 상황이었습니다. 성공 여부도 불투명한 전산시스템을 자체 개발한다는 것은 그만큼 큰 모험일 수밖에 없었습니다. 아무튼 당시로서는 몇 차례 올림픽을 치른 미국의 도움이 필요했었죠.』
이에 대해 KAIST측은 나름대로 반론을 폈다. 당시 기초조사팀으로 활동했던 C씨의 회고.
『KAIST측은 82년부터 착수한 기초 연구조사 분석을 통해 SIJO가 이미 70년대의 낡은 컴퓨터 사상에 의해 설계됐다는 사실을 확인할 수 있었습니다. 기술 자체가 낙후된 것이었어요. 조직위 측에 구입 자체가 부당하고 에산낭비만 초래할 것이라는 분석 결과를 제출했습니다. 덧붙여서 KAIST가 확보하고 있던 기술이 오히려 앞서 있음을 부각시켰죠. 사실이 또한 그랬구요.』
그러나 상황은 갈수록 KAIST전산개발센터에 절대 불리하게 이끌어지고 있었다. 83년부터 본격화된 88올림픽 방송 중계권 협상만 해도 그랬다. LA올림픽조직위원회 측은 최고의 흥행권을 쥔 미국의 방송사들과 거래를 통해 SIJO구입 조건을 중계권 협상에 연계시키는 방법으로 서울올림픽조직위원회에 압력을 가했곤 했던 것이다.
SIJO의 도입과 자체개발을 놓고 서울올림픽조직위원회와 KAIST가 팽팽한 대립을 보이고 있을 때 서울의 한 신문은 역대 올림픽 전산시스템 개발과 운영 사례를 모아 분석한 기사를 통해 사실상 조직위 측 입장을 대변함으로써 세인의 눈총을 사기도 했다. 전산시스템의 잦은 고장으로 기록이 자주 번복되는 등 운영에 큰 문제점을 드러냈던 68년 멕시코시티, 76년 몬트리올, 80년 모스크바 대회의 실패 이유를 주최국의 과학기술적 역량 부족으로 돌렸던 것이다.
일이 이처럼 불리하게 돌아가자 KAIST 전산개발센터는 방법을 바꿔 올림픽 전산시스템을 자체개발할 수 있는 기술과 노하우를 실증해 보임으로써 조직위를 설득해나가기로 했다. 기초조사팀에 참여했던 A씨의 회고.
『누구나 쉽고 아주 가깝게 접할수 있는 사례에서 기술과 노하우를 실증해 보이기로 했습니다. 우리팀은 그해 10월 인천에서 64회 전국체전이 열린다는 사실을 새삼 깨달았고 종목수나 운영면에서 전국체전이 올림픽보다 더 큰 규모라는 점을 착안해내기에 이르렀죠. 우선 체전 전산시스템을 개발해서 운영해보는 과정을 통해올림픽전산시스템의 실체와 KAIST의 기술수준을 증명해보일 셈이습니다.』
이같은 아이디어는 과기처로부터 『매우 적절하다』라는 반응과 함께 특별 예산지원까지 약속을 받아냈다. KAIST전산개발센터는 이에 앞서 이미 다양한 루트를 통해 몬트리올 올림픽, LA 프레 올림픽, 뉴델리 아시안게임, 에드먼튼 유니버시아드 등 이미 치뤄진 세계적인 스포츠행사의 전산시스템 자료를 수집, 분석까지 마친 상황이었다.
이같은 지원과 기초조사를 토대로 전산개발센터는 인천 체전 개막을 불과 3개월 앞둔 83년 7월 전국체전 전산시스템개발에 착수하게 된다.
인천시청의 당초 계획은 각종 전자 운영시스템 총괄사업자인 한국전자기술연구소(KIET)를 통해 각종 하드웨어 기반의 전자시스템 정도를 도입하려던 수준이었다. 이를테면 광섬유 선로를 이용한 페쇄회로TV, 팩시밀리 네트워크, 사설교환기( PABX) 등을 설치 운영하는 것이었다.(KAIST 전산개발센터는 나중에 KIET의 위탁연구기관으로서 체전전산시스템의과 28개 종목의 경기결과처리 및 관련정보 제공용 소프트웨어 개발에 나선다.)
42개 경기장에 설치된 단말기를 통해 집계된 경기결과를 서울 KAIST전산개발센터의 대형컴퓨터 IBM 3032로 전송해서 처리하고 그 결과를 다시 각 경기장의 단말기, 전광판, 프린터 등에 내보내는 방식의 체전전산시스템은 당시로서는 획기적인 것이다. 일반인들로부터도 엄청난 호응을 얻었다. TV 등 언론은 인천 전국체전 두고 88올릭픽을 앞두고 치뤄진 에행 올림픽 체전 또는 올림픽전산시스템 점검 체전이라는 평가를 내리기도 했다.
인천체전이 끝난 직후인 83년 10월 어느 날 성기수 소장은 광화문의 서울올림픽조직위원회 사무국에서 노태우 위원장과 자리를 마주했다. (인천체전 전산시스템의 성공적 운영을 확인한 조직위 측이 이 만남을 주선한 것으로 알려져 있으나 확실하지는 않다.) 그러나 이날 만남은 그렇게 구체적인 대화가 필요하지 않았다.
『자신있습니까?』
『자신있습니다.』
『국내 개발로 결정했으니 책임지고 수행해 보십시오.』
『최선을 다하겠습니다.』
<서현진 기자>
작성일자 : 1996.10.10
서현진 기자 E-MAIL:jsuh@www.etnews.co.kr
컴퓨터 파노라마 (38) 정착기 (2) 80년대 PC산업과 MSX차례로 돌아가기
83년께 세계 PC업계는 애플, 탠디, IBM, 오스본, 쿠퍼티노, 코모도어, 아타리, 타이멕스 등 10여개 미국 회사들이 군웅할거하던 시기다. 그러나 이들이 공급하는 PC는 모두 독자적으로 설계된 것들이어서 타 기종과의 소프트웨어 호환성이 결여돼 있다는 단점을 갖고 있었다.
10여개사 외에 또다른 세력으로는 이른바 호환기 생산업체들이 있었다. 수적으로 전체 컴퓨터업계의 99.9%에 해당됐던 이들은 그러나 독자개발 능력이 없어 애플이나 IBM 등을 복제생산하는 호환기사업에 주력하고 있었다.
83년께는 국내에서도 십수개의 기업이 국산 컴퓨터 제조라는 명목으로 PC사업에 뛰어들던 시기였다. 물론 국내기업의 목표는 대규모 개발비 투자와 기반기술이 요구되는 독자기종보다는 호환기 쪽이었다.
이들이 생산한 호환기를 놓고 장래성과 타산성 등을 저울질해 보던 대상은 크게 국산 교육용 컴퓨터계열, 애플컴퓨터의 「애플II」계열, IBM의 「IBM PC/XT」계열, 그리고 미국 마이크로소프트와 일본 아스키사가 규격을 공동 설계한 「MSX」계열 등 대략 4가지로 압축되고 있었다.
이 가운데 교육용 컴퓨터계열은 (본란에서 여러번 언급했듯) 삼성전자, 금성사, 동양나이론(효성컴퓨터), 한국상역(현 한국컴퓨터), 삼보컴퓨터 등 5사가 1천대씩 모두 5천대를 생산해 각급 학교에 납품키로 한 PC다. 그러나 회사마다 하드웨어 규격이 제각기 달랐고 설계 사상도 70년대의 마이크로컴퓨터 개념을 도입한 것이어서 굳이 호환PC라고 할 수도 없는 입장이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계열이 업계의 저울질 대상에 오를 수 있었던 것은 교육용 컴퓨터 계획 자체가 컴퓨터산업을 부양하기 위한 국책 프로젝트였다는 점때문이었다.
70년대 말부터 이른바 「애플신화」를 창조해낸 애플컴퓨터의 애플II계열은 초창기 국내에서 삼보컴퓨터 등 전문업체들이 가세하기는 했지만 청계천 세운상가 등 50여개 중소기업에 의해 생산, 보급돼 인기를 모았다.
애플II계열은 무엇보다도 패키지화된 DOS 운용체계와 6800과 같은 최신식 마이크로 프로세서를 채택하는 등 세련된 규격감각이 돋보여 설계기술 면에서 국산 교육용 컴퓨터보다 2∼3년 정도 앞섰다는 평가를 받기도 했다. 부품의 조립만으로 복제가 가능했던 것도 바로 세련된 규격감각때문이었다.
IBM이 애플II의 성공에 자극받아 발표한 것이 81년의 「IBM PC 5150」이고 이를 16비트로 업그레이드해 82년에 발표한 기종이 「IBM PC/XT」이다. 이 기종에서 유래된 PC라는 말은 이 때부터 일반인 사이에서도 폭넓게 사용되기 시작했다.
PC/XT는 8비트 애플II를 한차원 상위기종으로서 마이크로소프트의 「PC-DOS(MS-DOS)」 운용체계와 인텔의 8086 마이크로 프로세서를 채용하고 있었으며 설계가 정교하고 호환성과 확장성이 뛰어나다는 평가를 얻고 있었다. PC/XT의 성공으로 컴팩, 델, 제니스 등 미국 내에서만 수백여개의 호환기 제조업체들이 등장하게 됐다.
83년 말을 전후해 PC/XT 호환기사업에 관심을 보인 곳은 현대전자를 필두로 금성사, 삼보컴퓨터, 삼성전자, 대우전자, 스포트라이트컴퓨터(한국상역의 자회사) 등 10여개사에 이르렀다. 이 가운데 83년 창업한 신생 현대전자는 첫해부터 호환PC사업에 적극 뛰어들었고 미국의 자동차시장에서 돌풍을 일으키던 「현대 포니」의 명성을 PC분야에 이용하겠다는 야심찬 계획도 세워 놓고 있던 터였다.
PC/XT 호환기업계의 사업참여는 대부분 미국의 IBM 호환기업체들과 기술제휴를 통해 이루어졌다. 그러나 말이 기술제휴였지 사실은 미국기업들이 설계한 제품을 국내에서 조립생산하는 수준이었다.
주요 제휴관계로는 현대전자-미시우스, 금성사-OSM, 삼보컴퓨터-PCPI, 스포트라이트-MDS, 대우전자-코로나, 삼성전자-컴팩 등이었다. 이 가운데 컴팩을 제외하면 모두 직원 10여명 내외의 이름없는 벤처기업이었지만 국내에서는 대단한 업체로 알려지기도 했다.
국내기업이 생산한 PC는 기술제휴 회사의 상표를 부착, 대부분 미국으로 수출됐다. 실제 IBM 호환 PC사업은 처음부터 내수보다는 수출을 겨냥하고 시작된 것이었다. 컴퓨터 국산화와 함께 수출에 대한 관심이 매우 높은 시절이었다. 이즈음 한국계 미국기업 텔레비디오가 구로공단에 세계적인 규모의 컴퓨터 CRT 터미널 공장시설을 갖추고 1억달러 이상의 제품을 수출, 화제를 모으기도 했다.
이렇게 해서 83년 한해동안 텔레비디오를 비롯, 동양나이론, 동양정밀, 한국상역 등 국내기업들이 CRT 터미널분야에서 기록한 수출액이 2억달러나 됐다. IBM 호환 PC사업은 과정이야 어쨌든 CRT 터미널의 대를 잇는 황금 수출분야로 부상한 것이다.
애플과 IBM의 경쟁 틈바구니에서 중소기업들은 애플II를, 전문업체와 대기업들은 IBM 호환기를 각각 선택함으로써 국내 PC산업이 두 갈래로 가닥이 잡혀질 즈음 혜성처럼 등장한 것이 MSX이다.
MSX는 83년 6월 마이크로소프트와 아스키(ASCII)가 공동 주창해 제정한 표준규격에 따라 만들어진 일종의 주인없는 공개된 PC였다. 본체, 키보드, 화면, 주변장치 인터페이스 등 주요 4부분으로 이뤄지는 것은 다른 PC들과 크게 다를 바가 없었다. 표준규격은 이 4개 부분의 구성을 정의하는 것이었다.
그러나 MSX는 다른 PC들과는 다른 두가지의 특징을 갖고 있었다. 우선 기존 PC들과 달리 소프트웨어 호환성을 염두에 두고 설계됐다는 점이었는데 이는 생산회사는 달라도 하드웨어 규격만 준수해주면 얼마든지 소프트웨어 호환성을 유지할 수 있다는 것을 의미했다. 예를 들어 플로피 디스크의 경우 디스크 형식만 표준에 부합된다면 어느 회사의 것을 사용해도 무방했다.
또 다른 특징으로는 IBM이나 애플과 달리 마이크로소프트와 아스키가 MSX규격에 대한 권리를 고집하거나 직접 생산하지 않고 이를 업계에 공개해 버렸다는 점이 꼽혔다. 원한다면 누구든지 제품을 생산할 수 있게 한 것이다. 마이크로소프트와 아스키가 MSX규격을 공개한 것은 애당초부터 하드웨어에는 관심이 없었기 때문이었다. 어떤 MSX기종에서도 실행할 수 있는 소프트웨어를 개발, 공급하겠다는 것이 두 회사의 기본전략이었다. 마이크로소프트의 경우는 이미 IBM PC용으로 개발했던 베이직, C, 코볼, 멀티플랜, PC-DOS 등 걸출한 패키지들을 MSX버전으로 수정해 놓고 있던 터였다.
면도날을 팔기 위해 면도기를 무상 제공하는 것과 같은 이 전략은 그대로 맞아 떨어져 표준규격 발표 3개월 만에 미국과 일본에서 50여개의 하드웨어업체가 제품을 생산, 시판에 돌입했을 만큼 MSX는 빠른 속도로 돌풍을 일으켰다.
미국과 일본에서 MSX열풍이 일자 국내에서는 83년 11월 금성사, 삼성전자, 대우전자 등 가전3사가 여기에 뛰어들었다. 일본의 MSX 생산업체들이 산요, 마쓰시타(내셔널), 미쓰비시, 소니, 야마하 등 가전업체 일색이었던 것처럼 국내 가전3사의 참여결정 역시 별다른 의미가 있었다.
마이크로소프트와 아스키는 애플II와 PC/XT가 양분해버린 PC시장에 후발인 MSX를 조기 진입시키기 위한 마케팅전략으로 이른바 가정용 컴퓨터라는 개념을 도입하고 있었다. MSX를 사무실의 생산성 향상도구로서가 아니라 가정에서의 취미오락용이나 가사보조용으로 부각시킨다는 것이다. 제품에 대한 명칭도 애플과 IBM이 개인용 컴퓨터라며 두루뭉수리하게 불렸던 것과 달리 가정용이라는 뜻의 홈(home)이라는 단어를 앞에 붙여 「홈 퍼스널 컴퓨터」라는 별칭을 사용했다.
국내 가전3사가 경쟁적으로 MSX 생산에 적극성을 보인 것은 이때문이었다. MSX를 가전과 컴퓨터의 중간쯤으로 보았던 데다 치열한 기업경쟁도 의식하지 않을 수 없는 입장이었다. 3사 가운데 MSX사업 참여를 계기로 컴퓨터분야에 진출키로 한 대우전자의 경우 스탠퍼드대학 박사 출신 안경수씨(전 삼호물산 대표, 현 한국후지쓰 대표)를 본부장으로 영입하면서 전격적으로 컴퓨터사업부를 신설하는 등 나름대로 의미를 부여하기도 했다.
가전3사에 MSX사업에 대한 연결고리를 만들어 준 곳은 큐닉스 사장이던 이범천씨(전 한국마이크로소프트 대표, 현 큐닉스컴퓨터 회장)였다.
이에 앞서 큐닉스는 83년 초 국내기업 사이에서는 누구도 눈여겨 보지 않았던 매출액 5천만달러의 마이크로소프트와 기술제휴 겸 에이전트 계약을 맺어 놓고 있었다.
그러나 83년 말 마이크로소프트 등과의 라이센스 계약에 앞서 3사는 MSX의 국내생산에 대한 내부시각이 저마다 달라 쉽게 사업참여 결정을 내릴 입장이 못됐다. 3사마다 「해볼 만하다」라는 긍정론과 「자체기술 개발경험이 없어 결국 실패할 것」이라는 비관론이 팽팽하게 맞선 와중에서 이범천씨의 논리는 사뭇 신선한 것이었다.
『국내 PC시장이 그동안 복제 위주로 형성돼 제자리 걸음마를 해왔다면 MSX사업은 컴퓨터 대량생산체제와 소프트웨어분야의 고도화 등 산업 전반에 엄청난 변화를 가져온다. 또 사용자에게는 저렴하고 편리한 컴퓨터 환경이 마련되는 것이다. 일본에서 20여개 기업이 뛰어들고 있는 것은 유럽과 미국시장을 겨냥하고 있기 때문이다. 우리도 소프트웨어가 충분하고 대량생산체제가 갖춰진다면 수출을 통해 산업규모를 얼마든지 키울 수 있게 된다.』
이범천씨과 큐닉스의 노력은 결국 그해 11월 3사의 최종결정을 이끌어 냈고 4개월 후인 84년 3월부터 완제품이 출하되기 시작했다.
MSX는 국내에서 상당한 성공을 거뒀다. 활화산처럼 타오를 것 같던 IBM 호환 PC시장을 주춤거리게 하는 성과를 거두기도 했다. MSX의 열기는 88년 체신부의 제2차 교육용 PC기종 선정때까지 4년여 동안 국내 PC시장에서 타의 추종을 불허할 만큼 높은 인기를 누렸다. 결국 치열한 경합 끝에 IBM 호환PC가 교육용 PC기종에 최종 낙점되면서 MSX는 방향을 잃고 시장에서 점점 차취를 감추기 시작했던 것이다.
〈서현진 기자〉
작성일자 : 1996.10.24
컴퓨터 파노라마 (39) 정착기 (3) 출연연구소 통폐합과 ETRI의 탄생 차례로 돌아가기
1960년대 이후 컴퓨터, 반도체, 통신 등 전자분야 신기술 개발은 대부분 정부 출연연구소가 도맡아 해왔다. 민간 업계의 신기술 개발이 요원하던 70∼80년대 출연연구소의 역할은 절대적이었다. 정부는 수출대체 또는 수출전략 품목 관련 신기술 개발을 특정연구과제로 지정해서 출연연구소에 맡겼다. 이렇게 개발된 신기술은 곧바로 민간업계에 넘겨져 상품화했다. 80년대 초반 국내를 떠들썩하게 했던 64K D램이나 시분할전전자교환기(TDX-1)의 개발, 교육용컴퓨터 국산화 등의 프로젝트가 대부분 이런식으로 빛을 본 것들이다.
출연연구소들은 특히 전자산업 대국을 꿈꾸어 온 역대 정부들에게 없어서는 안될 보배로은 존재였다. 그러나 그바로 이같은 역할의 중요성 때문에 정치적 격동기나 정부조직의 이해관계에 따라 출연연구소들의 운명은 수시로 달라졌다. 어떤 때는 출연연구소를 전문 분야별로 대거 출범시켰다가도 어떤 때는 비숫한 연구소끼리 통폐합을 단행하곤 것이다.
66년 2월 한국과학기술연구소(KIST)를 필두로 하나둘씩 출범하기 시작한 출연연구소는 정부의 기초과학 또는 기반기술 확보라는 정책적 배려에 힘입어 79년경에는 16개가 활동중이었다. 그러나 80년 말 신군부의 국가보위비상대책위원회(국보위)는 사회전반의 개혁이라는 명분으로 16개의 연구소를 9개로 통폐합 해버렸다.
통폐합된 후 살아남은 9개 연구소는 KIST, 한국에너지연구소, 한국동력자원연구 한국기계연구소, 한국화학연구소, 한국인삼연초연구소, 한국전기통신연구소(KETRI), 한국전기기술연구소( KIET) 등이었다. 이 가운데 통폐합 규모가 가장 컸던 곳은 한국전기통신연구소(KETRI)였고 통페합의 칼날이 가해지지 않은 유일한 곳은 KIET였다.
이 가운데 KETRI는 한국통신기술연구소(KTRI)가 한국전기기시험연구소와 통합한 것이었다. KTRI와 한국전기기기시험연구소는 KIET와 함께 76년 말 출범한 전자산업 분야 전문 3대 출연연구소로서 한때 트로이카 연구소로 불리웠을 만큼 명성이 높았다. 3공화국이 컴퓨터, 전자통신, 반도체 등 3분야를 전자산업의 간성으로 육성하겠다는 방침 아래 출범시킨 의욕적인 연구소였다.(3개 연구소의 출범과정에 대해서는 본란 제24회에서 살펴본 바 있다)
85년 KETRI가 남아 있던 KIET를 흡수 통합한 다음 한국전기기시험연구소 부문을 분리해낸 것이 오늘날의 한국전자통신연구소(ETRI)이다. 이 과정을 알기 쉽게 설명하면 왼쪽의 <그림>과 같다.
복잡다기한 조직들이 얽히고 혀 출범했던 ETRI는 이후 단 한번도 통폐합 과정을 되풀이하지 않고 오늘에 이르고 있다. 다만 그 소속이 92년 과기처에서 체신부로, 95년 다시 정보통신부로 바뀌었을 뿐이다. 이에 반해 국보위나 5공화국때 통폐합됐던 다른 연구소들은 6공화국 이후 부활을 외치기 시작하면서 90년대 들어 거의 원상복구됐음은 물론이다.
결과론적인 얘기지만 훗날 정부쪽이나 출연연구소 관계자들은 85년 ETRI의 출범을 대해 『76년 이후 거듭돼온 출연연구소 개편바람이 마무리 되고 비로소 첨단 전자통신기술 연구체제가 정착됐다』고 평가하고 있을 정도다. 다른 연구소들이 특성과 자율적 역량이 무시된 채 통폐합돼 방황하고 있을 즈음 ETRI의 탄생은 오히려 갈라진 땅을 굳게하는 결과를 가져와 우리나라 전자통신 부문 발전을 가져왔다는 것이다.
사실 따지고 보면 ETRI의 출범은 당시까지 제각각의 길을 가던 전자(컴퓨터와 반도체) 부문과 통신 부문이 상호 연계 필요성을 느낀 나머지 자연스럽게 이루어진 결과라고도 할 수 있었다. ETRI의 출범은 그래서 전자와 통신이 결합한 제3의 기술 즉, 정보통신 기술의 탄생 가능성을 알리는 신호탄이기도 했다.
ETRI의 출범에 앞서 당시 국내외의 컴퓨터, 통신, 반도체 연구 분야는 엄청난 변화를 겪고 있었다. 우선 미국, 일본, 영국 등 선진국은 이미 80년 초부터 5세대 컴퓨터 개발연구에 나서고 있었다. 이런 노력들은 80년대 중반부터 결실을 맺어 일부 선진국들 사이에서는 이른바 「하이테크 혁명」의 물결이 체감되던 상황이었다.
국내 언론과 지식층에서도 크게 유행했던 「하이테크 혁명」은 이제까지 하드웨어 위주로 발전해온 산업 구조가 소프트웨어 중심으로 급격하게 변화된다는 뜻을 담고 있었고 이 혁명을 이끌어 내는 것이 바로 최첨단 반도체와 통신 기술 이라는 것이었다. 앨빈 토플러와 같은 미래학자들은 『컴퓨터, 반도체, 통신 기술의 결합은 음성, 데이터, 화상 등의 정보를 동시에 송수신하는 종합 정보통신사회를 가능케 하며 소비 패턴도 「정보의 소비」형태가 될 것』이라고 주장, 큰 반향을 일으켰다.
국내에서는 이즈음 KETRI가 82년 세계에서 9번째로 TDX-1 개발에 성공한 것을 비롯 83년 삼성반도체통신이 KIET의 특정연구과제 개발결과를 기반으로 세계에서 3번째로 64K D램 개발에 성공했다는 발표 등이 잇따라 터져 나왔다. 또 한국전기통신공사와 한국데이타통신주식회사(현 데이콤)가 출범하면서 통신서비스가 시작됐고 이어 청와대 과학기술진흥확대회의가 83년을 「정보산업의 해」로 지정하자, 사람들은 우리나라가 순식간에 하이테크 혁명기에 들어선 것처럼 들뜨기 시작했다. 그러나 당시 컴퓨터, 반도체, 통신 분야에 대한 투자규모나 기술 수준으로 볼 때 미국, 일본, 유럽 등 선진국과는 적지 않은 차이가 있었다.
바로 이런 점을 간파한 정부는 81년에 작성된 제5차 경제개발 5개년 계획에서 통신기기의 성능과 품질향상을 위해서는 반도체와 컴퓨터의 사용이 필수적임을 직시했고 관련 산업의 지원을 주요 정책목표로 설정해 놓고 있던 터였다. 그러나 실제로 지원 수준은 매우 미미한 것이었다. 더욱이 통신부문과 전자부문의 기술 개발이 각각 서로 다른 연구소에 의해 진행되는 상황에서는 상호 기술통합이나 지원체계는 요원할 수밖에 없었다.
KETRI(통신부문)와 KIET(컴퓨터「반도체)의 통합은 사실 이들이 출범한 직후인 77년 말부터 상공부에 의해 논의돼온 것이었다. 당시 3대 연구소 가운데 KIET는 상공부, KTRI는 체신부, 한국전기기기시험연구소는 동자부 소속이었는데 상공부가 이를 KIET 중심으로 통합하자는 안을 냈던 것이다. 물론 이 안은 정보산업 주도권을 놓고 대립하던 과기처와 체신부의 반대에 부닥쳐 빛을 보지 못했다.
상공부 안은 그러나 80년 11월 국보위에 의해 그대로 받아들여져 KETRI를 탄생시켰다. 하지만 이때 통합된 곳은 KTRI와 한국전기기기시험연구소 뿐이었다. KIET가 제외된 것은 국보위로서도 어쩔 수 없는 일이었다. KIET는 정부 예산이 빈약해 국제부흥개발은행(IBRD)의 차관을 들여와 구미공단내에 설립한 것이었는데 IBRD측이 연구소 통폐합을 반대했던 것이다. 그러나 이에 굴복할 국보위가 아니었다. 국보위는 KETRI와 KIET의 소장 및 감사를 겸임시킴으로써 행정적 차원의 통합을 시도했다. 그뿐만 아니라 「출연연구소 운영개선 방안」이라는 것을 만들어 컴퓨터, 반도체, 통신, 전기부문 출연연구소의 소속을 모두 과기처로 단일화 해버렸던 것이다.
두 연구소의 행정 통합체제는 겸임소장이던 최순달(전 과기처장관)이 82년 사임하면서 쉽게 끝이 나는 듯했다. KETRI와 KIET가 각각 백영학(현 ETRI초빙연구원)과 김정덕(현 과기처 연구개발조정실장) 등 두 공학박사를 각각 소장으로 영입하면서 다른 길을 걷기 시작했기 때문이다.
두 연구소가 다시 통합 절차를 밟게된 것은 KIET가 84년초 정기이사회에서 구미공단내 6만평의 연구시설과 부지를 매각하고 다른 지역에 안정된 연구시설을 확보할 것을 결의하면서 부터였다. 당초 KIET가 구미공업단지에 들어서게 된 것은 고향인 구미에 대규모 전자공업단지를 조성하겠다는 박정희 대통령의 강력한 의지에 따른 것이었다. 그러나 구미는 고급 연구원들과 그의 가족을 유치하기에 문화적 교육적 환경이 너무 미약했던 도시였다. KIET 내부 사정 역시 신기술개발 연구에 대한 재원 확보가 어려워지면서 연구소 운영에 상당한 어려움을 겪던 터였다.
이와중에서 KIET는 84년 4월 구미단지 시설과 부지를 금성반도체에 매각하고 KETRI 옆의 5만여평을 사들여 대덕단지로 이전했다. 굳이 KETRI 인근 부지를 사들인 것은 두 연구소의 통합을 의식하지 않을 수 없었기 때문이었다.
이런 움직들이 결실을 맺어 두 연구소의 통합은 84년 8월부터 과기처에 의해 본격 검토됐고 마침내 그해 12월29일에 열렸던 제48차 경제장관회의에서 의결됐다.
ETRI는 85년 3월26일 대전지방법원에 전두환 대통령을 설립자로 한 설립등기를 마침으로써 그해 5월 정식 출범할 수 있게 됐다. 초대 소장에는 한국전기통신공사 제2부사장에 이어 말년의 KETRI소장을 하던 경상현(전 정통부 장관)이, 이사에는 한국전기통신공사 사장 이우재(전 체신부장관), 한국데이타통신 사장 이용태(현 삼보컴퓨터 회장)이 각각 임명됐다.
그러고 보면 우리나라 컴퓨터, 통신, 반도체 분야 연구 활동의 맥은 76년부터 80년까지 KIET, KTRI, 한국전기시험연구소 등 트로이카가 활동하던 제1세대, 81년부터 85년 초까지 KETRI와 KIET가 활동하던 제2세대, 그리고 ETRI가 활동해온 제3세대 이후로 구분해 볼 수 있겠다.
<서현진 기자>
작성일자 : 1996.10.31
서현진 기자 E-MAIL:jsuh@www.etnews.co.kr
컴퓨터 파노라마 (40) 정착기 (4) 국산신기술 제품 보호 조치와 수입자유화 차례로 돌아가기
국산 마이크로 컴퓨터를 생산하던 삼성반도체통신(89년 삼성전자로 합병)과 금성사가 72년 제정된 기술촉진법을 들어 이른바 「국산 신기술 제품 보호요청서」를 과학기술처에 제출한 한 것은 84년 3월이었다. 보호 요청한 신기술 제품은 「삼성 수퍼마이크로-16(SSM-16)」과 「금성 마이티컴퓨터-5010(GMC-5010)」으로, 양사가 자체 개발한 16비트 마이크로 컴퓨터 제품이었다. 기술촉진법 제정 이후 컴퓨터에 대한 국산 신기술 제품 보호요청서가 제출된 것은 전자산업을 통틀어 처음이었다. 당시 금성중앙연구소에서 「GMC-5010」의 개발을 지휘했던 K씨(현재 미국거주)의 회고는 다음과 같다.
『마이크로 컴퓨터 개발기술이 세계적으로 보편화하긴 했지만 처음으로 국산화가 이루어진 것이므로 개발기술 자체를 정부가 보호해야 한다는 것이 보호요청서를 제출하게 된 동기였습니다. 보호대상으로 지정되면 해당 신기술 제품은 정부기관 등에서 컴퓨터를 구매할 경우 우선 구매되는 특전을 얻을 수 있었죠.』
대상 제품 가운데 「SSM-16」은 82년 과학기술처의 기업주도 특정연구개발과제로 선정돼 삼성반도체통신과 출연연구소인 한국전자기술연구소(KIET)의 방승양 박사(현 포항공대 교수)팀이 2년 동안 공동 개발한 것이었고 정부예산을 포함, 모두 22억원의 총 연구개발비가 투입됐다. 이 제품은 모토롤러 68000(10) 기반의 주기판과 입출력 보드로 이루어진 하드웨어에 미국 AT&T의 유닉스 운용체계 「시스템 버전릴리스7(SVR7)」을 이식한 것이었다.
「GMC-5010」 역시 82년 과학기술처 기업주도 특정연구사업의 일환으로 금성사 중앙연구소와 KIET의 방승양 박사팀이 2년여에 걸쳐 공동 개발한 것이었다. 투자된 총 연구개발비는 10억원이었다. 이 제품은 「SSM-16」과 달리 인텔 8086(8) 기반의 주기판에 PC 운용체계인 「CP/M」과 「PC DOS」(MS DOS의 IBM 버전)를 이식한 것이었다.
그런데 이 두 특정연구에 투입된 정부 예산비율은 「SSM-16」이 30%(6억여원), 「GMC-5010」이 70%(7억여원)나 되고 있었다. 비슷한 시기에 과기처와 문교부가 추진한 교육용 컴퓨터 5천대 보급계획에 10억원의 예산이 투입된 점을 감안한다면 이같은 연구개발비 규모는 단일 프로젝트로는 엄청난 것이었다.
제출된 보호요청서에서 삼성반도체통신과 금성사는 자사 제품에 대해 각각 2가지씩 신기술 보호를 신청하고 있었다. 그러나 우연이었는지, 보호를 신청한 2가지 신기술의 내용은 대동소이한 것이었다. 2가지 신기술 가운데 하나는 하드웨어 설계에서 시험까지를 국산화했다는 것이었고 다른 하나는 외국 운용체계를 자체 설계한 하드웨어에 이식했다는 것이었다.
두 회사의 국산 신기술 제품 보호요청서가 접수되자, 과기처는 아연 긴장했다. 보호요청서가 접수됐다는 그 자체 때문이 아니었다. 요청서 제출은 오히려 과기처측과 사전에 합의가 이루어진 것이었다. 어떻게 보면 이 아이디어는 과기처가 먼저 서둘러 만들어 낸 것이라고도 할 수 있었다. 당시 정보기술관과 소속 사무관이던 P씨의 회고를 들어보자.
『과기처 입장에서 보면 10억원이 훨씬 넘는 예산을 투입해 개발한 국산 마이크로 컴퓨터가 반드시 성공해야만 했습니다. 그러나 이제 갓 시제품 수준을 벗어난 「SSM-16」과 「GMC-5010」이 성능과 지명도에서 외국 제품과 경쟁할 수는 없는 노릇이었죠. 따라서 과기처는 특정 연구에 참여한 기업에 정부기관 등에 대한 판로를 확보해줌으로써 최소한 투자비 정도는 회수할 수 있게 할 요량이었던 겁니다.』
과기처의 최대 관건은 접수된 요청서에 대해 과연 주무장관(경제기획원, 상공부)의 찬성 소견을 얻어 낼 수 있느냐는 것이었다. 여러 정황으로 보아 주무장관들의 소견은 반대입장일 것이 분명했다. 기술개발촉진법 시행령 (당시 81년 2차개정본) 제10조 규정에 따르면 국산 신기술 제품의 기술적, 경제적 타당성 여부에는 주무장관의 의견을 미리 듣게끔 돼 있었다. 물론 이 때 주무장관이 반대의견을 제시했다고 해서 반드시 보호대상에서 제외한다는 규정은 없었다. 하지만 기존 폴리에스테르 필름이나 단열재 등의 경우에서 보여진 것처럼 주무장관의 의견은 제품의 판로에 적지 않은 영향을 끼칠 수 있었다.
과기처는 84년 4월 한달 동안 두 회사가 보내온 보호요청서를 한국과학기술원(KAIST)과 KIET 등 연구소와 대학 등에 보내 기술적 자문을 얻었다. 그런 다음 그해 5월 말 관계부처와 단체 관계자 및 전문가의 의견을 검수하고 통합하는 자리를 마련했다. 관계부처란 물론 경제기획원과 상공부였다. 단체 대표로는 삼성반도체통신과 금성사를 회원사로 거느린 한국전자공업진흥회 관계자가, 전문가 대표로는 KAIST와 KIET 연구원을 비롯한 대학교수들이 참석했다.
한편 삼성반도체통신과 금성사는 앞서 접수시킨 보호요청서에서 직시한 2가지 신기술에 대한 다양한 보호방법을 제시해 놓고 있었다. 이를테면 정부가 일정기간 동안(2∼5년) 자사 제품과 유사한 외국기종의 수입 및 중복 제조를 규제해 줄 것과 유사기술의 도입을 금지해 줄 것 등이었다. 이같은 요청은 사실상 정부가 두 회사를 제외한 나머지 민간 컴퓨터회사에 대해 일정기간 동안 관련사업을 중지시켜 달라는 것과 같았다.
수입규제 등의 요청에 대해 두 회사가 제시한 이유도 그럴 듯했다. 우선 정부가 앞장서 국산 신기술을 장려하고 외화를 절약해야 한다는 점을 강조했다. 그러나 좀 더 궁극적인 것은 엄청난 규모의 투자비를 회수하고 판매시 적정 이윤을 보장받아야 한다는 것이었다.
84년 5월 말 과기처 회의실에서 각계 관계자 20여명이 참석한 가운데 열렸던 의견 검수 및 통합과정은 예상대로 이해관계가 첨예하게 얽힌 각축장이 되고 있었다.
먼저 발언에 나선 전문가그룹은 뉘앙스에는 차이가 있었지만 대부분 삼성과 금성의 신기술 보호요청을 받아들이는 것이 타당하다는 주장을 폈다. 타당론을 펼친 전문가 중에는 「SSM-16」이나 「GMC-5010」의 개발에 참여했던 이도 있었다.
『물론 신기술이라는 의미의 기준은 모호하다. 하지만 이번 제품은 개발과정이 처음부터 국내기술로 이루어진 점을 높이 살 필요가 있다. 특히 막대한 연구비와 인력을 투자해 일궈낸 운용체계 이식과정은 분명 신기술에 속하는 것이다. 그렇다면 그것을 인정하는 응분의 조치가 따라줘야 할 것 아닌가.』(KIET측 P박사)
컴퓨터의 도입(수입)심의를 관장해 온 상공부의 입장은 정반대였다. 상공부는 줄곧 국내 컴퓨터산업의 다양화와 성장을 도모하기 위해서는 제품수입과 기술도입을 자유화하자는 원칙론을 고수하며 수입규제와 기술도입 금지에 대해 반대입장을 분명히 했다.
『AT&T 유닉스 소스코드는 세계 어느곳에서든지 자유롭게 구할 수 있으며 이를 하드웨어에 이식하는 기술도 이미 보편화돼 있다. 그런 기술을 특정연구개발 결과라 해 보호하자는 것은 무리가 따를 수밖에 없다. 또 유사기종의 범위에 대한 규명도 쉽지 않은 상황이다. 기업들이 제시한 보호방법보다는 다른 지원책을 강구하는 것이 바람직할 것 같다.』(L서기관)
30만달러 이하의 컴퓨터에 대한 도입(수입)심의 업무를 대행하던 상공부 산하단체 한국전자공업진흥회 역시 아무래도 상공부 의견을따라가지 않을 수 없는 입장이었다. 그렇다고 무작정 회원사 입장을 거스를 수만도 없는 처지였다.
『몇년 전부터 10만달러 이하 16비트 컴퓨터의 수입은 규제하지 않고 있다. 유사기종의 수입규제는 수입업자가 도의적으로 판단할 일이라고 본다.』(P이사)
변수는 예산배정과 공정거래 등의 정책과 관련된 경제기획원이었다. 과기처가 줄곧 「SSM-16」과 「GMC-5010」에 채용된 신기술의 영향력과 파급성과에 가치를 두고 있었던 데 반해 경제기획원은 두 제품이 신기술 보호조치됐을 경우 국내외 시장에 미치는 영향에 관점을 두고 있었다. 결론은 완곡한 반대였다.
『수입규제는 수입자유화시책에 역행하며 중복제조 규제 역시 자율경쟁체제에 위반된다. 컴퓨터 기술도입을 막아서도 안된다는 입장이다. 그렇다고 두 제품을 정부가 보호할 필요가 없다는 것은 아니다. 두 제품은 이미 정부가 상당수 예산을 지원함으로써 보호받지 않았는가. 또 세제감면 혜택도 주어지지 않았는가. 이미 보호받고 있는 제품을 중복 보호한다면 특혜의혹을 살 것이다.』(C사무관)
이같은 의견수렴은 그러나 형식에 그치는 것이었다. 84년 7월 3일 과기처는 역사상 최초로 두 민간기업이 신청한 컴퓨터 신기술 제품 보호요청에 대해 「보호키로 결정했음」이라는 결론을 내려버렸다. 뒤따른 보호조치로는 「SSM-16」과 「GMC-5010」에 대해 「정부 및 투자기관 등에서 우선 구매토록 조달청장에게 요청」하는 것이었고 그 기간은 「조치일로부터 1년」으로 정했다.
결과론적인 얘기지만 「SSM-16」과 「GMC-5010」의 신기술 제품 보호조치는 5공화국 후반에서 6공화국 초반에 본격화된 국가기간전산망 시스템 구매과정이나 중형 컴퓨터(타이컴) 개발정책 등에 직접적인 영향을 미치게 됐음은 물론이다.
〈서현진 기자〉
사족:「SSM-16」은 그 후 삼성그룹이 중형 컴퓨터 개발을 전략분야로 꼽은 데 힘입어 「SSM-32로 업그레이드되는 등 제품수명이 연장됐으나 「GMC-5010」은 판매실적이 거의 없는 상황에서 곧바로 단종됐다.
작성일자 : 1996.11.07
컴퓨터 파노라마 (41) 정착기 (5) 2.18개각과 국가기간전산망사업 추진 차례로 돌아가기
5공화국시절인 85년 2월18일에 있었던 개각은 22개 부처 가운데 12개 부처 장관이 경질된 전면 개각이었다. 진의종 총리가 물러가고 노신영 안기부장이 새로운 총리에 기용된 이 개각구도를 놓고 언론들은 대체적으로 「5공화국의 체제 강화」라는 정치적 해석에 거의 이의가 없었다. 전면 개각을 단행한 이 장관의 스캔들이나 경제정책의 실패에 따라 경제팀이 물갈이된 상황도 아니었다. 경제팀의 경우 경제기획원, 재무부, 농수산수, 상공부, 동자부, 건설부, 체신부, 교통부, 과기처 등 9개 부처 가운데 경질된 각료는 과기처, 체신부, 농수산부 장관 뿐이었다.
그러나 개각 자체가 워낙 정치성이 짙어 미쳐 언론의 스포트라이트를 받지 못했지만 컴퓨터를 포함해서 정보산업 분야에 국한해 본다면 이 개각은 분명 의미가 있었다. 과기처, 상공부, 체신부, 총무처 등 당시 우리나라 정보산업 정책경쟁을 벌이던 4개 부처 가운데 3개 부처의 장관이 새로 기용됐기 때문이었다.
이들 4명의 정보팀 장관 가운데 금진호 상공부 장관만 유임됐다. 신임 과기처 장관에는 육사11기 출신의 김성진 체신부 장관, 체신부 장관에는 이자헌 민정당 의원, 총무처 장관에는 박세직 안기부 차장이 각각 기용됐다. 얼핏보면 매우 평범한 모양새였으나 정보팀 장관 개개인을 살펴보면 나름대로 정치적 배경과 실력을 갖고 있었다. 장관들의 이같은 면모는 아직 독자산업이 되지 못하고 있던 정보산업 주도권을 놓고 4개 부처가 벌여온 정책경쟁이 새로운 국면에 들어설 것임을 예고하는 대목이었다.
2.18개각 당시는 때마침 대통령 비서실장을 위원장으로 하는 국가기간전산산망조정위원회에 의해 5대 국가기간전산망 사업추진 계획이 범부처적으로 수립되는 단계였다. 5대 국가기간전산망에 대한 규모나 의미는 구체적인 계획이 짜여지지 않았더라도 웬만한 사람들이라면 능히 짐작할 수 있는 것이었다. 작게는 정보산업에 대한 비전이, 크게는 정보화사회와 국가경쟁력의 관건이 이 사업에 달려 있었다. 84년 12월 행정망 계획이 마련된 이후 중간계획이 작성될 때마다 수시로 핫라인을 통해 청와대에 보고됐고 이 때문에 과기처와 체신부 등 관계부처 공무원들 사이에서도 뜨거운 관심거리가 아닐 수 없었다. 국가기간전산망사업의 추진주체에 따라 부처의 존망이 판가름날 지경이었다. 체신부 통신정책국에서 재직했던 서기관 Y씨는 2.18개각 때 정보팀 장관들에 대한 관련부처의 분위기를 이렇게 증언하고 있다.
『4명의 장관 모두 재직시 강력한 정치적 소신을 보여줬던 것으로 기억됩니다. 체신부에서 과기처로 자리를 옮긴 김성진 장관은 예외적으로 정통 테크노크라트 계열로 분류됐죠. 예비역 육군 준장이었지만 이학박사와 공학박사로서 국방과학연구소장을 역임하기도 했었으니까요. 물론 금진호 장관의 경우는 정치적 파워와 업무추진력이 함께 뛰어나 상공부 직원들로부터 좋은 평판을 받았던 것으로 들었습니다만 이자헌 장관이나 박세직 장관은 추진력과는 별개로 실무분야에서는 해당부처에서 이견이 많았던 것으로 기억됩니다.』
실제 체신부의 경우 83년경부터 주된 정책방향이 전기통신과 정보산업의 접목으로 모아지고 있었던 터라 장관 역시 실무에 밝은 테크노크라트였으면 하는 바램이 직원들의 정서였던 것으로 전해지고 있다. 당시 체신부 차관은 오명 전 건설교통부 장관이었는데 그가 워낙 통신분야에 밝아 김성진 장관(현 한국전산원 비상근이사장)을 대신 과기처로 보냈다는 설이 회자되고 있기도 했다.
총무처 역시 국가기간전산망조정위원회가 마련한 「행정전산망사업 추진계획」이 대통령에 보고돼 이 계획에 대한 보완과 기초조사를 벌이고 있는 상황에서 장관이 바뀌었다. 총무처는 이를테면 국가기간전산망 추진을 위한 전자정보통신팀의 주관부처로서의 새로운 역할이 기다리고 있었던 상황이었다.
이에 반해 그때까지 사실상 정보산업 영역을 양분해 오던 과기처와 상공부는 비교적 느긋한 입장이었다. 과기처의 경우 전임 이정오 장관(현 한국과학기술원 석좌교수) 역시 실무정책에 밝은 군출신 테크노크라트였으나 추진력에서는 신임 김장관이 앞설 것이라는 기대가 우세했다. 상공부에서도 상공부 기획관리실장, 국보위 상공분과위원장, 5공화국 출범 상공부 차관 경력을 가진 금진호 장관의 유임을 크게 반기는 분위기였다.
2.18개각에 대에 대한 의미는 개각 직후부터 시작된 부처별 새해 업무보고 등을 통해 드러나고 있었다. 아니나 다를까 각 부처들은 2∼3년내에 본격 추진될 국가기간전산망 사업의 이니셔티브를 의식, 요란한 정보산업 육성계획들을 쏟아 내놨다.
개각 후 하루가 지난 2월19일 상공부가 먼저 「85년도 컴퓨터산업 육성계획」이라는 것을 내놓았다. 주요 기기 및 부품의 국산화, 국산 컴퓨터 개발 여건조성, 컴퓨터산업의 수출산업화, 컴퓨터 이용기술의 확대, 전문인력 양성 등 5대 시책이 골자였다.
이에 앞서 84년 상공부는 전자산업부문 생산규모를 전년도의 2.5배인 75억 달러로 신장시켰고 26억 달러이던 수출액도 45억 달러로 늘려 놓았다. 당시 대통령의 관심은 온통 전자산업의 확대발전이었는데 금진호 장관이 유임된 것도 바로 이같은 성과 때문이었다는 해석이 지배적이었다.
이 여세를 몰아 상공부는 5대 시책을 통해 설비투자를 확대하고 국산화 여건와 국제경쟁력을 성숙시켜 컴퓨터부문의 독자산업화를 시도하고 나선 것이었다. 이 계획 작업에 참여했던 전자전기공업국 소속 과장이었던 L씨의 회고.
『국가기간전산망사업은 물론 86아시안 게임 및 88올림픽 특수를 앞두고 있었던 상황에서 상공부의 컴퓨터산업 육성계획 수립 방침은 매우 의욕적이었습니다. 우선 국산화 작업을 통해 주요 사업의 이니셔티브를 쥘 요량이었습니다. 84년이 기반 구축의 해였다면 85년은 내실을 기하는 해로 정했지요. 우선 컴퓨터 국산화와 수출을 촉진시키겠다는 방침 아래 이미 전자 부문에서 풍부한 민관 매개역할 경험을 갖고 있는 한국전자공업진흥회를 전면에 내세우기 했습니다. 실제 기업들에 대한 관세 감면, 전자공업진흥기금 지원, 인력양성 등의 업무가 한국전자공업진흥회에 의해 이루어지기도 했습니다.』
상공부가 컴퓨터 육성계획을 발표하자 그로부터 1주일 뒤 이번에는 장관이 바뀐 과기처가 「정보산업 집중육성 10개년 계획」이라는 것을 내놓았다. 물론 이 계획은 과기처가 84년부터 준비해 오던 정보산업에 대한 중장기 마스터플랜이긴 했으나 『기술 주도의 경제사회 발전을 계획을 적극 펼쳐 나가겠다』고 취임식에서 밝힌 김성진 장관의 의지가 그대로 반영된 것이기도 해서 더욱 주목을 끌었다.
10개년 계획은 85년부 94년까지 10년동안 우리나라 정보산업 생산규모를 각각 국민총생산의 25%, 수출액의 20%까지 끌어 올리며 전국 규모의 네트워크를 구축하는 것을 전제로 전국민의 30% 이상이 가정용 컴퓨터 단말기(홈터미널)을 사용할 수 있도록 하겠다는 것이 골자였다. 여기에는 또 매년 4백명의 박사와 2천명의 석사를 배출한다는 내용도 포함돼 있었다. 당시 과기처 정보산업기술국 소속 사무관으로서 「정보산업 집중육성 10개년 계획」에 참여했던 L씨의 회고.
『사실 과기처는 처음부터, 그러니까 컴퓨터가 처음 도입되던 60년대 말부터 정보산업 정책 전담부처로서 위치와 자존심을 지키려 고심했습니다. 사실 과기처가 상공부나 체신부의 견제에 대해 그렇게 크게 신경쓴 것 같지는 않았는데 언론이나 업계가 앞서 대립적 상황으로 몰고가곤 했죠. 10개년 계획도 그런 차원에서 마련됐습니다. 상공부 등이 미미컴퓨터니, 프린터니 하는 구체적 품목들의 국산화를 실현하겠다는 식의 육성계획을 내놓았다면 과기처는 더욱 포괄적이고 지표적인 육성계획을 내놓아야 된다는 것이 기본 방침워었죠. 이런 관점에서 산업표준 제정이나 저작보호에서부터 음성인식이나 한글처리인터페이스등 기반기술에 이르기까지 산업 파급효과와 연관효과가 높은 분야에 대한 중장기 계획을 정리한 것이 바로 「정보산업 집중육성 10개년 계획」이었습니다.』
그러나 실제로 상공부의 컴퓨터산업육성계획이나 과기처의 정보산업 집중육성계획은 그 내용의 표현방식이나 각론 등에서만 차이가 있었을 뿐 각 정책이 지향하는 바나 목적은 대동소이한 것이었다. 에컨대 상공부가 민간기업과 공동으로 32비트 유닉스컴퓨터를 단계적으로 개발하겠다는 것이나 과기처가 90년도까지 32비트 마이크로컴퓨터시스템의 개발을 완료하겠다는 식의 계획은 내용적으로도 유사할 뿐 아니라 정부 예산 집행 측면에서도 이중 투자에 해당하는 것이었다. 그런점에서 본다면 장관이 바뀐 체신부가 업무보고에서 내놓은 의욕적인 육성계획 역시 두 부처의 그것들과 크게 다를 바 없었다.
체신부는 85년 업무보고에서 국가기간전산망의 구성추진을 비롯 초고집적반도체(VLSI)와 32비트 컴퓨터의 개발과 전문 기술인력양성 등 다양한 분야의 정보산업육성 계획을 내놨다. 체신부는 이같은 계획들을 85년 3월에 출범한 한국전자통신연구소(ETRI)를 통해 추진함으로써 국가기간전산망 사업 추진 주체로서 가장 유리한 입장에 선다는 방침이었다.
아뭏튼 상공부, 과기처, 체신부 등이 2.18개각을 계기로 쏟아 놓은 산업육성정책들은 국가기간전산망 사업 추진을 계기로 확대발전의 길을 걷기 시작한 컴퓨터 산업 분야가 다양한 실험과정을 걷게될 것임을 예고하는 것이었다.
<서현진 기자>
작성일자 : 1996.11.14
서현진 기자 E-MAIL:jsuh@www.etnews.co.kr
컴퓨터 파노라마 (42) 정착기 (6) 국가기간전산망사업 추진 계획 (상) 차례로 돌아가기
5대 국가기간전산망은 행정전산망, 금융전산망, 교육연구전산망, 국방망, 공안망 등을 말한다. 5대 전산망을 정부 차원에서 추진하겠다는 계획은 5공화국 초기인 82년부터 추진돼 86년 12월 31일 「전산망 보급확장과 이용촉진에 관한 법률시행령」이 통과되기까지 4년여의 준비기간을 거쳐 87년부터 본격 시행됐다.
이 사업은 컴퓨터 수요의 창출, 체계적인 정보산업 육성정책의 필요성, 경제적이고 효율적인 정부구현이라는 시대적 요구가 절묘하게 맞아떨어진, 건국 이래 최대의 국가 프로젝트 가운데 하나였다. 그러나 이 계획은 입안과정에 참여했던 소수 관계자만이 성공에 대한 확신을 가졌을 만큼 사업 자체에 도박적인 요소들이 많았다. 또 도처에 극복해야 할 무리수나 난제가 하나둘이 아니었다.
훗날 사람들이 『이 사업이 추진될 수 있었던 것은 특수한 정치적(이를테면 5공화국과 같은) 상황이었기 때문』이라고 말할 수 있었던 것도 그런 이유에서다. 바꿔 말하면 이 계획의 입안이나 사업 추진과정에서 그만큼 의혹이 많았다는 얘기가 된다.
그러나 그것이 부정적이든 긍정적이든 오늘날 우리나라 정보산업은 이 5대 전산망사업 추진을 계기로 비로소 독립적인 분야로 면모를 갖췄다고 해도 과언이 아닐 성싶다.
어느 분야에서도 한 시대를 마감하고 또 한 시대가 거듭나는 분수령은 있게 마련이다. 지난해 12월 16일 첫 회를 내보냈던 「컴퓨터 파노라마」는 당초 여기까지를 염두에 두고 1년여 동안 연재해 왔다. 이제 5대 전산망계획의 재조명과정을 통해 컴퓨터 파노라마의 대미를 장식하려는 것도 이 분수령이라는 의미를 쉽게 간과할 수 없기 때문이다. 앞으로 본란 44회까지 3회 동안 몇 개의 작은 제목으로 5대 전산망에 대한 얘기들을 소개하고자 한다.
제1화-「국가기간전산망사업 추진전야」
85년 가을 정기국회에는 정보산업과 관련된 3건의 입법안이 상정돼 있었다. 국무회의가 의결한 「과학기술혁신 기본법안」과 「공업발전법안」 그리고 여당인 민정당 안으로 제출된 「전산망 보급확장과 이용촉진에 관한 법률안」 등이 그것이었다. 명칭에서 알 수 있듯이 3개 법안 가운데 과기혁신법안은 과기처, 공업발전법안은 상공부와 각각 관련이 있었다.
그렇다면 전산망 보급 확장법안은 당연히 체신부와 관련이 있을 터였다. 사실 이 법안은 애당초 체신부가 마련하려 했던 「정보화사회 기반조성법안」이 그 모태였다. 그러나 이 법안은 처음부터 관련부처 사이에서 「체신부의 정보산업 독점관리화」라는 의도로 해석되면서 강력한 반대에 부닥쳤다.
이에 민정당은 그 내용은 그대로 받아 전산망 보급확장과 이용촉진에 관한 법률안으로 바꿔 여당안으로 확정한 것이었다. 민정당은 때마침 85년 초 치른 12대 총선에서 전산망 보급 관련 입법을 공약으로 내세운 바 있었다.
3개 법안 가운데 과기혁신법안은 기존 과학기술진흥법과 기술개발촉진법을 폐기하는 대신 만든 것이었다. 그러나 구법들이 산업 측면에 역점을 두었다면 새 법안은 소프트웨어와 같은 기초기술 진흥에 초점이 맞춰져 있었다. 원래는 「정보산업의 육성」과 같은 문구가 일부 조항에 명시돼 있었으나 관계부처간 협의과정에서 삭제됐다. 아무튼 이 법안의 골자는 과기처로 하여금 산업발전의 전면에 나설 수 있는 근거를 상당부분 축소시켜 놓은 것이었다.
공업발전법안은 기계, 전자, 철강 등 7개나 되던 기존의 육성법을 통폐합한 것으로 공업의 균형발전, 업종합리화, 공업발전기금의 설치 등이 골자였다. 이 법안 역시 처음에는 상공부의 야심을 그대로 반영, 정보산업정책 관할조항을 잔뜩 명시했다가 다른 법과 지나치게 중복되는 부분이 많다는 지적에 따라 여러번의 자구수정을 거친 상태였다.
문제는 민정당이 제출한 전산망 보급확장과 이용촉진에 관한 법률안이었다. 국회에 제출된 3개 법안 가운데 유일하게 조항마다 「정보산업」이니 「전산망」이니 하는 문구들이 횡행하고 있던 것이 바로 이 법안이었다.
이 법안의 골자는 전산망(통신망)과 하드웨어 및 소프트웨어의 균형발전을 통해 정보산업을 육성하고 정보사회를 실현한다는 것이었다.
이 법안에서는 구체적으로 전기통신사업자의 전산망사업 참여, 전산망 소요기기와 기술의 국산화, 호환성 확보를 위한 표준화사업 전문인력 양성 등 사실상 국가 차원의 정보산업 육성 등이 명시돼 있었다. 폐기 직전에 있던 체신부의 정보화사회 기반조성법안을 20여일 만에 이름만 바꿔 재포장한 것이었다. 일이 이쯤 되고 보니 이 안을 여당안으로 확정하기 위한 공청회가 열리는 때를 전후해 민정당과 체신부의 밀월설이 나돌았다.
민정당과 체신부의 밀월에 가장 노골적으로 반발한 곳은 상공부였다. 당시 전자전기공업국 소속 과장이었던 L씨의 회고는 다음과 같다.
『전산망 보급확장법안은 체신부가 여당을 업고 내놓은 법이었죠. 상공부에서는 정보산업을 공업발전법에 의해 합리화업종으로 지정해 민간기업에 대한 지원을 염두에 두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체신부가 이를 가로막고 오히려 모든 것을 독점하겠다는 상황이 돼 있지 않았겠습니까.』
그러나 애당초 상공부 입장에서는 부처의 특성상 정보산업 육성정책 전체를 상징하는 전산망사업을 펼치겠다는 것은 아니었다. 공업발전법 입안취지에서도 보여지듯이 상공부는 하드웨어를 정책수단으로 정보산업 전반에 영향력을 미치겠다는 의도였다.
입장이 아이러니하게 돼버린 것은 과기처 쪽이었다. 여태까지 정보산업정책을 주도해 온 과기처로서는 민정당의 전산망 보급확장법안에 상공부보다 더 노골적으로 반발하는 것이 수순일 터였다. 그러나 과기처는 어찌된 일인지 시종 어정쩡한 입장으로 일관했다. 실무자 사이에서는 분명 민정당 안에 반발하는 것처럼 보이다가도 공식입장은 언제나 중도였다.
왜 그랬을까. 이 의문점에 대한 단서는 85년 2월 18일 개각때 체신부에서 과기처로 자리를 이동한 김성진 장관이 쥐고 있었다.
체신부 재직시 기회가 있을 때마다 자신의 소신은 『컴퓨터와 통신의 결합추세에 따라 정보산업 육성은 체신부가 주도해야 한다』는 것이라고 주장해 오던 김 장관이었다. 그러던 그가 자리를 바꿔 해당업무 흡수대상이던 과기처 수장으로 옮겨 앉은 것이었다. 과기처 정보산업기술국 소속이던 L씨의 회고를 들어보자.
『김 장관은 부임 초기 「정보산업 집중육성 10개년 계획」을 발표하면서 상당한 의욕을 보였죠. 그러나 이 계획은 전임 장관 때 거의 마무리된 것이었고 김 장관은 발표만 했을 뿐이었습니다. 김 장관의 평소 소신을 잘 알고 있던 과기처 직원들은 한동안 정부 산업 관련조직이나 업무가 대폭 축소되거나 체신부에 이관된다는 설에시달렸습니다. 김 장관의 소신과 관련해 사실로 드러난 것이 하나 있었는데, 그것이 바로 전산망 보급확장법안에 대한 것이었습니다. 이 법안과 관련해서만큼은 일정 부분에 대해 체신부 쪽을 밀어준다는 것이 과기처의 공식입장이었던 거죠.』
한편 전산망 보급확장과 이용촉진에 관한 법률안에 대한 관련부처나 업계의 입장은 이 안을 민정당의 국회상정안으로 확정하기 위한 85년 10월 7일 민정당 공청회에서도 그대로 나타났다. 언론에 지상중계되거나 요약된 기사들의 재구성을 통해 공청회에 참석했던 각 패널들의 입장을 옮겨보자.
『경제정책이 정부에서 민간 주도로 옮겨가는 이 때에 특정 산업을 정부가 나서 육성하겠다는 것은 어불성설이다. 그뿐만 아니라 적지 않은 조항들이 미국의 통상법 301조에 적용될 소지가 다분하다.』 (상공부 전자전기공업국 L 국장)
『정보사회란 모든 사회가 다 같이 흘러가야 되는 것인데 어느 한 부처가 모든 것을 주도해서는 안된다. 부처마다 기능별로 맡아야 할 역할이 따로 있다고 본다. 첨단기술 개발까지를 전산망 보급확장법안이 규정한다면 어떻게 되겠는가.』 (과기처 기술정책실 C 실장)
『제도나 법규가 부처마다 서로 상치되는 것이 많아 사업자들이 큰 불편을 겪어왔다. 전산망사업에서 부처이기주의 때문에 표준이나 호환성같은 분야에 혼선이 초래된다면 국가경쟁력 차원에서 얼마나 큰 손실이겠는가.』 (체신부 통신정책국 Y 국장)
『관련 육성법이 없어 정보산업이 어려움에 처한 것이 아니다. 새로운 법 제정에 신경쓰기 이전에 기존의 법을 충분히 활용하는 것이 중요하지 않은가. 시급한 것은 누가 주도하든가 정부와 민간기업간의 역할분담과 질서체계가 잡혀야 한다는 것이다.』 (한국소프트웨어연구조합 P 이사장)
아무튼 85년 가을 국회에서는 과학기술혁신 기본법과 공업발전법만 통과됐다. 전산망 보급확장과 이용촉진에 관한 법률은 이듬해 5월에서야 제정됐다. 체신부와 민정당의 의지 그대로였다. 이 법의 시행은 특히 체신부에 엄청난 지위격상을 의미했다. 5대 국가기간전산망사업의 추진과정이 곧 이 법에 의해 이루어졌기 때문이다.
당시 체신부 차관으로 전산망 보급확장법 입안을 주도한 것으로 알려지고 있는 오명 전 체신부 장관은 전산망 보급확장과 이용촉진에 관한 법률시행령이 통과된 직후 가진 한 인터뷰에서 다음과 같이 말하고 있다.
『이 법이 통과됐으므로 이제 하나의 줄거리가 잡힌 셈입니다.』
〈서현진 기자〉
작성일자 : 1996.11.21
컴퓨터 파노라마 (43) 정착기 (7) 차례로 돌아가기
행정망, 금융망, 교육연구망, 국방망, 공안망 등 5대 국가기간전산망사업 추진에 대한 세부지침이 처음 마련된 것은 국가기간전산망조정위원회가 85년 5월 청와대에 보고한 「국가기간전산망 중간보고 및 행정전산망 추진계획(안)」에서였다. 87년부터 본격 추진된 국가기간전산망사업의 직접적인 단서가 된 이 계획안에는 각 전산망에 대한 망별 사업목표와 중점 추진사항, 추진전담기관 등이 구체적으로 적시돼 있었다. 행정망의 경우는 소프트웨어, 하드웨어, 통신, 운영 등 부문별로 소요되는 예산 추정액이 나름대로 구체성을 띠었고 전산화에 따른 예산절감효과도 분석돼 있었다.
이에 앞서 정부 공식문건에서 국가기간전산망사업 추진계획이 처음으로 등장한 것은 83년 12월 정보산업육성위원회가 청와대에 보고한 「국가기간전산망 계획(안)」에서였다.
각계 2백여 기관 및 전문가 의견을 토대로 작성된 이 계획안은 5대 국가기간전산망을 구성 운영하는 목적에 대해 「국가 전체의 투자대비 효과를 최대화하고 국내 정보산업을 육성하기 위한 것」이라고 표현하고 있다. 5대 망사업 추진 근거가 바로 이 문구 하나에 들어 있음을 알 수 있다.
이 계획안은 또 5대 망에 대한 망별 구성과 포괄적인 운영계획을 처음으로 제시했다. 이 계획은 나중에 여러번의 보완을 거쳐 종국에는 원형을 거의 잃어버리긴 했지만 5대 국가기간전산망사업의 필요성을 처음으로 대내외에 공식화했다는 역사적 의미를 갖는다.
「국가기간전산망 계획(안)」 문건 기초작업에 참여했던 체신부 소속 Y씨의 회고다.
『사실 이 문건은 기존의 몇몇 자료와 소관부처의 아이디어들을 모아 만든 페이퍼워크 차원이었습니다. 이해가 부족했던 국방망의 경우 구체적인 설명없이 「주관부처는 국방부」 하는 식이었으니까요. 하지만 이 문건이 나중에 구체적인 계획안 작성 때 많은 영향을 끼쳤는데 전산망사업 추진 원칙과 기관별 역할을 제시했다는 것이 가장 큰 성과입니다. 예컨대 전산망 이용자 입장에서 정부부처나 기관은 소관업무 개선에 중점을 두고 전산망 설치나 운영 등 기술사항은 별도의 전문기관이 책임지도록 한다는 조항이었죠.』
정보산업육성위원회는 같은 해 7월 「국가기간전산망 계획 관련사항」(7월)을 보고한 데 이어 각계로부터 「국가기간전산망 구성, 운영을 위한 제안」 의견청취 과정(10월)을 거친 뒤 이를 토대로 12월 마침내 「국가기간전산망계획(안)」을 청와대에 보고했다.
「국가기간전산망」이라는 용어 자체가 처음 등장한 것도 이들 문건 가운데 하나인 「국가기간전산망계획 관련사항 보고」에서였다. 이 문건 제1항에는 「국내 전체 전산화체계는 종국적으로 국방망, 정보망, 행정망(일반행정, 금융, 교육, 기술정보 등)이 포함된 국가기간전산망을 중심으로 하여 구성, 연결하는 것이 바람직함」이라는 문구가 등장하는데 이것이 바로 「국가기간전산망」이라는 단어의 효시였다. 다시 Y씨의 회고다(Y씨는 당시 정보산업육성위원위 산하 실무위원회 위원이었다).
『바로 이전의 문건에서는 「정부전산화」라는 단어를 사용했었죠. 사실 정부전산화라는 말은 너무 밋밋한데다 당시까지 정보산업을 주도하던 과기처식의 표현이기도 했습니다. 컴퓨터와 통신의 결합을 주장해온 체신부의 입장을 제가 대변해서 전산망이라는 표현을 사용하게 됐던 겁니다.』
「국가기간전산망계획(안)」에 대한 첫 보완은 6개월 뒤인 84년 6월 대통령비서실이 중심이 된 「국가기간전산망 계획 추진보고」에서 이루어졌다. 여기서는 5대 망 사업추진에 대한 포괄적이고 핵심적인 지침이 마련됐다. 5대 망이 행정망, 금융망, 교육연구망, 국방망, 공안망으로 최종 압축된 것도 이 보고서에서였다.
이 보고서는 또 처음으로 5대 망에 대한 범위를 정해 놓고 있었는데 행정망은 정부 각 원부처청과 지방행정기관 및 기타 공공기관이 포함돼 있었다. 또 국방망은 국방부와 육해공군 및 병무청을, 당초 정보망에서 명칭이 바뀐 공안망은 안기부와 치안본부 및 검찰을 각각 대상으로 했다. 새로 추가된 금융망은 은행과 농협 및 우체국을, 교육연구망은 대학과 연구소 등을 각각 범주에 포함시켰다.
그러나 이 보고서 내용은 청와대가 5대 망사업 추진을 직접 관장하겠다는 대목에서 정부부처나 산하 관련기관에 큰 파문을 던졌다. 청와대가 당초부터 염두에 두었던 분야는 행정망과 금융망이었다. 행정망의 경우 각 부처, 산하 지방행정기관, 공공기관 등 관련 기관이 부지기수인데다 업무 자체도 이질적인 요소가 많아 업무조정에 난항이 예상되던 터였다. 금융망 역시 마찬가지여서 20개가 넘는 은행 등 금융기관의 상호 이해관계가 첨예하게 얽혀 있는 분야였다. 청와대는 바로 이같은 분야에 대한 조정과 지원을 직접 챙기겠다는 것이었다.
금융망추진위원회 자문회의 위원이었던 과기처 J씨의 회고.
『5대 망 사업은 5공출범 직후부터 구상돼왔습니다. 정권 안보나 정통성 확보 차원에서 이 사업이 추진된다는 애기가 더 설득력 있게 퍼져 있었죠. 청와대의 직접 조정 의지에 행정망과 금융망 관련 기관에서 긴장했던 것은 당시 강압적인 청와대의 스타일을 잘알고 있었기 때문이었습니다. (각기관들이 스스로 업무조정을 하지 않을 경우) 청와대의 개입은 불보듯 뻔한 것인데 자칫 대규모 조직개편이나 인사이동과 같은 불똥으로 까지 튈 우려가 다분한 상황이었던 거죠.』
청와대가 5대망 사업 추진에 대한 조정과 지원을 위해 만든 기구가 국기간전산망조정위원회였다. 위원장은 기존 정보산업육성위원회와 마찬가지로 대통령비서실장이 맡았다. 위원은 소관부처 차관과 청와대 정무2, 경제, 교문수석 등이었다. 한편 앞서 언급했던 85년5월의 「국가기간전산망 중간보고 및 행전전산망 추진계획(안)」에서 주목할 만한 대목은 보고서 명칭에서도 나타나듯 행정망에 대한 비중과 위상이 크게 높아졌다는 사실이었다. 5대 망에 대한 각각의 비중을 동등하게 다뤘던 이전 문건과는 판이하게 달라진 것이었다. 이것은 행정망이 다른 4개망에 대해 규모면이나 전산화에 대한 상징효과 면에서 행정망이 앞도적인 비중을 차지했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무엇보다도 행정망에 대한 중요성은 이 망을 구축하는데 소요되는 하드웨어와 소프트웨어 및 통신망에 대한 표준규격과 기술 국산화가 미치는 파급효과 때문이었다. 즉 행정망 사업에는 엄청난 규모의 장비와 소프트웨어 개발이 요구된다는 점에서 우리나라 정보산업 발전의 사활이 달려 있었던 것이다. 더욱이 행정망에서 정해진 각종 표준은 나머지 4대망 사업에도 그대로 적용될 판이었다.
실제 5대망 가운데 가장 먼저 사업이 추진된 것도 87년 행정망이었다. 나머지 4개망은 88년과 89년 2년 동안 준비기간을 거쳐 90년부터 본격적인 삽질이 시작됐던 것이다.
행정망의 경우 본격적인 사업 시작은 「전산망 보급 확장과 이용촉진에 관한 법률」이 발표되는 87년1월부터였지만 실질적으로는 전산망조정위원회가 「다기능사무기기(워크스테이션) 보급계획(안)」을 내놓은 86년 1월부터라고 할수 있었다.
다기능사무기기란 일선 업무에 사용되는 개인용컴퓨터로서 전산망조정위원회는 이계획안에서 86년 3월부터 88년3월까지 2년동안 5천1백85대를 각급기관에 보급하겠다는 것이 골자였다. 대당 2백10만원으로 책정된 다기능사무기기의 관납을 놓고 정보산업계가 바짝 달아올랐음은 물론이다.
그러나 전산망조정위원회는 이 계획안에서 정작 중요한 것에 대한 언급을 얼버무리고 있었다. 당장 필요한 다기능사무기기 구입등 행정망 사업추진에 소요되는 자금 지원에 대한 부문을 명확히 하지 않았던 것이다. 5대 국가기간전산망 사업 추진 계획이 처음부터 졸속으로 만들어졌다는 비난이 시작된 것은 바로 여기서부터였다.
<서현진 기자>
작성일자 : 1996.11.28
서현진 기자 E-MAIL:jsuh@www.etnews.co.kr
컴퓨터 파노라마 (44) 정착기 (8) 국가기간전산망사업 추진 계획 (하)-행정망 사업 차례로 돌아가기
지난 회에 언급한 것처럼 5대 국가기간전산망사업 추진계획 가운데 규모나 파급효과 면에서 압도적 비중을 차지했던 것은 행정전산망이었다. 정보산업에 대한 정부의 육성의지를 가장 잘 나타내 보이려고 했던 것도 행정전산망이었다. 그런 만큼 행정전산망사업 추진과정은 다른 4대망에 비해 말도 많고 탈도 많았다. 사전에 단 한 푼의 소요자금도 마련해 놓지 않고서 사업계획부터 만들어 낸 것이 말도 많고 탈도 많게 된 요인이었다.
행정전산망 사업계획에 대한 종합적인 윤곽이 처음으로 드러난 것은 85년 12월 청와대 비서실 경제수석실이 작성한 「국가기간전산망사업 관련사항 보고」 문건에서였다. 이 보고서에 따르면 행정망에 대한 추진목표는 「작고 효율적인 정부의 구현」 「전국 어디서나 공평한 정보전달로 주민편의 증대」 「정보산업의 육성」 등 3가지였다. 또 주민관 대상업무로 지정됐다.
일부 사업이 시작되는 86년부터 사업이 마무리되는 95년까지 10년간 소요될 자금은 모두 7천6백7억원이었다. 여기에 소요되는 주전산기는 2백83대, 다기능 사무기기(워크스테이션)는 2만7천9백24대, 전문인력은 2천8백30명이었다. 86년부터 5천대의 워크스테이션이 일선 기관에 보급되고 87년까지 2년에 걸쳐 국산 주전산기와 소프트웨어의 개발이 완료된다는 것을 골자로 하는 추진일정도 있었다.
행정전산망사업의 부처별 책임자는 각 부처 차관으로 정해졌고 총괄부처는 총무처, 전체 설계와 기술지원 전담기관은 한국데이타통신(현 데이콤)이 각각 맡도록 했다. 보고서 내용의 백미는 행정망사업에 참여하는 관련 부처가 많고 업무내용이 다양해 종합적인 조정통제기능이 필요하다는 것을 역설해 놓은 부분이었다. 이 보고서의 결론은 결국 당분간 이 조정통제기능을 대통령 직속의 국가기간전산망조정위원회가 맡게 된다는 애기였다.
물론 이같은 내용의 보고서가 87년 2월 완성된 최종판 「행정전산망 종합계획(안)」에 1백% 그대로 수용됐다는 것은 아니다. 86년 12월 「전산망 보급확장과 이용촉진에 관한 법률시행령」이 제정되고 난 직후 작성된 「행정전산망 종합계획(안)」은 85년 12월의 보고서에 비교할 수 없을 만큼 구체적으로 자세한 내용으로 채워져 있었다.
그러나 이 때의 보고서 내용 가운데는 후일 행정전산망사업이 본격적으로 추진되는 과정에서 없어서는 안될 결정적인 단서 하나가 들어 있었다. 바로 행정전산망사업 추진을 위한 자금조달방안이었다. 이 보고서의 내용을 그대로 옮겨보면 이렇다.
1. 소요자금은 행정전산망 전담관리기관(한국데이타통신)을 통하여 선투자하고 행정망 완성 후 사용료로 정부예산에서 연차적으로 상환함.
2. 행정전산망 소요 컴퓨터시스템의 개발비, 구입비, 운영비의 종합지원이 가능토록 행정망 소요자금지원 전담회사를 한국전기통신공사 자회사로 설립해서 운영.
이 두개 항 가운데 1번 항은 이전 보고서에서도 비슷한 내용이 언급된 바는 있었으나 2번 항은 이 보고서를 통해 처음 제시된 자금조달방안이었다.
행정전산망에 대한 일련의 보고서나 계획안 내용은 그렇지 않아도 당시 정보산업계로부터 비상한 관심이 모아지고 있던 터였다. 기업 관계자들은 보고서의 자구 하나하나에 의미를 달리할 만큼 신경을 쓰던 터였다. 앞서 설명한 행정전산망사업의 목표에도 나와 있듯이 정부는 정보산업 육성을 위해 행정전산망과 관련해 가능한 모든 부분에 대해 민간업체 참여를 개방할 방침이었다. 당시로서 총소요자금 7천6백억원은 어마어마한 액수였다.
더욱이 그 규모만큼의 컴퓨터가 도입되고 소프트웨어가 개발될 경우 파급효과나 연계수요는 상상을 초월할 것이었다. 그러나 구체적인 시행계획은 하나도 확정되지 않고 있었다. 기업들의 답답한 심정은 미루어 짐작할 수 있는 것이었다. 당시 삼성전자에서 컴퓨터영업을 담당하던 O씨(현재 미국체류중)의 회고는 다음과 같다.
『기업들은 국가기간전산망조정위원회나 청와대 비서실의 일거수 일투족에 민감하게 반응했습니다. 기업의 관심사는 역시 하드웨어를 국산화해 공급하는 것과 소프트웨어의 수주개발 용역이었죠. 그러나 사실 행정전산망에 소요될 하드웨어가 국산이란 원칙만 정해졌을 뿐 구체적인 규격이나 개발방법은 제시돼 있지 못했습니다. 그런 상황에서 전담기관으로 지정된 한국데이타통신 관계자들은 기업들의 집중적인 로비대상이 됐죠.』
85년 12월의 보고서에서 적시된 자금조달방안이 초미의 관심사가 된 사정도 이같은 분위기와 크게 다를 바 없었다. 다른 분야도 마찬가지였겠지만 사실 행정전산망사업 추진의 성패는 이 자금조달방안의 실현 여부가 쥐고 있는 상황이었다. 게다가 정부는 앞서 옮겨 놓은 보고서 내용 1번 항에서처럼 행정전산망사업에 예산의 선투입은 할 수 없다는 것이 기본방침이었다. 물론 그럴만한 정부 예산이 마련돼 있는 것도 아니었다. 야당이나 언론은 『단 한 푼의 예산확보도 없이 무슨 심산으로 행정망사업을 추진하려느냐』며 연일 청와대측에 화살을 퍼부어 댔다.
원래 행정전산망사업 관련 자금조달방안이 처음 문건화한 것은 84년 12월 국가기간전산망조정위원회가 작성한 「행정전산망사업 추진계획(안)」에서였다. 이 보고서에서 언급된 것은 그러나 「한국데이타통신이 선투자하면 사업완료 후 정부예산에서 사용료를 지불」한다는 식이었다.
그나마 이 정도라도 언급한 것은 다행이었다. 83년 7월부터 행정전산망 사업추진계획이 대내외에 공표되면서도 청와대나 국가기간전산망조정위원회는 각종 문건에서 자금소요 내역은 적시해 놓고 있으면서도 자금조달방안은 제시하지 않아 혼선을 초래했다.
행정전산망사업 추진에 대한 청와대와 국가기간전산망조정위원회측의 이같은 이중성은 85년 정기국회 예산심의에서도 잘 나타나고 있다.
85년 5월 국가기간전산망조정위원회의 「국가기간전산망 중간보고 및 행정전산망 추진계획(안)」과 85년 12월의 「국가기간전산망사업 관련사항 보고」에서는 이미 86년부터 5천대의 워크스테이션을 일선 기관에 보급키로 하는 일정을 잡아놓고 있었다. 이같은 일정을 진행시키려면 당장 86년부터 정부예산이 집행되도록 해야 하는데 청와대 등은 85년 정기국회 예산심의안에 워크스테이션 구입비용안을 아예 상정조차 하지 않았던 것이다(실제 워크스테이션 보급계획은 상당한 차질을 빚어 87년부터 본격적인 보급이 이루어기 시작했다).
85년 12월의 「국가기간전산망사업 관련사항 보고」에서 제시된 자금조달방안은 본격적인 행정전산망사업 추진에 결정적인 단서를 제공해 준 것은 사실이었지만 이를 구체화하는 데는 무려 1년이란 세월을 소비해야 했다.
한편 시스템설계와 소프트웨어개발 책임기관인 한국데이타통신은 예산이 확보되지 못해 2년여가 지나도록 행정전산망사업과 관련된 실질적인 업무는 단 한건도 처리하지 못하고 있었다.
그런데 당시 용역사업분야는 국가예산에서 배제돼 있었고 예산회계법상 모든 예산은 사전심의를 거친 곳에만 집행한다는 규정이 있었다. 따라서 개발결과를 봐야 상품으로서의 가치를 판단할 수 있는 소프트웨어 등 용역사업에는 예산집행을 위한 사전심의나 감리는 어떤 형태로든 불가능한 상황이었다.
이런 상황에서 청와대 경제수석실이 행정전산망용 컴퓨터의 개발, 구입, 운영 등 소요자금을 지원할 전담회사를 한국전기통신공사 자회사 형태로 설립하겠다는 것은 신선한 충격이었다. 이 자회사를 통해 모든 자금을 조달하겠다는 것이 청와대나 국가기간전산망조정위원회의 기본방침이었다. 한국데이타통신도 사업추진에 당장 활기를 띠었다.
한국전기통신공사가 직접 한국데이타통신에 투자할 수 없었던 것은 자금투자방식이 나중에 상환받는 금융사업의 형태를 띠고 있었기 때문이다. 당시 한국전기통신공사 정관에는 금융사업을 할 수 없게 돼 있었다.
이런 배경 속에 86년 11월 한국전기통신공사가 1백% 출자해 출범한 회사가 한국통신진흥주식회사다. 한국통신진흥은 출범과 함께 86년 76억원, 88년 6백83억원, 88년 7백54억원 등 모두 1천5백13억원의 자금을 한국데이타통신에 지원한다고 발표했다. 역사적인 행정전산망사업 추진에 대한 물꼬가 터지는 순간이었다.
이어서 86년 12월에는 이같은 정부예산(한국전기통신공사는 엄연한 정부기관이었으므로)을 집행해주기 위한 사전 감리(심의)기관인 한국전산원의 설립이 완료된다.
한국통신진흥주식회사와 한국전산원 설립에 대한 법적 근거는 무었이었을까. 이 근거가 바로 오명 전 체신부 장관이 『이 법이 통과됐으므로 이제 하나의 줄거리가 잡힌 셈입니다』(본란 제42호 참조)라고 표현했던 「전산망 보급확장과 이용촉진에 관한 법률시행령」이다.
<서현진 기자>
작성일자 : 1996.12.05
서현진 기자 E-MAIL:jsuh@www.etnews.co.kr
컴퓨터 파노라마 (45.끝) 에필로그 차례로 돌아가기
지금으로부터 꼭 1년 전인 95년 12월11일자에 첫 회를 내보냈던 「컴퓨터 파노라마」가 45회째인 이번 회를 끝으로 대단원의 막을 내린다. 이 시리즈는 지난 67년부터 86년 말까지 20년 동안의 우리나라 컴퓨터산업 역사를 연대별로 41개 사건으로 재구성한 것이다.
잘 알려져 있다시피 67년은 「IBM 1401」이라는 컴퓨터가 우리나라에 처음으로 도입된 해다. 또 86년은 87년부터 시작된 국가기간전산망 사업추진 계획이 갖가지 역경을 딛고 완성된 해다. 국가기간전산망사업 추진은 두말할 것도 없이 우리나라 컴퓨터산업이 20년 동안의 방황기를 끝내고 비로소 정착하는 계기를 마련해준 사건이다.
이제 97년이면 국내에 컴퓨터가 도입된 지 꼭 30주년이 되는 해다. 본지가 이 시리즈를 기획하게 된 것은 바로 이 30주년의 뜻을 되새기기 위한 의도였다. 나아가서는 과거를 되살펴봄으로써 새로 시작될 역사의 징검다리로서 기록을 남기기 위한 욕심도 없지 않았다. 국내에서 아직 이렇다 할 컴퓨터도입 역사가 없었다는 사실은 특히 이같은 욕심을 더욱 강하게 자극하는 요인이 되기도 했다.
41개의 사건들은 95년 12월11일 게재했던 첫 회 『「IBM 1401」에서 「한글윈도우95」까지』에서 밝혔던 것처럼 객관적인 고증자료나 관련인물의 인터뷰 또는 당시의 보도기사들을 근거로 재구성한 것들이다.
이들 사건은 다시 도입기(67~69), 적응기(70~74년), 도약기(75~79년), 방황기(80~83년), 정착기(84~86년) 등 5개의 주제별 연대기로 다시 분류했다. 도입기는 「IBM 1401」이 도입된 직후 국내외적인 상황을 다루는데 역점을 두었다. 정부, 기업, 일반인들 모두 「컴퓨터는 만능기계」라는 식의 맹목적인 이해 속에 컴퓨터를 바라보던 시각들이 4개의 사건으로 정리돼 있다. 국내에 처음 도입된 컴퓨터가 IBM의 「IBM 1401」인가 후지쯔의 「파콤222」인가를 놓고 벌여온 업계 논쟁도 다뤘다.
적응기에서는 70년 이후 정부기관과 민간기업들 사이에 컴퓨터 도입이 늘어나면서 「컴퓨터를 어떻게 활용했는가」라는 주제 속에 벌어졌던 사건들이 9개로 정리했다. 이 시기에 컴퓨터는 중학교 무시험추첨이나 대학 예비고사 채점작업 등 현실과 가까운 곳에서 아주 편리하고 긴요하고 사용되지만 아울러 AID아파트 부정 추점사건 등에도 깊숙하게 개입됨으로써 사람들에게 적지 않은 혼선을 가져다준다.
도약기는 비로소 외국에서 만들어져 외국의 문화습관대로 사용돼온 컴퓨터를 「어떻게 국산화할 것인가」가라는 물음이 지배하던 시절이었다. 이 물음은 정부차원에서 집중적으로 거론됨으로써 행동에 옮겨졌는데 이들에 관한 이야기는 10개의 사건으로 묶어졌다. 컴퓨터의 진가를 파악한 3공화국이 컴퓨터 중심의 전자입국 정책이 시도되고 미약하나마 정보산업을 육성하겠다는 의지가 표명됐다. 성기수 박사가 이끄는 KAIST전산센터가 우리나라 컴퓨터산업의 거의 모든 기술적 기반을 떠받치던 시기이기도 했다. 민간에서는 컴퓨터 국산화를 놓고 삼성과 금성의 별들의 전쟁이 시작되고 이를 지원하게 될 한국전자기술연구소 등의 출연연구소가 등장한다. 국산 컴퓨터 1호 「세종」이 이 때 탄생한다.
방황기에서는 80년을 전후한 정치적 혼란이 자생력이 취약한 컴퓨터산업분야에 얼마나 막대한 영향을 미쳤는가를 11개의 사건을 통해 다뤘다. 이 시기의 주제는 「컴퓨터가 어떻게 정권안보에 도움이 될 수 있느냐」였다. 국산화에 배치되면 산업적으로 당장 필요한 컴퓨터도 수입이 금지되는 수난시대였다. 5공화국 후기에 완성된 국가기간전산망 사업추진 계획도 사실은 이때부터 긴밀하게 논의되던 것이다. 「정보산업의 해」가 선포됐고 전시 행정의 극단을 보여준 교육용컴퓨터 5천대 보급계획이 이 시기에 만들어졌다. 그러나 이 시기의 컴퓨터 기술은 이미 총선 당락을 예측할 수 있을 만큼 세련돼 가고 있었다. 이같은 상반된 평가 속에서도 정보산업정책 주도권을 확보하기 위한 과기처, 상공부, 체신부의 밥그룻 싸움은 본격화됐다.
정착기는 우수한 엔지니어들의 대규모 배출과 관계에 진출한 정통 테크노크라트들의 부상에 힙입어 정부 차원에서 대규모 컴퓨터 프로젝트들이 기획되던 시대다. 86아시안게임 및 88올림픽전산시스템 개발이 본격화됐고 행정전산망을 포함한 초대규모 국가기간전망망사업 추진계획이 확정됐다. 모두 6개 사건을 다뤄진 이시대의 주제는 「90년대 이후를 위한 정보산업의 육성」이었다. 6개 가운데 특히 청와대가 직접 추진한 국가기간전산망사업 계획은 미래 전략산업으로서 정보산업의 육성과 효율적인 행정부 구축이라는 2대 과제를 동시에 달성할 수 있다는 점에서 범국가적인 관심을 보인 사건이었다. 물론 이같은 프로젝트들의 추진과정에서 돌출되곤 했던 과도한 정치적 긴장감 때문에 나타난 폐혜도 적지 않았다. 5개의 주제별 연대기를 일지로 정리하면 <표>와 같다.
필자가 지난 1년 동안 「컴퓨터 파노라마」를 연재하면서 새삼 깨달은 바가 하나 있다면 그것은 『컴퓨터는 정직하다』는 사실이었다. 30년 동안을 이어 내려오면서 컴퓨터의 모습이 조금도 변하지 않았음을 확인한 것은 다행스러운 일이었다. 하지만 그런 컴퓨터를 다루거나 통치하려 했던 사람들과 정책은 시간에 따라 무수하게 바뀌고 변질된 것은 참으로 안타끼운 일이었다.
대학에서 사용되는 컴퓨터 원론 교과서에는 지금도 이런 명언이 통한다.
「Gold in gold out, Garbage in Garbage out」 (컴퓨터에 금을 입력하면 금을 출력하고 쓰레기를 입력하면 역시 쓰레기를 출력한다). 이 말은 컴퓨터가 오로지 사람이 시키는 일만 처리할 수 있는 융통성 없는 기계라고 비꼬는 것이지만 또 그만큼 오차가 없는 정직한 기계라는 의미로도 해석된다.
지난 30년을 돌이켜보건대 우리 정부나 기업들은 컴퓨터에 대해 경쟁적으로 지나친 애정(?)을 보여왔다. 그 결과는 자신에게만 가치가 있는, 그래서 결국은 남들에게는 허섭쓰레기로 보일 수밖에 없는 것들만 컴퓨터에 입력한 꼴이었다. 이제와서 그 허허실실이 드러나고 있는 컴퓨터 국산화정책이나 교육용 컴퓨터 보급계획 등은 애정이 넘쳐서 만들어진 대표적인 사건들이었다. 바로 이런 것을 되짚어보기 위해 우리는 과거의 기록들을 중시하는 것이다.
「컴퓨터 파노라마」를 끝까지 애독해주신 독자 여러분에게 감사드린다. 「컴퓨터 파노라마」는 독자 여러분의 격려에 힘입어 내년 1월 단행본으로 출간될 예정이다. 또 훗날 이 시리즈의 속편격인 1987년 이후를 정리할 계획임을 밝혀둔다. 자료제공과 인터뷰에 협조해주신 여러분께 고마움을 표한다. 끝으로 이 자리를 빌려 지난 1월 8일자(3회) 본란에서 필자의 부주의로 생존을 바꿔 표기했던 원로학자 최형섭 박사에게도 진심으로 사과드린다.
<서현진 기자>
<>국내 컴퓨터도입사 연대기(1961~1986)
도입기
1961년
3월, 내무부 통계국 천공카드시스템(PCS) 1백30대 도입
1964년
5월, 이만영 박사 전자관식 아날로그 계산기 개발
1966년
2월, 한국과학기술연구소(KIST) 출범
1967년
1월 한국생산성본부 전자계산소 발족
4월 경제기획원 국내 최초 컴퓨터 IBM 1401도입, 과학기술처 출범, 한국IBM 창립
5월 생산성본부, 파콤222 도입
6월 KIST 전자계산실 발족 및 CDC 3300 도입
9월 과기처, 전자계산조직개발위원회 설치, 컨트롤데이타코리아(CDK)창립
10월 재단법인 한국전자계산소 발족
1968년
4월 과학기술처 공무원 전산교육 실시
5월 유한양행, IBM 1401 도입(민간 최초)
10월 한국유니백 창립
1969년
1월 서강대, 유니백 SS-80도입(대학 최초)
10월 금융단전자계산본부(KBCC)발족, 서울 홍릉에 KIST단지 준공
적응기
1970년
2월 중학교 컴퓨터 무시험 추첨
3월 숭실대 전자계산학과 설치(대학 최초)
4월 과기처산하 중앙전자계산소(현 정부전자계산소) 발족
1971년
3월 스페리랜드코리아(현 한국유니시스) 창립
12월 KIST, 대학예비고사 채점 전산화
1972년
10월 치안본부, 유니백9400도입, 주민등록전산화
11월 외환은행, 서울-부산자점간 온라인 개통(국내 최초)
1973년
2월 한국정보과학회 출범, KIST, 국산 컴퓨터 1호 세종 완성
10월 반포AID아파트 부정추첨사건(최초의 컴퓨터 범죄)
1974년
2월 화콤코리아(현 한국후지쯔) 창립
도약기
1975년
1월 박대통령, 행정전산화 추진 지시
9월 동양전산기술, 「오리콤540」개발(최초 국산 OEM기종)
1976년
2월 한국전자공업진흥회 창립
11월 KIST와 금성전기, GSCOM-80A(최초 국산마이크로 컴퓨터) 및 잉크젯프린터 개발
12월 한국전자기술연구소(KIET), KIST부설 한국전자통신연구소(KCRI), 한국전기기기 시험연구소 발족1977년
10월 문교부, 전국 8개 국립대학에 HP기종 보급
12월 한국통신기술연구소(KTRI)발족
1978년
2월 총무처, 행정전산화 기본계획 발표
3월 삼성전자, 한글모아쓰기 CRT단말기개발(국내 최초)
7월 행정전산 시범사업 추진(충북도청)
8월 금성사 컴퓨터사업부 신설
1979년
2월 전경련, 정보산업협의회 발기
9월 KIST, 후지쯔에 국산 소프트웨어 수출(국내 최초)
방황기
1980년
6월 공업진흥청, 컴퓨터와 주변기기에 대한 표준설계 기준 마련
1981년
1월 KIST와 KAIS가 KAIST로 통합
10월 한국전기통신공사 발족
1982년
1월 행정업무 전산화 추진규정 제정
3월 한국데이타통신 발족
10월 공업진흥청, 컴퓨터 표준화 KS규격고시
12월 행정전산화 기본계획 수립
1983년
1월 정보산업의 해 선포
3월 정보산업 육성방안 보고(정보산업육성위원회 구성)
7월 국가기간전산망계획관련사항 보고
9월 KAIST와 고려시스템 공동으로 명필 워드프로세서 개발
정착기
1984년
3월 국가기간전산망조정위원회 발족
4월 한국데이타통신, 전자사서함 서비스 실시
6월 국가기간전산망 계획 추진 보고
1985년
5월 국가기간전산망 중간보고 및 행정망 추진계획(안)
한국전자통신연구소( ETRI)발족
12월 제1단계 행정망 추진계획 중간보고
1986년
1월 다기능사무기기 보급계획(안)발표
5월 전산망 보급확장과 이용촉진에 관한 법률제정
12월 전산망 보급확장과 이용촉진에 관한 법률 사행령 제정
공업진흥청, 정보교환용 한글표준코드 확정
작성일자 : 1996.12.12
서현진 기자 E-MAIL:jsuh@www.etnews.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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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현진 기자 E-MAIL:jsuh@www.etnews.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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