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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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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발자 전향은 쉽습니다.

캐나다 이민을 준비할 때 저는 한국에서 주최된 거의 대부분의 취업박람회와 유학박람회를 모두 참석했습니다. 가는 곳마다 대학들이 와서 브로셔와 책자를 나눠줬고, 나중에 짐 정리할 때 보니 그 책자들만 두 박스가 나오더라구요.

최근 10년간 대학 레벨에서의 공부와 그를 통한 취업 가능성을 놓고 봤을 때, "세상에서" 개발자만큼 쉽고 만만한 직업이 없습니다. 이유를 설명해볼게요.


1. 개발자만큼 쉽게 시작할 수 있는 분야가 없습니다.

물론 저는 그에 동의하지 않지만 6개월만 공부하면 네카라쿠배! 라고 광고하는 사람들이 있죠. 사실 어떤 사람들은 실제로 그걸 이뤄내기도 합니다. 당장 제가 어제 만난 구글러가 파이낸셜 쪽에서 일하다가 부트캠프 6개월 다니고 구글 들어왔다고 하더라구요. 물론 이 글에서 그런 사람들 얘기를 하려는게 아닙니다.

반대로 생각해봅시다. 6개월 일해서 프로 레벨에서 일을 시작이라도 해볼 수 있고, 극소수의 재능을 가진 사람일지언정 업계 최고급 회사에서 일할 수 있는 기회를 주는 업계가 또 뭐가 있습니까?

의사, 약사를 6개월 학원다니고 취업 가능하다고 하면 어떨까요? 문과 계열중에 6개월 교육으로 취업 가능하면서 연봉 5천이상 받는게 가능한 직업을 단 하나만 얘기해보세요. 세상에 이런 직업은 없어요.

1번의 제 주장, 개발자만큼 쉽게 시작할 수 있는 분야가 없다는 얘기를 다른 말로 풀어쓰면, 시작하기는 쉽고 본인의 재능과 적성과 노력, 그리고 운에 따라 세계 최고의 회사에 들어갈 수도 있다는게 됩니다.


2. 다른 쉽게 시작할 수 있는 직업에 비해 몸이 편합니다. (수정)

위 항목에서 쉽게 시작할 수 있는 직종이라고 표현했니 다른 쉽게 시작할 수 있는, 그러니까 학사 학위가 없이도 시작할 수 있는 직업들과 비교를 해봅시다. 저는 그런 직종이 어떤 직종인지 모두 다 알지는 못합니다만 대략 생각해보면 건설업이나 용접, 원양어선 등이 떠오르네요. 이런 기술직이나 리스크를 안고 하는 직종에서는 큰돈을 벌 수 있는 직업도 있을겁니다. 이런 6개월 - 2년 미만의 직업을 고려해봤을 때 개발자보다 몸이 편한 직업이 있을까요?


3. 학사학위 이상의 직업중에 벌이/안정성/향후 전망 대비 공부할게 가장 적으며 효율이 좋습니다.

다른 직종에 있다가 전향한 입장에서 보면 개발자의 가장 큰 엄살이라고 할 수 있는 부분입니다. 저는 벌이나 안정성, 향후 수요를 감안했을 때 개발자가 모든 직종을 통틀어 최상급에 위치해 있다고 보는데요. 그 위치에 있는 직업들의 공부량에 비하면 개발자가 딱히 더 많이 한다라고도 볼 수 없습니다. 

단적으로 말해서, 업계 최고의 회사를 들어가기 위해 필요한 학업량이 얼마나 될까요? 학부레벨이면 충분합니다. 의/치/약처럼 대학원을 필수로 가야하는것도 아니고, 국가고시를 통과하기 위해 몇년씩 투자할 필요도 없죠.

고시 얘기하니까 덧붙이고 싶은데, 개발자는 시험쳐서 되는 직업들에 비해 공부 효율이 훨씬 좋습니다.

저는 공시니 회계사니 준비하는 친구들한테 차라리 개발을 하라고 합니다. 왜냐구요? 공시 실패하면 그 기간동안 남는게 없습니다. 그냥 그만큼의 인생을 날리는거에요. 그런데 개발은 하다가 도저히 안맞아서 포기한다고 해도 그 배운게 회사에서 다 쓰이고 도움이 됩니다. 단적으로 1학년때 배우는 컴싸 개론만 알아서 if문이랑 for문만 돌릴줄 알아도 엑셀 비주얼베이직으로 웬만한 매크로 짤 수 있고요.


4. 커뮤니케이션 코스트가 적거나 최소한 더 높지는 않습니다.

일반 회사에서 UI 디자인 가지고 커뮤니케이션 해본적 있으신분은 쉽게 공감할 수 있을거라 생각합니다. 버튼 모양, 위치, 색깔 가지고 얘기를 하기 시작하면 진짜 개와 소들까지 참여해서 동물농장을 만들어요. 지들도 유저라 이거니까 입한번씩 대고나면 디자인은 산으로 갑니다.

그에 비하면 개발에 관한 커뮤니케이션은 더 쉽습니다. 왜 design decision을 이렇게 했는지 명확하게 비교 가능한 트레이드오프가 있거든요. 비전공자들이 입대는 부분은 개발중심 회사로 가기만 해도 극히 드물어지고, 좋은회사로 갈수록 드물어집니다. 무엇보다 다른 분야는 더 심해요.

저는 기획자로 일할 때 마지막 회사에서 노무사까지 찾아갈정도로 사내 정치에 지쳐있었는데, 개발자가 되니 만족도가 너무 높더라구요. 내가 왜 이런 선택을 했는지 얘기하는데 드는 수고와 시간이 다른 직업보다 월등하게 적습니다.


5. 계속 공부한다는 것은 개발자의 전유물이 아닙니다.

지난 봄에 한국에 들어갔을 때 중학교 동창을 만났습니다. 대기업 계열사에서 사업기획하는 친구라 쭉 문과인데 요즘 뭐하냐고 물어보니까 SQL배워서 웹사이트에서 A/B 테스트 적용해서 유저 UX 짜고 있다고 하더라구요. 니네 개발팀 없냐 물어보니까 일일이 이거해달라 저거해달라 할수가 없어서 그냥 쿼리 배워서 쓰지 하고 배웠다고 합니다. 결혼하고 애가 셋인 친구가요. 

저희 아버지는 평생 보일러 대리점을 하셨는데 트렌드가 바뀔때마다 일일이 뜯어가며 공부하는게 일상이었습니다. 연탄 보일러 시절부터 화목, 가스, 기름, 전기까지요. 본인 브랜드뿐만 아니라 경쟁사것들까지 전부 전화로 증상과 소리만 들어도 아시는 분이었어요.

저는 10년 넘게 기획자를 하면서 별의별 게임을 다 만들어봤습니다. 매번 프로젝트 할때마다 다른 장르를 해서 RPG, SRPG, RTS, 액션, 스포츠, SNG, 퍼즐 등 매번 장르가 겹친적이 한번도 없었어요. 했던 일들도 UI, 시나리오, 데이터, 밸런스, 시스템 기획 등 매번 달랐습니다. 그때마다 처음부터 다시 배워야 했구요. 

주변에 비개발직 직군들 중에 개발 공부하는 친구들 많지 않나요? 걔네들이 할일없어서 취미로 생활코딩 하려고 배우는 것 같습니까? 아니면 어떻게든 살아남으려고, 지금 직업에 비전이 없어서 하는것 같나요?


- 정리

사실 이 글을 쓴 이유는 정의를 명확하게 하기 위함입니다. 저는 국비학원 6개월을 통해 개발자 전향을 하는건 지극히 어렵다고 생각합니다. 다른 분들이 말씀하신대로 "적성"이 안맞을 가능성이 높아요. 그렇기 때문에 시간을 두고 제대로 공부를 하는걸 추천하는겁니다.

6개월 국비 학원을 개발자 교육의 스탠다드로 삼을 순 없습니다. 캐나다도 그렇고 대부분의 국가에서 개발자는 최소한 학사 학위 레벨의 직업으로 인식을 하고 있으니까요. 최근 기준으로 고등학교 졸업생의 70% 이상이 대학을 간다고 하는데, 고작 6개월짜리 학원만 하고 좋고 안정적인 곳에 취업해서 별 노력도 안하고 따박따박 월급이 나올거라고 기대한다면 잘못된거죠.

뭐 사족이지만 저는 이 추세가 바뀌지 않을까? 라고 생각은 합니다. 한국에서 대학 출신 개발자가 적은 이유는 대학이 개발자를 많이 배출 안하기 때문입니다. 서연고 컴공이 1년에 몇명이나 들어가는지 아시나요? 각 학교별 100명도 안뽑습니다. 서울대는 수시 정시 포함 고작 70명을 뽑아요. 제가 다니는 UBC가 전세계 대학순위로 대충 서카포쯤 되는데 컴싸 학생이 얼마나 될까요? 2017년엔 1800명을 넘겼습니다. 매년 컴싸 입학생만요.

제가 개발자 전향을 생각했을때 한국 대학을 다시 갈까 생각했다가 빠르게 포기한 가장 큰 이유는 입학이 너무 어려워서였는데, 향후 10년내로 이 추세는 바뀔거라 봅니다. 입학생이 점점 더 줄어들테니 대학들도 먹고 살기위해 세컨드 디그리 과정을 늘릴것이고, 그렇다면 대학에서 전공코스 70학점만 필수로 이수한 개발자가 탄생할수도 있겠죠. 그게 업계에도, 개인에게도 더 나은 길일거구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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