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osskmk
1k
2022-05-04 14:38:56
5
4752

심심해서 쓰는 과거의 어느 할아버지와의 일화


약 10년 전 즈음 일 겁니다.

서른 살, 당시 저는 벌어둔 돈을 모두 까먹고 월세방 집주인 아주머니의 똑똑 문 두드림에 

숨죽여야 했습니다.

죄명은 스타트업 실패.

일 년 가까이 숨어지내다가 더 이상 버틸 재간이 없어 거지가 될까도 생각했지만

거지가 되는 것은 주인 아주머니를 피하는 것처럼 쉬운게 아니었습니다.


상상해 보십시요. 


거지가 되는 것이 쉬운게 아닙니다.

여러가지 문제가 있겠지만, 가장 큰 문제는 살림살이 였습니다.

TV, 냉장고, 세탁기야 버리고 간다지만 그동안 써놓은 메모장, 책, 사진, 색바랜 팬티, 옷들...


쓰레기통에 버려야 하나...


그냥 두고 떠나야 하나...


아직도 잘 모르겠습니다.

버릴 수도 없고 그냥 두고 떠날 수도 없는 이유를요...


이런 저런 고통 속에서도 배는 고파왔습니다.

얼마 남지 않은 돈으로 사조 참치캔과 오뚜기밥 한 개씩을 샀습니다.

편의점 사장님의 밝게 웃으며 대하는 모습에 방금전 거지가 될려고 했던 생각을 숨긴채

저도 안개 너머 햇살처럼 밝은척 인사했습니다.


무언가 비슷합니다. 집으로 돌아와 렌지에 데운 오뚜기밥도 집밥처럼 따스함을 가졌지만

안개 너머 웃고 있는 제 표정처럼요.

그런데도 입에 한술 넣었을 때는 오뚜기 처럼 일어날 수 있는 힘이 느껴졌습니다.


그래서일까

그 날은 한동안 다니지 않던 교회를 갔습니다.

지하철안은 한산했습니다.

띄엄 띄엄 몇 몇 사람들이 앉아 있었고, 저도 그 사이 앉았습니다.


제 맞은 편에는 띄엄 띄엄 앉아 있는 사람들과 달리 남여 커플이 붙어 앉아 있었습니다.

제 또래로 보였는데, 남자가 왠지 껄렁해보여 시선을 돌렸습니다.

괜히 눈마주치면 시비를 걸 것 같은 느낌이라고 생각하던중

제 등 근육을 경직시키는 소리가 들려왔습니다.


"오빠 하지마, 하지 말라니깐"


자연스럽게 제 시선은 그 커플로 향했고 여자의 시선은 남자를 남자의 시선은 반대편을 향해 있었습니다.

그 남자의 시선을 따라가자 어떤 할아버지 한 분이 싸울듯한 표정으로 남자를 노려보고 있었습니다.


그 남자와 할아버지는 서로 뭘 처다보냐며 욕을 했습니다.

그러다 할아버지가 자리에서 일어나 남자쪽으로 향했습니다.


저는 순간적으로 할아버지 쪽으로 달려가 두 팔로 끌어 안은채 막아 섰습니다.

할아버지는 RPM 을 최대로 올린 덤프트럭 처럼 저를 밀어붙였습니다.

저는 충돌사고를 막기위해 급 브레이크를 밟는 심정으로 최대한 막아섰습니다.


한동안의 대치 상태가 끝나고 남자는 지하철 밖으로 여자에게 끌려 나갔습니다.

할아버지는 시동이 꺼진듯 몸에 힘을 뺐지만 달궈진 엔진처럼 얼굴에는 분노가 남아 있었습니다.

제가 두 팔을 풀며 할아버지를 한걸음 뒤에서 봤을 때, 할아버지는 두 주먹을 꾹 쥐고 계셨습니다.


왜인지 저는 그 두 주먹을 제 두 손으로 감싸며 진정을 시켰는데,

그 할아버지의 두 주먹이 돌덩이 같았습니다.

순간적으로 할아버지가 권투선수인가... 한대 맞으면 나도 쓰러지겠는데...

이런 생각이 들면서 저도 모르게 할아버지에게 말을 쏟아 냈습니다.


"할아버지, 주먹이 장난 아니에요, 저도 한대 맞으면 쓰러질거 같아요."

"할아버지는 왠만한 사람이면 다 이길 수 있을거 같아요."

"그런데 할아버지 그렇게 다 이길 수 있어도 굳이 보여줄 필요는 없어요."

"할아버지는 다 이길 수 있어요. 그래도 굳이 그러지 마세요."

"그냥 밥 잘 먹고 남에게 피해 안주고 사는게 행복이잖아요."


대략 이런 말들을 저도 모르게 쏟아냈습니다.


그러자 할아버지가 갑자기 어린아이처럼 엉엉 울기 시작했습니다.

서른인 내 앞에서 일흔은 되어보이는 노인이 어린 아이처럼 엉엉 우는 것은

상상해본적도 없었습니다.


그렇게 어색한 상황에서 할아버지는 울음을 그치고 진정시키던 제 두 손을 뿌리치며

"저리가" 하시며 자리로 돌아가 앉으셨습니다.

그리고는 진정이 되셨는지 친구분과 통화를 하셨습니다.

대략 막걸리에 삽겹살을 먹자는 내용이었습니다.


마흔인 지금 그 때를 다시 떠올려봤을 때,

그 할아버지에게 했던 말은 서른살인 당시의 제가 누군가에게 듣고 싶었던 말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듭니다.

실패 해도 된다. 꼭 성공하지 않아도 된다. 밥 잘 먹고 남에게 피해 안주고 살면 그것 또한 행복이다.

그러다 또 기회가 오면 다시 도전 하면 되지...



40
2
  • 댓글 5

  • 내일봅세
    308
    2022-05-05 15:24:23

    색바랜 팬티는 원래 무슨 색이었나요

  • 즐기는 개발자
    321
    2022-05-06 14:15:56

    이런 물 흘러가는듯한 이야기 너무 읽기 편안하다,,

  • finance
    367
    2022-05-06 22:03:29

    글을 굉장히 잘쓰시내요.  

  • bosskmk
    1k
    2022-05-06 22:30:43

    @내일봅세

    ㅋㅋㅋ 팬티...글쎄요

    한동안 속옷에 신경쓰지 않아 오래 되어 빛 바랜 형형색색의 팬티들이요.


    @즐기는 개발자

    @finance

    정말인가요? ㅋㅋㅋ 물론 제가 글을 잘 쓴다고 생각하지는 않지만

    그래도 글 쓰는게 재미있습니다.

    다만 요즘들어서는 저도 긴 글을 잘 읽지 않아서,

    최대한 짧고 간결하게 써보려고 노력했습니다.

  • bosskmk
    1k
    2022-05-06 22:34:30

    읽어주시고, 추천 및 댓글 달아주신 모든 분께 감사드립니다.


  • 로그인을 하시면 댓글을 등록할 수 있습니다.